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一切時中 言語道斷 心行處滅 是自心 故云佛色無盡 智慧亦復然 色無盡是自心 心識 善能分別一切 乃至施爲運用 皆是智慧 心無形相 智慧亦無盡 故佛色無盡 智慧亦復然 四大色身 卽是煩惱身 卽有生滅 法身 常住而無所住 大佛法身 常不變異 故經云衆生 應知佛性本有之身 迦葉 只是悟得本性 更無他事.
“언제든지 말이나 문자를 초월하며 사상이나 개념으로 취해질 수 없는 이것이 곧 자기의 마음이니라. 그러므로 말씀하시길 ‘부처의 모습은 없어지지 않으며 지혜도 역시 그러하다’ 하신 것이니라. 모습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자기의 마음이니라. 심식(心識)이 온갖 것을 잘 분별하는데 온갖 분별과 움직임이 모두 지혜로 비롯되니 마음은 형상이 없고 지혜도 없어지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의 모습은 없어지지 않고 지혜 역시 그러하다’ 고 하신 것이니라.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이뤄진 육신은 곧 번뇌의 몸인지라 나고 죽음이 있지만 법신은 항상 머무르되 머무르는 곳이 없느니라. 여래의 법신은 상(常)이라 변하지 않으므로 경에서 말씀하시길 ‘중생이 응당 불성이 있는 몸인 줄을 알아야 한다’ 하신 것이니라. 가섭은 본성을 깨달은 것이지 따로 무슨 일을 한 것이 아니니라.”
[해설]
우리 본래 부처자리 마음은 문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겁니다. ‘자기의 마음’이라 했을 때, 성현들이 쓰는 마음은 우주 그대로를 하나의 마음으로 보고 ‘자기의 마음’ 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마음도 그와 똑같은 마음이라는 얘기죠. 본래 ‘부처님(實相)’은 모양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글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진리라는 얘기예요.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겁니다. 모양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변할 수가 없는 거예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부처는 우주의 근본 실상을 인격적으로 부르는 호칭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마음 또는 선(禪), 지혜, 불성, 법성(法性) 등 다양한 명사를 쓰기도 합니다. 실상자리인 부처는 모양이 없기 때문에 억겁 전이나 억겁 후에도 바로 이 자리입니다. 지혜 역시 실상자리의 표현이기 때문에 불생불멸의 자리입니다.
‘모습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자기의 마음이니라. 심식(인식)이 온갖 것을 잘 분별하는데, 온갖 분별과 움직임이 모두 지혜로 비롯되니 마음은 형상이 없고 지혜도 없어지지 않느니라.’
마음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멸하는 것도 생하는 것도 아니며 우주를 그대로 하나로 보고 쓰는 성인들의 마음은 마음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모습은 없어지지 않고 지혜 역시 그러하다’ 고 하신 것입니다.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이뤄진 육신은 곧 번뇌의 몸인지라 나고 죽음이 있지만 법신(法性身, 영원불변한 진실의 모습 그 자체)은 항상 머무르되 머무르는 곳이 없느니라.’
모든 물질은 번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우주 근본실상을 떠난 것은 모두 번뇌입니다. 달마 스님 말씀을 통해서 보면 본래 마음자리를 떠난 그 마음이 번뇌고 업입니다. 착한 생각을 하든, 어떤 행위를 하든, 업이고 번뇌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이라고 말을 했을 때는 본래 마음자리와 하나가 됐을 때 그 자리, 그 순간이 수행이지 봉사하고 법문하는 것 또한 번뇌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문자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그랬습니다. 영원하지 않고 변하는 것을 가지고 마음을 쓰고 있는 그것이 번뇌 아닌 것이 없다는 얘깁니다. 본래 그 자리에 머무른다는 얘기는 변함이 없는 ‘생사가 없는 자리’를 뜻합니다. 번뇌에 의해서 나타난 모든 물질과 육신은 시간적으로 항상 있지 않고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사가 따릅니다.
그러나 여래의 법신은 ‘상(常)’이라 변하지 않습니다. 우주 근본 실상은 모양이 없는 자리로서 항상 하기에 변하지 않으며 그래서 불생불멸의 자리입니다. 일체 현상계 역시 그 자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일체가 불성(佛性) 아닌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섭 존자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세 곳을 통해서 법을 전해 받은 첫번째인가 제자입니다. 이것을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하는데 영산회상에서 부처님께서 꽃 한 송이를 대중들을 향해 들어 보이시자 가섭 존자가 빙그레 웃음으로 답을 하자 “내 정법안장을 너에게 부촉한다” 하셨고[(靈山會上擧拈花], 다자탑에서 가섭존자에게 자리를 반을 나눠준 것으로 법을 전하셨으며[多子塔前半分座],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신 부처님께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임[泥連河畔槨示雙趺]으로써 법을 전한 것으로 선종에서는 보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가섭 존자에게 법을 거듭해서 전한 것은 서로가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가섭 존자가 깨달은 진리는 본래 성품(性品)을 깨달았을 뿐 다른 무엇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 청주 혜은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