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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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자리에 들어가면 어떤 것도 다 그냥 녹아버려요
생활에서의
그 무거운 짐과
모든 것을
몰락 놔버려라,
대공의 주처에

말과 색에 너무
치우치지 말고
모든 것을
나로만 생각하라,
각자

린 요만큼한 구멍으로 인해, 사람이 안 보이는 데서 조금조금 고였던 그 물로 인해서 큰 둑이 다 무너지게 돼 있어요. 그와 같은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조그맣다고 우습게 생각을 하지 마시고, 지금 아무렇게나 산다고 우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인간은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동물이자, 바로 99% 100%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돼지처럼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고요. 만물의 영장이 바로 인간이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이 도리를 아시려면 자기 주처의 주인공을 진짜로 믿고 맡겨 놓는 작업부터 열심히 해 보십시오.

인생을 잘 회향하고 싶습니다
운? 요즘 따라 제 주변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제는 죽음이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죽음이 닥쳐도 후회하지 않도록 어떻게 인생을 회향을 잘하고 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답? 이 사람 사는 도리가 다 그렇습니다마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만이 정수에 입력이 잘돼서 죽는 날에 회향을 잘할 수 있을까 하고 한 번쯤은 생각해 보게 될 겁니다. 이 회향이라는 것은 우리가 밥을 먹었는데 그 밥을 먹고 소화가 잘돼서 ‘어, 참 잘 먹었다. 아이 참, 잘 먹었다.’ 하는 거와 같은 겁니다. 음식을 먹고 체해 가지고 만약에 요동을 부린다면 그게 회향이 잘못된 거죠.
그리고 화목하게 끝났으면 회향이 잘된 거고 화목지 못하게 끝났으면 회향이 잘못된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런 거와 같이 일생 동안을 살아나온 결과가 그 회향인데 끝에 가서 “어이, 그 사람 그거 그러더니 잘 죽었어.” 이렇게 회향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아이 그 아까운 사람, 법 없어도 살 사람인데 죽었어.” 이렇게 회향을, 끝을 마쳐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생산처에 가더라도 “아, 당신은 참 위대해.” 하면서 차원 높게 아주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용도를 줘서 내보내죠.
그러면 여러분이 “당신은 그렇게 하고 삽니까?”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우리가 무의 정신세계를 모른다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정신세계와 물질세계, 즉 말하자면 당신의 육신과 정신, 이렇게 따지는 겁니다. 그러면 댁의 육신이 올바르게 살려면 정맥 동맥이 동시에 돌아가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정신계와 물질계가 동시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거는 뭐, 좀 살 만하면 파괴가 생기고, 이건 뭘 했다 하면 걸려 넘어가고 꿰여 넘어가고, 이렇게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죠. 그게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가 있어야 됩니다. 만약에 바퀴가 있어서 바퀴에 심봉이 딱 꿰져 있다면 그 심봉을 의지해서 바퀴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 심봉이 제대로 끼어 있지 않다면 바퀴가 이탈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런 예가 있었죠. 우리 스님네들을 가르치기 위해 어떤 때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내일 아침 공양거리가 없었습니다, 절에. 그런데 아주 가난한 사람이 쌀을 얻으러 왔다고 합시다. 그 조그만치 있는 거를 다 그 사람에게 주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일 아침 공양거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그 스님네들은 그것을 알거든요. 그러니까 내일 아침 공양거리가 없어도 그냥 싹싹 긁어서 다 퍼 준 겁니다. 왜 그렇게 다 퍼 줬을까요. 만약에 믿지 못했다면 내일 아침에 당장 공양거리가 없는데 어떻게 다 퍼 줍니까.
