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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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주인공에 맡겨놓고 늠름하고 당당하게 사세요
여러분은 남의 흉 볼 사이가 없습니다
남을 원망할 사이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내 갈 길도 바쁜데…

안되면 조상 탓?
운? 우리가 속된 말로 흔히 잘되면 내 탓 안되면 조상 탓을 하게 되는데 사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조상님들과 전혀 무관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천도재도 지내고 그러는 거 아닌지요?
답? 내가 지금 물 한 그릇을 먹는 데도 우주 천체가 먹고도 이 물 한 그릇이 되남는 도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들을 다 먹이고도 또 남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부모가 돌아가셨다 한다면 촛불을 켜 놓고 향을 피워 놓고 위패를 써 놓고 그러고서 모시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보다도 내 마음의 향을 피우고 내 마음의 촛불을 켜 놓고서 가만히 그 은공을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인등이거든요. 그 은혜를 갚는 마음, 모든 걸 주인공에다 맡겨 놓고 관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이 세상을 다 줘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위로는 묵은 빚을 갚는 일이죠. 또 아래로 햇빛을 주려면 그런 능력을 길러야만 되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모두가 다 그렇죠. 그래서 우리 먹는 밥 한 그릇을 놓고도 천도를 할 수 있는 그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위로는 모시고 아래로는 이 육신 안에 들어 있는 생명들을 제도하면서, 바깥으로는 부모를 모시고 그렇게 가지만 육의 부모나 법의 부모나, 부처님 조상이나 육의 조상이나 둘이 아닌 겁니다. 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나 부처님이 중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둘로 보지 마세요, 그것도. 왜 구차하게 삽니까? 왜 그렇게 자기가 얼기설기 해 놓고 자기가 고달프게 삽니까? ‘주인공’이라고 하면 그 안에 부처도 중생도, 또는 육의 부모의 조상도 다 같이 응하고 계신데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항상 생각합니다. 내가 맛있는 걸 먹으면 우리 육의 부모, 그 전의 부모도 부처님도 다 거기서 받으시고 또는 내가 맛없는 걸 먹으면 맛없는 것대로 또 같이 먹고. 그러면 이 뱃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도 다 같이 먹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다 그러시죠? 여러분은 보고 응감만 했지, 이 속에 있는 중생들이 다 달라고 해서 이 입만 빌려 주곤 넣는 거예요. 넣을 때 여러분은 맛만 보고 진짜 먹는 건 이 속에서 다 먹거든요. 여러분은 씹어 가지고 넘어갈 때 맛만 보는 겁니다. 그러고는 그 속에 들어가면 다 제가끔들 섭취를 합니다. 먹으면서 작업을 하면서. 작업을 안 해 주면 자기가 자꾸 먹을 수가 없거든요. 작은 고기도 큰 고기의 지느러미를 다 청소해 주고 거기서 얻어먹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주고받고, 주고받고 이렇게 먹고살거든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수화풍도 얼마나 고마운가. 지수화풍이 계합이 되지 않았으면 생명이 나질 않았어요. 그런데다가 공기가 조금만 없어도 우리는 숨을 쉬지 못하고 죽어요. 그런데 고맙다고 한 번이나 해 봤습니까? 또 물이 없어도 우리는 죽겠지요. 그러면서도 물이 고마운 줄 모르죠. 물이 있을 때는 펑펑 씁니다, 그냥. 아까운 줄 모르고 말입니다. 그래서 물도 절약을, 아주 광신적으로 절약을 하라는 게 아니라 정도껏 분수껏 쓰라는 거죠. 불도 그렇고 물도 그렇고. 이 물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는 흙을 딛고 흙에서 나는 걸 먹고 흙에서 자랐어요. 그러니 모든 것이 우리는 지금 고마운 거죠.
그리고 자기 몸뚱이 자체가 바탕이 된다면 그 바탕 속에 자기 근본이 있기 때문에 또 고마운 거죠. 자기가 자기 고마운 줄 안다면 우주 법계가 다 고맙다는 그 뜻이 전체 한마음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니 모두 한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데서 보이는 데로 나오게끔 돌봐주는데 어찌 안되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데서부터 보이는 데로 나오는 거거든요. 그게 심성과학이에요. 천체물리학이라고 해도 되고요.
