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치판도가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다. 변화의 바람은 한국에서 먼저 왔다. 2007년 말 대선에서 한국 유권자들은 10년간 평등주의와 햇볕정책에 매달리며 국가경영에 실패한 정권을 심판하고 경제 살리기와 실용주의를 내세운 정치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바로 다음 해 미국에서는 변화와 희망을 내세운 민주당이 세계금융위기와 이라크전쟁에 책임이 있는 공화당 정권을 누르고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 정부를 탄생시켰다. 이번 8월 30일 실시된 일본 총선에서 민주당도 ‘새로운 일본’, ‘이번에는 정권교체’라는 변화의 선거 전략으로 민심을 움직여 50년 이상 집권한 자민당을 압도적 차이로 누르고 승리하였다. 유권자들은 자민당의 국가경영 철학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민주당의 하토야마 대표가 공약한 변화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과도한 중앙집권화 과정을 역전시키고 많은 권력과 자금을 지방으로 이전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둘째, 자민당 지배체제의 특징인 관료와 정치지도자와의 고리를 끊고 정치인은 정책형성에, 관료는 그러한 정책을 이행하는데 책임을 지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셋째, 도시보다 농촌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기업과 이익집단보다 주민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넷째, 하토야마는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화의 종언을 언급하면서 일본의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조하고 ‘동아시아 공동체’의 건설을 제안하였다.
지난 1993년 어렵게 이룩했던 첫 비(非)자민당 정권이 정권 내 투쟁과 이탈로 11개월 만에 붕괴했던 교훈이 있기 때문에 새 정권이 유권자가 불안을 느낄만한 과격한 변화를 추구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일본정치도 이제 변화를 시작한 것은 확실하다고 본다. 다케시 사사키 도쿄 대학 전임 총장이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본인들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부터 일본의 낡은 자민당 일당체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왔고 20년이 걸려 마침내 그것을 해낸 것이다. 전통적으로 일본 유권자들은 정치에 무관심했지만 일본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의 지위를 중국에게 넘겨주고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든데 대하여 자민당에게 책임을 돌렸던 것이다. 이번 총선은 20년 만에 최고에 이르는 70%에 달하는 투표율을 보였다.
일본의 정권교체는 유권자들이 큼직한 정치적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유권자들은 정치인이 만들어낸 이념적 기준이나 변화가 가져올 위험 같은데 영향 받지 않고 스스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
이는 세계관의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 플라톤 이래 이성과 감성, 국가와 개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의 이분법으로 사물을 분리하여 인식하던 세계관은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언과 탈근대 사회의 도래로 붕괴하고 있다. 20세기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거치면서 서구의 정치철학은 이제 세상 만물은 상호의존하고 있으며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는 없다는 불교의 세계관으로 점점 더 수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 위에 군림하는 존재를 믿지 않게 되었다. 세계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생각 그 자체임을 알게 되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시작했다. 유권자들은 이념적 잣대나 현란한 말솜씨가 아니라 누가 진정으로 더 국민을 안심시키고 골고루 잘 살게 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총선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세계의 정치지형이 변화했음을 확인해 주었다. 우리나라의 여·야 정당은 이번 일본 총선이 보여준 시대적 추세를 제대로 읽어야 할 것이다.
정천구
영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