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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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발자취를 생각지 말고 과감히 버리고 사세요
오늘 비가 부슬부슬 오고 그러는데 이런 생각이 나는군요. 부처님 앞에 모든 사람들이 촛불을 켰는데 바람이 부니까 다 꺼지고 불 하나만 남아있더랍니다. 그 뜻은, 간략하게 얘기하겠는데 가죽 속에다 불을 켠 것은 비바람이 아무리 쳐도 그 불은 꺼지지 않는다는 뜻이죠. 우리가 마음의 촛불을 켜는 것은 아마 천둥 번개가 치고 억수 같은 비바람이 쳐도 그 불은 꺼지지 않을 겁니다. 그 만좌중에 한 사람만이 그런 불이 있었답니다. 그러듯이 오늘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이 한자리를 해주신 여러분에게 참 감사의 표시를 말로 어떻게 다하리까? 마음의 도리를 공부하고자 하는 그 열의가 너무나 깊고 찬란해서 말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항상 말씀드리듯이 우리 인생이 이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것는 한 철입니다. 한 철 동안에 이 모습을 가지고 살아나가는데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요 다음 생에 또 차원에 따라서 끼리끼리 모습을 가지고 나오죠. 그런데 껑충껑충 뛰어가지 않으면 안 되겠어서 지금 이렇게 그냥 생략해서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것을 좀더 이해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문화 문명이 발전이 돼서 안방에 앉아서도 텔레비전으로 세계를 볼 수 있고 뭐든지 다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보는 거, 듣는 거, 말하는 거 이 모두를 안다 해도 도가 아니니라.” 이러셨죠.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물 한 모금을 보고도 먹지 못한다면 그거는 보나마나가 되는 거니 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바로 목마를 때에 물을 주고 물을 먹을 수 있어야만 그게 바로 실천이 되며 도가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한테 말씀드리기가 참 어려운 말입니다.
상세계, 중세계, 하세계가 모두 직결이 돼 있지만 일거수일투족 똑같이 고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거, 어떤 사람은 저런 거 천차만별로 가지각색으로 일이 벌어지곤 하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칠성부처니 지장보살이니 관세음보살이니 주해신이니 주산신이니 이런 이름을 아주 그냥 알맞게 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심(一心)으로, (가슴을 가리키시며) 그 주처에 일심으로 돌아간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상세계에도 직결이 돼 있고, 중세계에도 직결이 돼 있고, 하세계에도 직결이 돼 있다는 소립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거나 똑같은 얘깁니다. 과거 일심, 미래 일심, 현재 일심 이 삼심(三心)이 바로 일심이 돼서 점심을 먹었다고 하는 얘기도 있죠. 그렇듯이 이름이 그렇게 많아도 아프다는 거, 고가 많다는 거, 즐겁다는 거, 산에서 일이 벌어진 거, 물에서 일이 벌어진 거, 명이 짧아서 일이 벌어진 거며 모든 면에서 그것을 다스리는 분야가 한군데밖에는 없어요. 그래서 거기다가 어떠한 용건에 대해서든 입력을 해놓으면 거기서 자동적으로 보살이 나가서 나투면서 응신이 돼서 바로 대비책을 세워서 나가죠.
그런데 통신이 안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의 이 마음의 주처에만 그 통신처가 있거든요. 딴 데는 없어요. 그래서 그 통신처가 돼야만이 이 통신이 하달이 돼서 전체가 그 분야에 대해서, 그 용도에 따라서 대비를 할 수가 있는 거죠. 그러나 상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이게 중세계에도 하달이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이런 정신계의 요건을 모른다면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상세계의 우주의 생산처라든가 또는 블랙홀의 그 별성을 다스리는 용도라든가, 생사처의 교차로에서 차원에 따라서 배출시키는 그 부서라든가, 이러한 모든 데가 (가슴을 가리키시면서) 여기에 접근이 되면 그게 제가끔들 소임을 다 하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생활하면서 모든 것에 접근해보고 둘 아니게 돼보는 반면에 느끼고 알게 되면 상세계까지도 공법으로써 작용이 된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우주의 생산처라든가 또는 블랙홀의 그 차원을 다스려서 생산처로 보내는 과정이라든가 또는 생사를 가름하는 생사처에서 그 차원을 다스려서 내려보낼 건 내려보내고, 올려보낼 건 올려보내고, 승진시킬 건 승진시키고 이렇게 하는 그 하달처로 통신이 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경우라도 대비책을 세울 수 없는 거죠. 둘로 보면 절대로 그게 통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 통신처에서 서로 둘 아니게 연락을 취할 수 없다면 만약에 태양이 축소되거나 팽창되거나 이래도 어떻게 까딱해 볼 수가 없고, 물로 인하여 사람이 다 죽는다 해도 까딱해 볼 수가 없고, 산이 무너지고 쪼개지고 모두 갈갈이 흩어지고 지구가 쪼개져도 그건 까딱해 볼 수가 없어요. 어떠한 문제가 생긴다 하면 우리 마음들이 거기 주처에 놓을 줄 알아야 빛보다 더 빨리 통신이 돼서 그것을 가늠할 수가 있는 거죠. 그러니깐 최상의 원동력을 가졌다는 보배로 자부할 수 있는 그 마음은 바로 여러분의 주처의 한마음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한마음’ 다르고 ‘마음’ 다릅니다. 이 몸 안에 들은 모든 생명체와 같이 둘 아니게 한마음이 될 수 있어야 하고, 바깥의 일체 우주와 더불어, 삼세(三世)가 더불어 같이 통신이 되면서 하나로 구성이 돼서 돌아갈 수 있는 나툼이 있어야만이 우리가 그거를 대처해 나갈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이게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려운데 실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그 자가발전소는 바로 여러분이 제가끔 하나씩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직결이 돼 있으니까 내 전화통이 있는 데다가만 통해서 전화를 하면, 생각만 하면 그게 한생각이 되어서 통신이 되죠. 그냥 생각하는 거하고 한생각 하는 거하곤 달라요. 한생각 하는 그 생각이 바로 거기까지 통신이 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예전에 그런 예가 있었죠? 핼리혜성이 부딪치면 어쩌나 하고요. 애가 끓었죠? 그런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자발적으로 피해서 가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마음을 그렇게, 한마음을 쓰는 그 도리를 이 주처에서 알기 때문에 그렇게 부딪히지 말고 저리로 가거라 했으니까 그 마음이 거기까지 통신이 돼서 핼리혜성하고 둘이 아니게 되기 때문에 그냥 비켜가는 거죠. 만약에 악이 나한테 덤볐다 할 때 둘로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악이 자기를 죽이겠습니까? 죽이지 않으니까 선이 돼버리죠. 이것이 모두가 지혜로써 자유권을 얻는 방식이죠. 그런데 이것저것 아는 거를 따져서 복잡하게 생각한다면 법계에서 얽히고설켜 영 한 발짝도 떼어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함이 없이 하고 무심으로 살라 이런 겁니다. 왜 무심으로 살라 하나? 그럼
2009-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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