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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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잘 하려면 수행 잘 하라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누구나 아는 〈법구경〉의 말씀이다. 이 말씀이 법의 구절로 많은 이에게 회자되는 것을 보면 누구도 사랑과 미움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러면 불교는 사랑을 부정하는가. 그렇다면 중생의 실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 된다. 모든 생명은 사랑을 근본으로 한다. 사랑으로 태어났으며 사랑으로 성장하고 사랑 속에 죽어가는 게 인생의 일반적 모습이다. 불교에서 경계하는 사랑은 어리석은 중생의 거짓된 사랑이다. 사생결단의 열정적인 사랑, 맹목적인 사랑은 치명적인 독성을 갖기 마련이다. 그 속에 자신도 모르는 욕망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한자로 표기하면 두 가지로 표기할 수 있다. ‘애(愛)’자와 ‘자(慈)’자이다. 둘 다 사랑이란 의미이다. 흔히 ‘애욕’과 ‘자비’로 쓰이듯이 불교에서 애(愛)는 부정적으로 자(慈)는 긍정적으로 사용된다. 애욕은 자기 중심적 중생의 사랑이요, 자비는 불보살의 평등한 사랑이다. 늘 상대의 자리에 서서 그를 배려하고, 끝없이 베푸는 사랑이 자비이다. 결국 상대를 최고의 자유인 해탈의 경지까지 인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인 것이다. 중생연(衆生緣) 자비로 시작된 보살의 사랑은 수행의 정도에 따라 법연(法緣) 자비와 무연(無緣) 자비로 그 깊이를 더해간다.
중생의 사랑은 그 가운데 자기중심적 욕망이 있기에 위험하다. 상대를 사랑한다 하지만 결국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기도 모르게 욕망 충족의 교묘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간 주부가 시신으로 발견됐다. 자살한 인기 연예인의 유골이 도난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자고 일어나면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은 우리같이 평범한 서민들에게 일상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대부분의 사건들은 그 배후에 거의 사랑이니 배신이니 하는 단어가 등장한다.
고귀한 생명을 앗아가고 한 가정을 엄청난 불행으로 만들어도 그 이유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중생은 욕망의 존재이기에 세간적 사랑도 필요하겠다. 그러나 끊임없이 출세간적 사랑[자비]으로의 지향 속에서 세간적 사랑이 갖고 있는 독성을 억제시켜나가야 한다. 왜곡된 사랑의 표출이 많은 사회일수록 종교가 건강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지 못한 것이다. 종교를 통해 사랑을 포함한 세속적 욕망을 절제하고 승화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숙한 종교와 덜 된 종교인들이 오히려 사회 갈등을 촉발하고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모습을 흔히 본다. 출세간의 자비와 출출세간의 사랑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원효의 행적을 보자. 중생으로서의 욕망도 버리고 다시 수행자로서의 위선적 탈도 벗어버려 그 어디에도 구애 받음이 없는 무애자재의 삶과 사랑을 실현하고 있다. 수행과 깨달음 속에 피어나는 꽃을 보듯 아름답지 않은가. 이렇듯 사랑도 깨달음을 통해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랑의 완성을 위해 종교적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모두가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이라는 자각, 이게 지혜로운 마음이다.
여기에서 자비심이 넘쳐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비심으로 충만한 사람은 신념을 갖고 원력의 삶을 산다. 모기 한 마리를 죽이면서도 이 녀석을 꼭 죽여야 하나 고민 하고, 길에 떨어진 100원짜리 동전 하나라도 잃어버린 사람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착한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겠다. 그러기위해 조건을 달지 말고 수행하자.

고 우 익
금강승가대 교수
2009-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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