그러니까 이 몸뚱이 가진 것이 여러분이 아니라 그 몸뚱이 속의 영원한 자기의 근본이 자기예요. 그 참자기가, 즉 말하자면 소라껍데기를 해 놓고 그 알맹이가 소라 속에 들어가서 소라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그 집이 나쁘면 또 갈아서 들어가요. 그럼 껍데기 속에 껍데기가 있고 껍데기 속에 또 껍데기가 있거든요. 그렇듯이 우리는 지금 껍데기를 끌고 다니는 겁니다. 잘 끌고 다니죠. 어디가 바숴지면 안 되니깐요. 부딪쳐서 바숴지면 안 되고 고장이 나고 집이 망가지면 내가 집에 들어 있을 수가 없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뜻으로 본다면, 돌아가신 분들 천도를 시킬 때에도 그렇고 제사 지낼 때도 위패를 해 놓고 하죠. 거기 안주하라고 하는 거거든요. 안주할 데가 없으면 지접을 못하니까. 꽃이라도 갖다 놓고 거기 안주하라고 하죠. 그래서 산소에 가거나 이래도 꽃을 한 송이 이렇게 가져가죠. 잠시라도, 우리가 서로 보이지 않더라도 그 마음만은 같이 상봉하자고 말입니다. 그러나 혼백은 거기만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만 계신 게 아니고 그건 체가 없기 때문에 어디고 상봉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 몸뚱이가 있기 때문에 법의 부모든 육의 부모든 다 주인공에다 넣고 그냥 나를 집으로 삼아서 거기서 살게 해 드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부모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체가 없는 거니까 그 혼백을 내 속에다가, 다 주인공 안에다 넣어 놓으면 아, 그냥 내가 되는 거죠, 그냥. 내가 집이 돼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왜 바깥으로 끄달리고 잘되게 해 달라고 빌고, 잘되게 해 주기는 뭘 잘되게 해 줍니까. 자기가 거기다 넣고 그렇게 주인공에 하나로 다 모아서 ‘다 그냥 일체다’ 할 때 그 혼백도 다 자기 마음 쓰는 대로 배우는 거예요, 물리가 터지고. 아, 그래야 만 중생을 다 제도할 수 있는 보살로 화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게 있는 것을 모르고 이사를 가도 항상 ‘아이구, 이거 어느 날 이사 가야 좋을까? 올해는 또 삼재가 안 들었을까? 우리 아빠가 언짢으면 어떡하지. 우리 자식이 언짢으면 어떡하지. 가게를 하는데 영 안돼. 그럼 뭐가 잘못되지나 않았나. 조상이 어떻게 잘못되지나 않았나.’ 그런단 말입니다. 조상은 왜 들먹입니까, 글쎄? 아니 자식들을 길러서 그렇게 해 준 것도 고마운데 조상 탓을 왜 생각을 합니까?
물론 죽으면 냉정하고 죽으면 사정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하곤 정 반대죠. 언제 적의 부모고 언제 적의 자식입니까? 자식 부모라는 걸 아예 상실하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해를 입힐 수도 있는 거죠. 인연에 따라서 해를 입히는 걸 바로 과(果)라고 그럽니다. 인연에 따라서 오는 과. 그러니까 모든 걸 주인공에다 맡겨 놓고 여러분이 늠름하고 당당하게 사신다면 앞으로 부모도 자식도, 또는 형제도 잘 이렇게 이끌어 갈 수 있고 걱정할 것도 하나 없습니다. 그런데 괜히들 걱정인 거예요. 괜히들 발버둥일 친단 말입니다, 모두. 그러니까 집안에 어떠한 어려운 일이 생겼다, 급하다 이렇게 얘기를 들었으면 금방 이 주인공에 맡겨 놓으면 여기에서 거기에 알맞게 용도에 맞게 나와 줍니다. 몸이 아파서 뭐 어떻게 됐다 그러면 금방 자기 속에서 약사가 그리로 그냥 통신을 하게 됩니다. 빛보다 더 빠른 광력이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거기 몸에 찰나에 들어가서 찰나에 해결하고 찰나에 나죠. 이러한 도리가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모릅니다. 그러니 조상 탓 하지 마시고 열심히 이 마음공부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좀더 긍정적으로 밝게 살고 싶어요
운? 안녕하세요. 저는 인터넷을 통하여 우연히 스님 말씀을 접하게 되면서 마음공부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 청년입니다. 근데 저는 언제나 마음이 부정적인 편이어서 늘 나만 생각하고 나에게 안 맞는 상대에 대해서는 흉도 많이 보고 원망도 많이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스님의 가르침을 받들어서 남에게도 좀더 베풀면서, 그리고 좀더 긍정적으로 밝게 살고 싶습니다.
