해안선사 오도송 김충현 글씨로 대웅전 장엄
은산철벽도 녹여 버리는 대자유의 경지 노래
[원문]
鐸鳴鍾落又竹(탁명종락우죽비)
鳳飛銀山鐵壁外(봉비은산철벽외)
若人問我喜消息(약인문아희소식)
會僧堂裏滿鉢供(회승당리만발공)
-능가산 내소사 대웅전
[번역]
목탁소리 나자 종 울리고 죽비소리에
봉황은 은산철벽 밖으로 날았도다.
만약 나에게 기쁜 소식을 묻는다면
회승당 안에 만발공양이라 하리라.
[선해(禪解)]
한 여름 뜨거웠던 폭염이 사라지고 만추(晩秋)의 가을이 성큼 다가 왔다. 무릇 이 때가 되면 산승의 마음도 절로 하염없이 풍만해진다. 과일들은 제법 굵어졌고, 벼는 이삭이 패기 시작했다. 서실(書室) 한쪽에 놓아둔 난촉(蘭燭)이 예 없이 파랗게 돋아 있다. 이런 때는 가만히 법당에 앉아 눈을 감고 좌선해 보면, 어디선가 고요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난을 치듯, 서(書)를 치듯 가만 가만 마음을 놓아보면, 선우(禪友)들이 시절 없이 그립고, 금오 스님의 사자후마저 한없이 그리워진다. 결코 짧지 않은 칠십 생이 마치 주마간산처럼 지나간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지어 놓은 천만가지의 일들이 모두 ‘꿈속의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는 표표히 장삼자락을 떨치고 깊은 암자에 들어가 머물고 싶어진다. 귀에는 솔바람이 솔솔 불고 눈앞에는 천리강산이 아득하듯이 말이다.
“저리도록 쓸쓸한 가을바람 / 밤 깊어가도 잠은 안 와 / 저 벌레는 어이 그리 슬피 울어 / 나의 베갯머리를 적시게 하나.” 당대 최고의 선승이었던 경허 스님은 가을을 두고 이렇게 노래를 했다. 참으로 그 어떤 당대의 시인보다도 더 마음을 울리는 절구이다. 그 절찬의 가을이 우리 앞에 와서도 왜 우울한 시대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은 하나의 회고(回顧)이다. 돌아 본 삶에는 언제나 몇 가지의 흔적들이 오롯이 남는다. 지난 여름은 우리 국민들에게 많은 아픔을 던져 주었다. 지난번에도 내가 언급한 바 있듯이 아마 두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떴기 때문이리라. 그 중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는 참으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우울하게 만든다. 민주적 열망을 위해 평생을 보내고,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있게 한 장본인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김 대통령이 연 오찬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2002년 당시 북한과의 서해 해전이 발발한 직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고 한다. 그 때 많은 꽃다운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 김 대통령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시국이 안정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북한과의 햇빛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것이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으로 이어졌고 이후 평화 공존 및 평화 교류의 실현, 화해 협력을 통한 북한의 변화 유도, 남북 상호이익 도모, 이산가족 상호 방문 등 남북 교류가 이어졌으며 이로 인해 김 대통령은 한국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김 대통령께 몇 가지의 제안을 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날 우리나라는 빈부의 격차가 매우 크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너무도 많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서민의 생활을 위해 몇 가지의 정책을 펴 달라고 했다. 그로 인해 탄생한 것이 소외계층 국민들이 사회안전망의 혜택으로 누리고 있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인해 급증하는 노숙자와 극빈자들을 위해 김대중 정부시절 도입된 것으로, 한국 복지국가 건설 투쟁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제도이다. 때문에 김대중 전 대통령도 퇴임 이후 자신의 치적을 거론할 때 빼먹지 않고 주로 거론했던 것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였다.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정책 추진 등 기초 생활 수급 대상을 확정하고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매달 기초연금을 지급하게 된 것이다. 아마 오찬 이전에도 김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그날 불교계와의 만남을 통해 이 제도를 시행하기로 마음을 굳혔던 것 같다. 이 같은 비화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오늘의 주련 여행은 능가산 내소사 대웅전이다. 제24교구본사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633년(백제 무왕 34) 백제의 승려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하여 처음에는 소래사(蘇來寺)라고 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내소사는 소소래사이다.
