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 창건 도림사, 아라한 석상들 길상암에 모셔
인간의 ‘삼계’ 우물 두레박처럼 돌고 도는 것과 같아
[원문]
삼계유여급정륜(三界猶如汲井輪)
백천만겁역미진(百千萬劫歷微塵)
차신불향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
-도림사 보광전
[번역]
삼계는 마치 우물의 두레박처럼 돌고
도는 것과 같이 백천만겁의 많은 세월을
지내도다.
이제 이 몸 금생에서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 것인가
[선해(禪解)]
‘당신은 오늘 어떤 마음으로 절에 오는가.’ 나는 가끔, 절에 오는 불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그러면 대개 불자들은 가족들의 건강과 복을 구하기 위해 온다고 한다. 그럴 때면 적잖이 실망할 때가 있다. 물론, 집안의 평안을 위해 절에 오는 것은 만류할 수 없다.
우리 불자들은 그저 절에 가서 부처님께 내 가족 잘 되게 해 달라고 향하나 사르고 절 한 번 하면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은 그런 곳이 아니다. 불교는 복을 구하기 위해 믿는 게 아니라 마음을 닦고 수행하는 종교다. 오늘날 불자들은 참 생명의 길을 열어 보이신 부처님의 고마움과 불법을 전하는 그 기쁨을 제대로 모른다는 느낌이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그런 기복(祈福) 신앙이 아니라 복을 지어 받는 작복(作福)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자들은 무조건 복을 구하기 위해 절을 찾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절들은 모두 기복 신앙의 원천인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심지어 기도와 독경을 열심히 하면서도 기실, 그것이 자신을 구제하고 제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가족의 평안을 위해서라고 대답을 한다. 물론,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그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참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절을 찾아서 기도하고 독경하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세상에서 나를 구제하고 제도할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어느 누구도 나를 구제하고 제도할 사람은 없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을 구제할 방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견성성불이며 또한 그 방법을 증득하고 깨달음을 구해주기 위해 하신 말씀이 팔만사천법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불교를 믿고 따르는 궁극적인 이유인 것이다. 하지만 이를 아무리 많이 듣는다 해도, 믿음을 가지고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금생에 성불할 좋은 기회를 만났다. 몸 받기 어려운 사람으로 태어났으며 불법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사람의 몸을 받고 불법을 만났어도 정진 수행하지 않는다면 내생에는 삼악도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심히 공부를 하여 나의 본래의 모습인 자성을 찾아야만 생사윤회에서 해탈을 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설사 금생에 이루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깨달을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정진해야만 한다.
또한 불교의 진리는 ‘인과의 이치’에 있다. 이를 깨달아 선하고 착하게 살아 복을 많이 지어 행복한 삶을 설계해야 한다. 우리 속담에 ‘흐르는 물은 그냥 두어도 흐르듯이 죄는 지은 대로 가고 공은 닦은 대로 간다’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불자들은 반드시 인과의 이치를 믿고 깨달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찰나찰나 일으키는 모든 생각들은 미래의 내 인생이 만들어지는 원인이 된다.
오늘 윤회전생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도림사 보광전의 주련 내용이 바로 성불이기 때문이다. 도림사는 전라도 곡성 동악산 청류동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수목이 울창하고 산세가 아름답고 계곡의 맑은 물이 속세의 먼지를 말끔히 씻어주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청량한 곳이다. 신라시대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876년(신라 헌강왕2) 도선 국사가 중창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당시 도인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하여 절 이름을 도림사라 했다고 한다. 이후 고려시대 때 지환대사가 삼창을 하였다.
원효대사가 이 산에 도림사를 창건할 때는 산이 움직이며 노래가 울려 퍼졌기 때문에 산 이름을 동악산(動樂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암릉과 암봉이 많은 이 산은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어서 불쑥 불쑥 솟아오른 봉우리들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둘러쳐져 있다. 원효대사는 성출봉(聖出峰) 아래에 길상암을 짓고 원효골에서 도를 닦다가 잠이 들었다. 그 때 꿈에서 부처님과 십육 아라한을 친견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원효대사는 즉시 성출봉에 올라가 보았더니 한 척 남짓한 아라한 석상들이 솟아났다는 것이다. 이후 열일곱 번이나 성출봉을 오르내리면서 아라한 석상들을 길상암에 모셔 놓았는데 육시(六時: 불교에서 하루 여섯으로 나눈 염불독경의 시간)만 되면 천상의 음악이 온 산에 울려 퍼졌다고 한다. 현재 도림사 응진전에 봉안된 아라한 상들은 당시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계유여급정륜 백천만겁역미진: 삼계는 마치 우물의 두레박처럼 돌고 도는 것과 같이 백천만겁의 많은 세월을 지내도다.’
삼계란 불교의 세계관에서 중생이 생사유전(生死流轉)한다는 3단계의 미망(迷妄)의 세계를 말하는데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세 가지이다. 욕계는 오관(五官)의 욕망이 존재하는 세계이며 색계는 욕계 위에 있는데 색계사선(色界四禪)이 행해지는 세계로, 여기에는 물질적인 것(色)은 있어도 감관의 욕망을 떠난 청정(淸淨)의 세계이다. 무색계는 물질적인 것도 없어진 순수한 정신만의 세계를 말한다. 즉 무념무상의 정(定: 三昧)으로서 사무색정(四無色定)을 닦은 자가 태어나는 곳이다. 하지만 무색계는 색계 위에 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삼계는 세간(世間)이라고도 하는, 중생이 육도(六道)에 생사 유전하는 범부계(凡夫界)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삼계는 마치 두레박이 우물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처럼 한량없는 세월을 끊임없이 돈다. 말하자면 삼계를 사는 중생의 모습은 마치 우물물을 긷는 것 같이 보여 백천만겁의 한량없는 세월을 오르락내리락 윤회를 거듭 한다는 것이다. ‘차신불향금생도 갱대하생도차신: 이제 이 몸 금생에서 제도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 것인가’ 그러므로 사람의 몸을 받고 불법을 만나 이번 생에 제도를 하지 못한다면 다음에는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를 할 것인가 하는 뜻이다. 참으로 오늘날 불자들이 가슴깊이 새겨야 할 경구이다.
옛날 고봉 스님은 깨달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심월(心月)은 어디서 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주는 것도 아니다. 원래 있는 것이며 칠팔월 장마에 운무가 잠시 흩어진 사이 보이는 빛이 여우 빛이다. 그 또한 심월 인 듯 심월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여래의 빛이다. 짐승인 개는 하늘의 달을 보고 해를 보라고 해도 아래의 먹을 것만 찾는다. 삼척동자는 아버지가 달달 하면 손가락 끝의 달을 본다. 꼭꼭 숨어 있는 여래를 찾아라. 그것이 극락이고 도솔천이다. 반복적인 생활이 원칙이라 하더라도 인신난득(人身難得: 사람 몸 받기 어렵다) 불법난봉(佛法難逢: 불법 만나기 어렵다)이라 했다. 너의 마음을 찾아라.”
이와 같이 가히 성불이란 바로 마음의 달을 찾는 것이 아니겠는가? ■ 조계종 원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