그릇을 비우면 반드시 또 그릇에 채워진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또 샘물은 퍼내면 샘물이 또 솟는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거를 모른다면 항아리에 갖다가 물을 그냥 모아 놓기만 하는 거죠. 그냥 퍼 쓰면 항아리가 비는데 말입니다. 비면 살 수가 없다고 야단법석들을 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 정신계를 공부 안 해서. 샘물이라는 건 정신계에서만이, 참나의 뿌리에서만이 그 샘물이 나오는 거지, 아무 데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침 쌀도 없지만 다 비워 놓고 그냥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9시에 취침종을 치니까 막 잠을 자려고 하는데 짐차 소리가 덜렁덜렁 나더니 누가 쌀 세 가마를 갖다가 그냥 털썩 갖다 놓고 가지 않습니까. 이게 거짓말인 줄 알지 마세요. 이 쌀뿐만 아니라 일체 살아가면서 내 그릇이 비고 내 마음이 비워졌다면 스스로 없으면 채워지고 없으면 채워지는 겁니다.
이거를 자랑 삼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한 찰나를 좀 아시라고 하는 겁니다. 이 정신계의 한 찰나라는 건 아주 무궁무진합니다. 누구에게나 다 각자 그 자가발전소라는 보배는 얼마든지 다 있으니까요. 그런데 자기네들이 발견 못하고 자기네들이 그렇게 쓰지 못하고 자기네들이 응용을 못하고, 진실되게 살지 못하니깐 그렇게 걱정하며 사는 거죠. 우리 인간이 이 중세계에서 뛰어넘지 못하는 것도 역시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 하나하나 쓰는 데 엄청난 문제가 붙습니다.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바로 자기 마음으로 지어서 창살 없는 감옥을 만들어 놓고, 자기가 그 안에서 발버둥이치고, 자기가 구덩일 파 놓고 자기가 그 구덩이 속에 들어가서 허덕이고, 나오려고 복통을 하고 방황하고, 자기 마음 한생각을 잘못 돌려서 감옥에 들어가서 그렇게 지금 자기 몸뚱이를 자기 마음이 그렇게 고생을 시키는 겁니다.
그럴 때 이 마음 도리를 전부 아실 수만 있다면, 그걸 증득한다면, 그 해맑은 자기 마음의 모습을 깨닫는다면 바로 그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생각 하나가 억겁을 돌아가면서 끄달리게 하느냐, 생각 하나 잘해서 억겁의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의 갈래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었더라면 저 은하계의 별들이 없을 것이고, 별들이 없을 것이라면 태양도 형성치 못할 것이고, 태양이 형성되지 못했다면 우리가 곡식을 익히지도 못할 텐데, 모든 걸 고맙게 이렇게 하고 있는 주인공이 누구냐? 바로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형성시켰습니다. 다 형성시켜 놓고 자기가 주인으로서 여기에 살 양으로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한 생 허탈히 보내지 마시고 살아 있을 때 후회 없이 정진해 보시기 바랍니다.

남편의 관심이 구속으로 여겨집니다
운? 저는 우연히 불교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스님 법문을 접하게 되면서 마음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결혼한 지 10년이 돼 갑니다. 근데 남편의 적극적인 관심이 연애할 때는 애정의 표현이라 여겨져서 행복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구속으로만 생각되어 갑갑하기만 합니다. 심각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도 애들이 있어서 살기는 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돌리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답? 그게 구속이 아니에요. 예전에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하도 배가 고파서 쓰러질 거 같고 그러니까 어느 집 근처로 가 가지고 문을 두들기면서 구원을 청했어요. 그랬는데 그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어떤 미친 새끼가 와서 이러느냐.” 그러면서 발길로 차고는 문을 탁 잠그고 들어갔단 말입니다. 그렇게 발길로 찼는데 나동그라지지 않겠어요? 생각을 해 보세요. 그랬을 때 그 나동그라진 사람이 그 사람을 얼마나 원망을 하겠습니까? 근데 그 사람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거예요. 자기가 여기 와서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이 나와서 나를 발길로 찰 일이 없질 않으냐 이거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쁜 게 아니죠. 바로 내가 원인이에요.
