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심서원 제대로 하면 삶 자체가 수행
서원은 인간적인 것… 보살심 지속하면 돼
내가 만난 그들을 위해 사는 것이 정법의 삶
강 사 : 도법 스님(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
일 시 : 2009년 7월 23일
주 제 : ‘여성, 승만경을 말하다’
장 소 : 양재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교육장
주 최 :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연일 지속되는 장마와 함께 푹푹 찌는 더위가 이어지면 자연스레 짜증이 밀려오기 마련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 시작된 더위가 중생에게는 원망스러운 존재가 된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5월 28일부터 11월 26일까지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 도법 스님과 함께 하는 ‘여성, 승만경을 말하다’ 강연을 진행 중이다. 7월 23일 세 번째 강연이 열린 날. 도법 스님은 “연기법 사상으로 너와 내가 함께 완성 되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짜증만 나는 무더운 여름, 피어난 꽃들을 보며 내가 너에게 어떻게 자비를 베풀며 함께해야 할지 알아보자.
# 삶은 호흡지간에 있다
우리가 <승만경>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불교가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해 알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지배한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살았습니다. 이런 남녀 불평등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가 비인간적으로 살게끔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여성이 주인공인 <승만경>을 선택한 이유는 ‘여성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여성의 진면목이 무엇인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공부하기 위해서입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우리가 평소 숨 쉬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듯, 인생은 그냥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단순함의 반복 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숨을 들이쉬고 내쉬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실상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느냐 없느냐가 결국 부처와 중생의 차이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스스로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깨달음을 얻기 위해 티베트, 인도 등으로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현재에 처한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밖을 향해 추구하는 모든 것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존재 자체가 대단한 것이니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서원은 삶의 문제의식
승만은 부처님 앞에서 세 가지 큰 서원(三大願)을 내어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1. 이 진실한 서원으로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無邊) 중생들을 편안하게 하려 하오니 이 선근으로 일체의 생에 정법의 지혜가 얻어지기를 바랍니다.
2. 제가 정법의 지혜를 얻으면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중생을 위해 연설하겠습니다.
3. 제가 정법을 섭수하고서는 몸과 목숨과 재산 등을 버리고서라도 정법을 지키겠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은 인생을 참되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런 삶의 문제의식을 서원이라고 말합니다. 서원을 제대로 세우면 수행은 저절로 되게 돼 있습니다. 초기 불교의 경우를 보면 내가 수행을 해서 고통으로부터 해탈한 후 중생을 구제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대승불교의 경우는 상호의존의 법칙을 말합니다. 상호의존의 법칙이란 결국 연기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호의존적 법칙인 연기법은 너와 내가 함께 완성돼 진다고 말합니다. 존재법칙인 연기법의 사상에 맞는 자비 행을 실천하면 너와 내가 완성돼 함께 간다는 말이죠. 즉, 발심서원을 제대로 하면 삶 자체가 수행인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연기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 갑시다. 연기법은 모든 것을 자비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를 무주상(無住相)의 마음과 태도로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왼손과 오른손이 있습니다. 이 둘은 분리돼 있지만 결국엔 한 몸입니다. 만약에 오른손이 불구이면 왼손도 불완전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은 결국 이 둘이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바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부답다’ ‘보살답다’ 라는 말을 씁니다. <승만경>에서 보면 발심서원을 분명하게 성립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 장부라고 말합니다. 법의 정신에 근거한 발심서원을 해서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장부라고 하는 것이죠. 남성인지, 여성인지, 출가자인지, 재가자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단순한 모양을 갖고 시시비비 하는 것은 단지 ‘상(相)’ 놀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럼 정법이란 무엇일까요. 부처님이 깨달은 법을 연기법이라 말하는데 이에 대한 올바른 파악과 이해, 그리고 그 정신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정법입니다. 연기법은 본래부터 있는 보편적 법칙을 말합니다. 즉, 저절로 생겨난 법. 영원히 있는 법을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정법이며, 그게 연기법인 것입니다. 정법을 제대로 아는 것만이 자비로 사는 길입니다. 삼대원은 바로 정법의 자비, 정법의 지혜, 정법의 수호를 뜻합니다.
<금강경>에서는 자비를 완성시키기 위해 지혜를 가르칩니다. 하지만 한국불교는 자비가 아닌 지혜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의 서원중에서 ‘무변(無邊)’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무변은 구체적이지 않은 수를 뜻합니다. 무변 중생은 우리가 현실 속에서 순간순간 만나는 ‘그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매순간 만나는 ‘그대’를 내가 자비심으로 대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결국 너와 내가 함께 완성되는 자타일시(自他一時成佛)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매 순간 죽을 힘을 다해 ‘그대’라는 존재를 위하며 살면, 정법이 이뤄진다는 것이죠. 경전은 우리 현실에서 펄펄 살아 숨 쉬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참선, 위빠사나 등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다 자비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죽을 힘을 다해 용맹정진하는 것이 자비롭게 사는 길입니다.
한국불자의 70%이상은 여성 불자들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용맹정진해 서원을 하며 살면 한국불교는 저절로 발전하게 됩니다.
서원의 삶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줬던 인물을 꼽자면 바로 기독교의 예수를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죽기 전,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내 뜻대로가 아닌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것은 내 뜻대로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다른 이에 대한 자비로 법의 정신을 갖고 내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법의 정신이 대자대비로 죽을 힘을 다해 용맹정진 하는 것이 정법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정법섭수는 복된 삶을 추구하는 것
부처님은 “정법을 섭수하는 것은 큰 공덕이 있고, 큰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법서원은 발심서원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발심서원은 대비원력을 말합니다. 즉, 내 뜻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를 <금강경>에서는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부릅니다. 정법서원은 응병용약(應病用藥) 입니다. 팔만사천법문이 생겨난 것은 팔만사천 번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문은 부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국불교는 높은 경지에 올라야만 법문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당연히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돼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속에서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법을 갖고 내가 가진 모든 걸 하면서 살면 됩니다. 내가 만난 그들을 위해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정법이 누군가에 의해 변질돼도 온몸을 던져서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원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것입니다. 보살의 마음을 일으켜 끈질기게 지속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프고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연스레 연민이 생겨납니다. 부처님은 12세 무렵 농경지에 갔다가 농부가 밭을 갈 때 죽는 벌레를 보면서 약육강식의 세계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런 주체할 수 없는 연민심, 발보리심이 대비 원력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선지식을 멀리해 진리가 아닌 것(非法)을 들음이 없는 중생들에게는 인간과 천인의 선근으로 성숙시키고, 성문(聲聞)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성문승을 가르쳐 주고, 연각(緣覺)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연각승을 가르쳐 주고, 대승(大乘)을 구하는 자에게는 대승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법을 섭수하는 선남자 선여인이 대지를 건립함에 있어 감당해야 하는 네 종류의 중요한 소임이라 합니다.
선지식은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불연을 맺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성문승은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서 수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연각승은 연기의 이치를 스스로 깨달은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대승은 함께 길을 걸어가는 벗을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복된 사람들입니다.
정법을 섭수해 공덕을 이루는 것은 곧 중생으로 살아가지만 더 복된 삶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리=이은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