답? 옛날 어느 스님이 어느 가난한 집에서 보리쌀 뜨물로 쑨 미음 한 그릇 공양을 받고는 너무 고마워서 나무를 한 짐 해다 주려다가 은사 스님께 지게 작대기로 호되게 맞았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러면서 은사 스님이 한생각의 무주상 보시가 있는데 그것도 보시라고 하느냐며 불호령을 하셨단 말입니다. 그 스님이 그 소릴 듣고 ‘아이구! 알았다.’ 하고서 나무를 동댕이치고선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은사 스님께 삼 배를 올리면서 “감사합니다.” 했거든요. 뭐가 감사하냐 하니깐 그냥 가만히 합장을 하고 싱긋이 웃고 앉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은사 스님께서 ‘아하! 그러면 부처님의 골수를 얻어서 너는 오늘 그 집의 물 한 그릇의 그 이치를 알았구나.’ 하고선 비켜나셨대요. 그 후에 그 집은 그 해에 마름을 받고 자연히 보리쌀 뜨물을 안 먹게 되고 쌀밥을 먹게 되더랍니다. 그러니 그 동네 일판에서 둘째가라면 섧게 먹고살기가 넉넉하게 됐더랍니다. 그래서 해마다 부처님 공양을 잘하고 그 집의 자손들이 불가에 인연을 맺고 그래서 크게 부처님의 뜻을 이루었다는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공부를 잘하면 길을 지나가다가도 그대로 말없이 건질 수 있고 길을 가다 오다가도 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렇듯이 여러분은 남의 흉 볼 사이가 없습니다. 남을 원망할 사이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내 길 가기도 바쁜데. 지금 얼마나 남았습니까? 가을이 돌아 닥치면 어떡합니까? 그러니 내 마음에 봄이 오도록 하셔야죠.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아주 용하다고 하는 스님이 계셨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마적 도둑이 많았죠. 그런 산도둑들이 떼로 몰려 얘기를 했습니다. “저 스님이 그렇게 유명하다니 내가 한번 만나 보리라.” 그래서 칼을 들고서 그 스님이 오시는 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이 오시니깐 자기 속의 말로 하는 소리입니다. ‘저렇게 용하다는 스님이 내가 여기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도 모르고 그냥 저렇게 오는구나.’ 하고 아주 호탕한 웃음을 웃었죠. 그런데 그 스님이 오시니까, 그 도둑은 거기서 얘기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유명해 봤던들, 당신 가슴에 철판을 깐 것도 아닌데 칼이 안 들어가겠느냐? 당신이 아무리 유명하다 할지라도 이 칼은 사정없이 당신의 가슴을 찌를 수 있고, 당신의 가슴을 찔러서 뭐가 그렇게 유명한 게 있나 하고 한번 갈라 보고 싶다.” 이랬거든요.
그러니깐 그 스님이 껄껄 웃으면서 하는 말이에요. “추운 겨울에 고목을 자른들 꽃이 나오겠나? 스스로 봄이 오면 스스로 이 고목에서도 꽃이 피고 스스로 열매가 열릴 것을…. 그러니 그 뜻을 알게.” 그러니까 그 도둑이 가만히 생각을 한 것입니다. 수십 년을 마적으로 살면서 그래도 경험도 있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그만 그 소릴 듣고 칼을 뚝 떨어뜨리고 거기서 그냥 삼 배를 올리고, 자기와 함께 부하 도둑들도 다 그 스님의 제자가 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좀더 이 마음의 도리를 알아서, 이 마음 도리 속에서는 봄은 항상 봄이지 사계절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내 마음의 봄.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속에 봄이 와서 물이 흐르고 그 물맛이 좋고 열매가 열려서 수많은 맛을 낼 수 있는 그런 열매를 무르익히신다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니 그 만 가지 열매의 만 가지 맛을 낼 수 있는 그런 여러분의 마음 가짐가짐을 가지고 봄의 마음으로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인공과 관계가 있는 건지요?
운? 현대과학에서도 한 물체를 쪼개 본다면 분자, 원자에서 소립자, 미립자까지 증명이 되고 결국 그 근본은 어떤 것도 고정됨이 없는 공이라고 합니다. 결국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뜻과 가까워진다고 볼 수 있는데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주인공도 그런 맥락인지요?