그렇다면 부부지간에 살아도 그렇고, 구속이 어떻게 해서 구속이 됩니까?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생각을 하고 태어났기 때문인데, 그 자기를 태어나게 한 장본인이 누굽니까. 지금 공부하는 게 그 장본인이 다 하는 거지요. 그 장본인의 탓이고, 그 장본인으로 인해서 내가 형성이 됐으니까 바로 나의 탓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남을 원망할 것도 없고, 남을 저주할 것도 없고, 왜 내가 발목이 잡혀서 이러나 하는 생각을 할 것도 없다 이겁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창살 없는 감옥이 생기는 거고, 내가 그런 생각을 안 하면 모든 게 허공과 같은데 말입니다. 이 우주 천하가, 이 생명체가 다, 일체 유생 무생이 다 한꺼번에 돌아가는데, 거기에 나도 껴서 같이 돌아가고 있는데 어째서 내가 구속이냐 이겁니다. 그건 자기가 생각으로 구속을 만들어 놓고 자기가 구속이 돼서 공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내 몸뚱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를 볼 때도 몸뚱이로만 보거든요. 색(色)으로만 본다 이 소립니다. 색으로만 보니까 항상 그렇게 편견을 가지고 살게 되죠. 그런데 모두가 나 아님이 하나도 없어요. 내 생명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아픔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자리 아님이 하나도 없고. 예를 들어서 물도 나요, 나의 생명이요, 흙도 나의 생명이요, 바람도 나의 생명이요, 공기도 나의 생명이요, 산소도 나의 생명이요, 모든 일체 유생 무생의 생명도 나의 생명이니, 어찌 나 아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를 생각해 본다면 일체 이 법도, 생각 내는 것도 그 하나의 근원지에서 나오는데 어찌 잘못됐다 잘했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에 너무 치우치지 말고, 색에 치우치지 말고 모든 것을 나로만 생각해라 이겁니다, 각자. 자기 주처를 똑바로 알고 주처에다 모든 거를, 그 무거운 짐과 모든 것을, 생활에서의 망상이나 모든 것을 다 몰락 놔 버려라. 그 대공에다, 대공의 주처에다 말입니다. 자기 주처죠, 그러니까. 자기 없이는 하나도 없는 겁니다. 자기가 원인이요, 자기가 화두요, 자기가 근본이기 때문에 그 근본은 둘이 될 수가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구속이라 생각지 마시고 공부 재료로 삼아 한도반으로서 잘 살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인과응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운? 저의 옆집에 사는 사람이 살림도 어려운데 행실도 좋지 않으니 그 사람만 보면 그게 인과응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공부해 보자고 권해도 듣는 척도 안 해요. 그 사람도 불교에 인연이 되면 좋겠습니다.
답? 우리는 생활에서의 모든 거를 항상, 세 가지를 일심으로서 해 나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행이 전체의 행이죠. 그렇기 때문에 죄가 있다고 생각을 하면 죄가 있는 것이고,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이고, 인과응보가 있다 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 하면 없는 것입니다. 그건 왜? 만약에 각각 둘로 보면 인과응보가 있는 거고 또 둘로 보지 않는다면 인과응보가 없는 것입니다.
또 아픔도 둘도 아니요, 슬픔도 둘도 아니요, 보람도 둘도 아니요, 삶도 둘도 아니요, 즐거움도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모든 게 둘이 아니에요. 그럴 때에 모든 게 없어요. 요것만 잘 해서 훌쩍 넘어설 수만 있다면 그대로 법이요, 의심낼 게 없는 겁니다. 의심내지 말고 그대로 해 나가는 것이 그대로 법이요, 그대로 활용이요, 그대로 참 부처님 법이니 어찌 그것이 ‘아니요, 기요’ 할 게 있느냐 이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떠한 나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이웃에 미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저 사람은 업보가 많아서 인과응보로 인해 저렇게 고생을 해.’ 이런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고 한생각으로써 ‘아, 그거 붙을 자리가 어디 있는고? 그 한 점에 그 붙을 자리가 어디 있는고? 찰나찰나 돌아가는 이 사이에.’ 그런다면 모든 것은 그 마음을 한생각을 내 주는 반면에 바로 에너지 같은 무전통신은 거기까지 도달해서 그 사람들도 다 그 길을 자연스럽게 밟게 되는 이치가 있으니 그렇게 마음으로 전달을 하십시오. 말로 전달을 하면 그게 한데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마음을 잘 쓰고, 남한테 이익을 주게 말을 하세요. 마음을 잘 씀으로써 말도 잘 나갈 것입니다.
2009-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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