1633년(조선 인조 11) 청민(淸旻)이 대웅전(大雄殿: 보물 291)을 지었는데, 그 건축양식이 매우 정교하고 환상적이어서 가히 조선 중기 사찰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1865년(고종 2) 관해(觀海)가 중수하고 만허(萬虛)가 보수한 뒤, 1983년 혜산(慧山)이 중창하여 현재의 가람을 이루었다. 이 밖에도 고려동종(高麗銅鐘: 보물 277),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 보물 1268), 3층석탑(전북유형문화재 124), 설선당(說禪堂)과 요사(전북유형문화재 125) 등 여러 문화재가 있으며, 정문에는 실상사지(實相寺址)에서 이건(移建)한 연래루(蓮來樓)가 있다.
내소사의 유래에 관하여, 일설에는 중국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와서 세웠기 때문에 ‘내소(來蘇)’라 하였다고도 하나 이는 와전된 것이며, 원래는 ‘소래사(蘇來寺)’였음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고,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도 고려 인종 때 정지상(鄭知常)이 지은 ‘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라는 시가 기록되어 있다. 또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일기(南行日記)>에도 ‘소래사’라 하였는데, 이것이 언제 ‘내소사’로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부속암자로는 청련암(靑蓮庵)·지장암(地藏庵)이 있다. 1986년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반경 500m 일원이 문화재보호구역(전북기념물 78)으로 지정되었다. 일주문(一柱門)부터 천왕문(天王門)에 걸쳐 약 600m에 이르는 전나무숲길이 유명하다.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관음봉(觀音峰: 433m) 아래에 있는데, 관음봉을 일명 능가산이라고도 하는 까닭에 보통 ‘능가산 내소사’로 부르기도 한다. 내소사 주련의 글귀는 해안 선사의 오도송을 그대로 일중 김충현이 써서 옮긴 것이다. 해안 선사는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이곳 내소사에서 출가해 평생 이곳에서 수행을 하시다가 열반에 드셨다.
‘탁명종락우죽비 봉비은산철벽외: 목탁소리 나자 종 울리고 또 죽비소리에 봉황은 은산철벽 밖으로 날았도다.’
불문에 있어서 경(經)은 혈육(血肉)이 되고 선(禪)은 골수(骨髓)가 된다고 한다. 때문에 선수행을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해안 선사의 발자취와 깨달음의 소리가 이 속에 가득 들어있는데 가만 들여다보면 그 깨달음은 가히 은산철벽을 타파하고도 남음이 있는 듯하다. 해안 선사는 공부를 마치자 나는 이제 대 자유인이이며 천 길 낭떠러지도 영원할 것 같은 은산철벽도 모두 한 낱 눈송이처럼 사라져 버렸다고 외쳤다고 한다.
‘약인문아희소식 회승당리만발공: 만약 나에게 기쁜 소식을 묻는다면 회승당 안에 만발공양이라 하리라.’
기쁜 소식은 바로 해안선사의 깨달음의 극치에 있다. 그것이야 말로 수행의 본분이며 삶의 향방(向方)이지 않겠는가. 오도란 바로 삶에 대한 일체의 집착을 놓고 ‘심즉불(心卽佛) 즉 마음이 곧 부처’의 경지에 들어서는 일이며 기쁜 마음으로 공양간에 앉아 공양을 드는 일이다. 참으로 깨달음이란 멀고 가까운 데 있지 않고 잠자고 밥 먹는 일에 있음을 말해 주는 주련이다. ■ 조계종 원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