답? 예, 당연한 말이지요. 지금 물리학이나 이런 분야에서 과학적으로 증명 되고 있는 그런 것이 우리 살림하는 데도 나타나고 있죠. 우리의 몸은 근본적으로 지·수·화·풍으로 일체가 다 뭉쳐져 있습니다. 지수화풍이 아니라면 그런 소립자, 미립자까지 있을 리가 없죠.
나는 현대 용어는 잘 모르지만 핵이 있으면 전자가 있고 전자가 있으면 전자가 바로 핵이 되고, 핵을 보호하고 있고 이런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거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한마디로 말해서 현미경으로 본다 하더라도 어떤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심안의 눈이라는 것은 아무리 멀다 하더라도, 수천 수만억 광년이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바로 자기 곁을 보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이것이 둘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이 초월이 돼서 둘이 아니게 보는 거죠.
그러면 그것을 가서 보느냐? 그게 아니죠. 자기의 그 명경과 같은 밝은 마음으로 본다면 앉아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천체를 볼 수 있고, 어떤 부분적인 것도 볼 수가 있는, 그러한 것을 불가에선 천안통이라고 하는데 천체망원경이라고 비유를 할 수 있죠. 그러니까 심성이 아니고는 절대로 그것은 다 볼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무위심, 즉 말하자면 무심과 유심이 같이 혼합이 돼서 행을 할 수 있는 그 봉을 본다면 과학자들도, 천문학자들도 이름 없는 진짜 천문학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봅니다. 이름만 천문학이 돼서 되는 게 아니라, 정말이지 천 가지의 그 뜻이 다, 내가 보는 눈이 그대로 문이 돼서 벽도 없고 걸림 없이 내가 볼 수 있다면 연구를 하면서도 자기가 자재할 수 있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볼 수 있다고 해도 도가 아니니라 그랬거든요. 본다고만 해서야 무슨 이익이 있어야지요. 또 듣는다고만 해도 이익이 없고, 남의 속을 안다 해도 이익이 없고, 또 남이 어디서 어떻게 왔다는 걸 안다고 해도 이익이 없단 말입니다.
그게 왜 이익이 없느냐? 무꾸리쟁이에게 무꾸리를 하러 갔는데 ‘새 달에는 너는 죽을 운수다.’ 이걸 안다고 합시다. 쪽집게처럼 안다고 합시다. 그러면 죽을 운수만 알았지, 남의 속만 알았지 그 죽을 거를 이렇게 갖다 놓고 자유스럽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자력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는 얘기죠.
그러나 보고 듣고 아는 그 오신통과 더불어 누진을 통한다면 그냥 자유자재죠. 여기 지역이 좋다 저기가 좋다 이러한 문제도 자유스럽죠. 그러나 이것이라고 해서 좋은 것만도 아니고 언짢은 것만도 아니니 그것은 무엇이겠느냐 하는 그런 문제도 있는 거죠. 그러면 그건 내가 정하는 대로 그냥 법이에요. 힘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하면 오히려 남의 흉내만 되지만, 이 마음의 도리를 길러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그게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의 말을 흉내나 낸다면 자기 몸이 해쳐지고 자기가 흉내 내는 그 말이 자기한테 그냥 관념이 돼서 자기가 좋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모순된 일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앞으로가 창창한 젊은이니까 그러한 것을 다 담고 있는 내 주인공의 도리를 진짜로 믿고 실천하신다면 내게도 남에게도 다 좋은 그런 삶을 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연은 없다고 하는데…
운?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좋은 일이건 나쁜일이건 모두 우연은 없다고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럼 모든 게 필연적이고 숙명적인 것인지요?
답? 그것을 그렇게 말씀드리자면 말이 조금 길어지는데요, 내가 수차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나기 이전에 살았던 어떠한 일, 악업이든지 선업이든지 자기가 짓고 산 그 차원대로가, 즉 말하자면 엄마 아빠의 정자와 난자 속에, 수십억 마리가 있는 거기에 들어갑니다, 이게. 들어가서 몸 하나를 받고 나옵니다. 아버지의 뼈, 어머니의 살을 받아서 몸 하나를 딱 받고 나면 그 수십억 마리가 모였다가 다 흩어집니다.
