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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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마음의 크기를 아는가?
[원문]
聖人 種種分別 皆不離自心 心量廣大 應用無窮 應眼見色 應耳聞聲 應鼻嗅香 應舌知味 乃至施爲運動 皆是自心.“성인들의 갖가지 분별은 모두 자기의 마음을 떠난 것이 아니니라. 마음의 크기는 광대한 것이라 응용은 끝이 있을 수 없느니라.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으며, 혀로 맛을 알며, 생각으로 분별하며,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곧 마음이니라.”

[해설]
‘성인들의 갖가지 분별은 모두 자기의 마음을 떠난 것이 아니니라.’
‘성인’이란 도를 깨달은 분들을 말합니다. 우주가 그대로 하나의 마음으로 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으며 또한 하나의 마음을 쓸 수 있는 분을 성인이라 합니다. 우리는 너와 나를 따로 보고 분별해서 행동하지만, 성인은 항상 우주와 내가 하나임을 알고 행동합니다. 우주 근본 자리를 떠나지 않는 마음을 쓴단 말입니다. 중생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말과 행동을 하지만 성현들은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주를 그대로 하나로 보고 행하는 것에 그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행입니다. 이 말을 지혜라고도 하지요.
어떤 분이 <반야심경>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저 너머에 연기가 보이면 불이 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런 것을 지혜라 한다”고 말을 했어요. 이런 것은 지혜가 아니고 세속적 지식의 놀음입니다. 우주의 근본 마음자리는 모양이 없으니까 문자나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맞지 않고 없다고 해도 맞지 않기 때문에 그 당체에서는 그 어떤 표현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 담장 너머에 소꼬리가 보이면 ‘아! 저것은 소구나’ 하고 알죠? 하지만 그것을 지혜라고 얘기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소는 어떻게 생겼는지 지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소꼬리만 보고도 소인 것을 아는 것이지 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식과 지혜는 분명 다릅니다. 소의 꼬리도 우주와 하나로 보는 견해가 바로 반야의 논리이며 지혜의 논리입니다.
<금강경>에서는 무루복(無漏福)을 말씀하셨습니다. 무루복이란 ‘새지 않는 복’을 말합니다. 우주를 하나의 마음으로 보면 너와 나가 따로 없잖아요.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구에게 한 끼의 공양을 대접하였다면, 우리는 상대를 보고 하잖아요. 상대를 보고 했기 때문에 인과에 걸려서 새는 복이 되는 겁니다. 언젠가는 받았기 때문에 갚아야 되는 인과가 옵니다. 그러나 상대가 우주와 하나라고 본다면 우주를 상대로 했기 때문에 우주를 상대로 복을 지은 거예요. 그러므로 새지 않는 무루복이 되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좋은 일, 나쁜 일 겪는 일들은 인과에 의해서 오는 겁니다. 자식을 낳고 낳지 못하는 것도 인과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내가 행하는 행위가 우주를 상대로 행한다면 그 상대는 모양이 있는 것 같지만 반야에서 보면 모양이 아닙니다. 성인은 우주를 하나로 보고 행하지만, 중생들은 근본을 모르고 겉모양만 보고 행하기 때문에 인과가 성립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 쓰는 것이 차이가 납니다. 베푸는 것도 우주를 상대로 마음을 두고 행하면 끝이 없는 거예요. 끝이 없는 무루복을 행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덕과 지혜를 완벽히 갖추신 분입니다.
‘마음의 크기는 엄청난 것이라 응용(온갖 미묘한 작용)은 끝이 있을 수 없느니라.’
우리의 본래면목은 우주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에 비해 육신은 우주 차원에선 티끌도 안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평생 잘 먹이기 위해서 살잖아요. 아무리 잘 입히고 먹이고 한들 죽을 때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 주객이 바뀐 삶을 살고 있다고 설한 것이죠.
<법성게>에서 “한 티끌 속에 우주를 머금고 있다(一微塵中含十方)”는 말은 티끌과 우주가 그대로 하나이기에 나온 말입니다. 이렇듯 위대하고 큰 마음을 우리는 잘못 쓰고 있습니다. 우주와 같은 큰 마음을 우리는 마음대로 쓸 수 있는데, 무시이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양 집착하며 살아옴으로써 쓰지 못할 뿐입니다.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으며, 혀로 맛을 알며, 생각으로 분별하며,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곧 마음이니라.’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맛을 보는 모든 것이 마음 아닌 게 없다는 말입니다. 육안의 눈으로 보는 중생 세계에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성현의 세계에서는 마음 아닌 게 없기 때문에 모든 행동 또한 마음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고 듣는 것은 귀가 듣고 눈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눈과 귀를 통해서 보고 듣는 겁니다.
물질과 공은 다르지 않습니다. 얼음과 물이 다르지 않듯이 물질과 마음은 곧 하나이기 때문에 일체가 다 마음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란 일체가 다 마음으로 나타난 마음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마음 아닌 게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 청주 혜은사 주지

200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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