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 종합 > 기사보기
불교·기독교의 ‘현실개혁’ 코드는 같습니다
사회에 안주하지 않고 치열하게 싸우는 종교
‘열반’과 ‘하나님 나라’세상 질서 초월에 공통점

강 사 : 길희성(서강대 명예교수)
일 시 : 2009년 7월 7일
주 제 : 붓다와 예수
그리고 열반과 하느님 나라
장 소 : 만해NGO교육센터
주 최 : 참여불교재가연대

도대체 왜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야 할까? 개신교 신자로, 가톨릭 재단인 서강대에서 교수로 20년 넘게 불교를 가르쳐 온 길희성 교수. 종교간 이해와 소통에 앞장 서 온 그는 불교와 기독교의 궁극적 지향점이 같다고 말한다. 단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각 종교의 참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임을 지적하며 불자들의 변화를 촉구하는 그의 강의 속으로 들어가 보자.

#종교다원국가 한국
한국사회는 불교와 기독교가 양대 종교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단일의 주류 종교와 낮은 비율의 소수 종교로 된 구성을 보이는데 반해 두 종교가 한 사회 내 막상 막하의 세력을 가지고 공존하는 한국사회는 매우 독특합니다. 한국사회는 명실공히 종교 다원사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한국인의 민족성과 유교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인은 민족 정체성이 종교 정체성보다 강합니다. 단일민족으로 언어와 민족이 같기 때문에 설령 종교가 다르다 하여도 큰 다툼이 일지는 않습니다.
또한 과반수를 넘는 무종교 국민들과 불자들은 종교가 아닌 민족문화로서의 유교를 함께 가지고 종교갈등의 완충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갈등의 근본원인은 무지에서 오는 ‘편견’
하지만 현대사회에 접어들며 종교갈등은 사회를 분열시킬 잠재요소로 점차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들은 이러한 위험성을 표출한 것입니다. 일차적인 원인은 개신교의 배타성과 호전성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갈등의 가장 큰 근본원인은 상대종교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오는 편견입니다.
기독교 신자들 중 불교의 심오한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예로 ‘우상숭배’를 들 수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강연할 때 이렇게 설명합니다.
“절에서 보는 불상과 탱화 등은 일종의 ‘시청각자료’다. 그 것은 상(像)에 집착하는 사람들(중생)을 무상의 세계, 더욱 깊은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기 위한 방편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부처님에게 ‘애 낳게 해달라’ ‘시험 붙게 해달라’고 비는 것을 겉으로만 보기 때문에 ‘우상숭배’라고 단정합니다.
또 불자들도 기독교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배타적, 호전적 기독교의 단편에 빠져 제대로 알아보려는 사람이 적습니다. 저는 스님이나 재가불자 중에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한 분이 나와 불교계 내에서 불자들에게 상대종교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존중할 수 있는 종교교육이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예수 알아야 기독교 알 수 있어
그렇다면 불자들이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독교를 알기위해서는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한국사람 입장에서 어떤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 등의 명칭은 한국 고유의 문화와 관계 없기 때문에 크게 와 닿지 않습니다.
어떤 민중 신학자는 민중의 아픔과 한(恨)을 풀어줬다는 의미에서 ‘큰 무당’ ‘한(恨)의 사제’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군자’라고 비유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내면적인 면을 가장 잘 드러낸 명칭이 불교의 ‘보살’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불교문화권에서 탄생했다면 틀림없이 자비로운 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중생의 고통에 뛰어든 보살상을 보았을 겁니다. 반대로, 만약 보살이 2000년 전 척박한 유대 땅에 출현했다면 필경 예수님의 모습으로 출현했을 것입니다.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 본 ‘보살 예수’
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위대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부처님 자신도 불법에 있어서 유한한 존재로, 보편적인 진리인 ‘법’을 스스로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반게에서 ‘법등명 자등명(法燈明 自燈明)’을 말씀 하셨지 자신(부처님)을 등불로 삼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불교의 위대성과 깊이는 한 특정한 인물에 대한 집중보다 다르마(법)의 깨달음이 중요한데 있습니다. 그것을 깨치면 불자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닌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천국운동’을 벌인 ‘청년 예수’도 사람입니다.
‘청년 예수’는 자신의 삶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실제성을 현실에서 보였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예부터 하늘을 숭배하는 것처럼 유대교 하나님을 숭고히 여겼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를 ‘하늘나라’로 표시하는 등 직설적인 표현조차 삼갔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하늘나라가 임박했다’ ‘자신의 삶을 접어두고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 나라에 신민으로서 살라’고 말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구체적인 인격, 행동, 사람관계, 공동체 생활 등에서 보여줬습니다.
이후 그에 대한 기억이 복음서로 남고, 더욱 추앙심이 높아져 하나님과 동격으로 까지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구체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의 근본은 사회개혁, 참여로 나서야
교회는 기독교의 상징과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대형교회 부흥회 등에서 박수 치며, ‘이미 새 시대가 왔다’ ‘구원받았다’는 자만은 큰 오산입니다. 샴페인 터트리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불교의 열반과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질서를 초월한 종말적 세계라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현 사회 질서 등 존재론적 질서 자체에 불만이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얘기하는 ‘고(苦)’입니다. 지금 이렇게 살지 않고 깨달음의 지혜를 통해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탐진치의 세계가 계정혜 삼학으로 정화돼 새로운 나, 사회가 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집과 상(相)을 버리고, 자기를 비워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하나님 뜻이 사랑과 베풂으로 이 땅에 펼쳐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불교와 기독교는 코드가 같은 것입니다.
두 종교는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사회에 안주하지 않고 치열하게 싸우는 종교입니다.
불교에서는 열반에서 ‘나’라는 개체가 있느냐 없느냐 그에 대해 따지기 어렵습니다. 불자들은 생사윤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 속에 나온 업을 책임질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모두가 가지고 사회참여에 더욱 뛰어들 때 이 사회는 각 종교의 존재 이유처럼 보다 맑은 사회로 거듭날 것입니다.
정리=노덕현 기자 dhavala@buddhapia.com

이력
서강대 명예교수
종교자유정책연구원 공동대표
1987년 개신교 초교파적 평신도 교회 ‘새길교회’ 창립
진보신학으로 시민운동 펼침
주요저서 <인도철학사> <지눌, 선사상 연구> <보살예수> 등
2009-07-15
 
 
   
   
2024. 11.2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