다 흩어지고 그 한 몸 받은 데 가서 자기가 태어나기 이전에 지었던 악업이나 선업, 즉 의식 자체, 업식이 거기에 포함이 됩니다. 그게 포함이 돼서 이 세상에 등장하면 여러분은 내가 과거에 인연에 따라 업을 지은 것 중에 좋게 한 것은 좋게, 언짢게 한 것은 언짢게 받을 것입니다. 모르고 저지른 것은 모르고 받게 마련이고 알고 지은 것은 알고 받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것이 여러분 속에 지금 그냥 수십억 마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식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떤 때는 기쁘게도 해 주고 어떤 때는 잘되게 해 주다가도, 어떤 때는 그 잘된 것이 망하게도 해 주고 어떤 때는 속상하게 해 주고, 어떤 때는 병들게 해 주고 어떤 때는 남편과 이혼하게 해 주고, 여러 가지로 고정됨이 없이 그냥 돌아갑니다. 그것을 ‘고(苦)’덩어리라고 이름할 수 있죠. 그런데 내가 말하는 것은, 과거도 현재에 짊어지고 나왔으니 짊어지고 나온 그곳에서 지금 나오는 그곳에다가 되놔라 이겁니다.
카세트 얘기를 자주 합니다만, 카세트에 녹음되어져 있던 말이 내가 지금 또 집어넣으면 앞에 넣었던 말은 없어지는 것이나 같습니다. 연방 넣으면 없어지고 넣으면 없어지고 그러면 과거에 어떠한 인과로 인해서 업을 가졌어도, 지옥고를 당해도, 악업을 지었어도 다 녹아들고 무너진다 이 소립니다. 이열치열이란 말도 있듯이 그렇게 나온 자리에다 되놓는다면 카세트에 녹음하는 것처럼 없어진다는 애깁니다.
그러니 거기다 모든 거를 맡겨 놓으시라는 말입니다. 무슨 업이 있다, 나는 죄가 많다, 하는 수많은 이름들의 업, 팔자 운명 이런 말도 붙이지 마시고, 내가 죄가 얼마나 많기에 이런가 하는 생각도 마시고, 그런 생각이 나거든 그냥 자기 주인공에 다시 맡겨 놓으세요. ‘모든 게 당신 속에서 나온 거니까 당신이 알아서 할 수밖에 없지.’ 하고 놓고 또 좋게 되는 일이면 ‘아, 감사하구나.’ 하고 또 놓고 그렇게 하라는데 뭐가 어려워요, 그게? 업이라든가 이런 거는 모든 게 과거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이건 어떠한 물질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꾸 물질로서 다가오는 거죠.
그러니까 내 몸에, 내 가정에 다가오는 모든 걸 녹이면 됩니다. 그것이 일차적으로 내 마음을, 내 참나를 발견하는 데도 이익이고 내 자식들을 이끄는 데도 이익이고 부부지간에도 이익이고, 모든 게 아들이다 딸이다 부부다 부모 형제다 하는 데 가설이 다 되어 있거든요, 본래. 그러니 나 하나의 자가발전소에서 불 하나를 켜면, 자가발전소에서 스위치만 누르면 다 불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듯이 다 녹아진다는 얘깁니다. 아무리 필연이라 해도 내 한생각으로 다 조절할 수 있다는 얘기죠.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 이것이 생활 불교며 생활 참선이며, 바로 이것이 좌선도 되고 참선도 되는 거죠. 마음이 편안하면 그것이 좌선이거든요. 그러니까 내 마음으로 그 창살 없는 감옥에다 내 몸을 옴쳐 놓고 꼼짝 못하게 하는 좁은 마음을 갖지 말고 그런 걸 탁 털어 버리세요. 마음은 저 벽도 없고 지붕도 없고 우주도 갈 수 있고, 내가 지금 여기에 앉아 있어도 내 집에 갈 수 있다는 걸 생각하시면서, 앞으로 내 가정과 내 몸과 내 자식들을 튼튼하게 하고 부모님께 은혜를 갚기 위해서도 여러 가지로, 남을 원망하지 말고 증오하지 말고, 욕심내지 말고 나라는 아집을 내세우지 말고, 모든 것은 내 탓으로 돌리면서 모든 걸 주인공에다 놓는다면, 그리고 부지런히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그러한 발전적인 여러분이 된다면 아마 여러분이 자유인이 되실 겁니다. 자유인이라는 것은 삶의 보람을 느끼면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그러한 여여함입니다. 아시겠습니까?
2009-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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