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으로 살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건가? 그게 아닙니다. 자기는 더불어 같이 사는 심부름꾼이기 때문에 뛰어라 이겁니다. 뛰어라. 생각이 났으면 뛰어라. 뛰는데 뛰는 사이 없이 뛰어라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발자취 얘기를 잘하는데 뛰되, 뒤의 발자취를 생각하지 마라 이 소립니다. 뛰는 사람이 발자취 생각합니까? 걸레를 빨아서 세숫대야에다 탁 팽개칩니다. 만약에 그게 금덩어리 같았으면은 착이 붙어서 세숫대야에 탁 팽개치지 않을 겁니다. 금덩어리도 헌 걸레 빨아서 내던지듯 그렇게 던져 놓으세요. 그렇게 아무 데나 팽개쳐 놓는 것이 오히려 도둑이 훔쳐갈 수도 없고 그런 것이지, 어디다 꽁꽁 뭉쳐서 감춰놓는 거는 더 잘 찾아가죠. 도둑이 생각할 때도 아무 데나 금을 팽개쳤을 리가 없으니깐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혜로운 생각으로써 살게 되면, 여유가 있고 참다운 삶이 있고 생사를 초월하는 삶이 있고 너그럽게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삶이 있다 이겁니다. 머리 깎은 사람만 불교를 믿고 사는 게 아니니까 말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이렇게 반복하는데 그 ‘반복한다’ 이런 거는 아주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어떠한 용도에 잘못했느냐 잘했느냐에 따라서 모습도 달라지고 소임도 달라진다는 거죠. 탤런트가 자기 소임을 받아가지고 나오듯이, 어떠한 역을 잘했으면 잘한 대로 받아가지고 나오듯이, 이렇게 자기가 한 대로 소임을 받아가지고 나오니 정말이지 얼마나 묘한 도리입니까?
그래서 여러분한테 항상 좋은 마음으로써 입력을 해라, 주인공에게 모든 거를 입력을 해라 하는 겁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다섯 가지의 문제를 가지고 오신통(五神通)이라고 한다. 그 오신통은 바로 입력이 되는 컴퓨터와 같다. 인간은 자동적으로 컴퓨터처럼 입력이 돼서 현실로 나오니까. 그게 그냥 있는 게 아닙니다. 나옵니다. 그러니까 항시 인간으로서 넘을 수 없는 어떤 것도 넘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거기 입력을 해라 이 소립니다. 마음은 마음이라는 이름이 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라는 이름이 천차만별의 마음을 쓸 수 있습니까? 마음은 그냥 쉴 사이 없이 찰나찰나 나투면서 돌아갑니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그런 것을 어떻게 마음이 이걸 했느니 저걸 했느니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아닌 마음으로서, 마음이 아닌 한마음으로서 그냥 여여하게 초월해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며, 함이 없이 한다 이런다면 그것은 아주 최상의 평등공법(平等空法)이죠. 마음이라는 게 참 괴상하기도 하면서 아주 영묘하기도 합니다.
예전에 제가 원주에 있을 때 얘깁니다. 어떤 사람이 시골에서 어려운 살림에 자식들 장가들이고 시집 보낸다고 금을 사다 놓은 걸 잃어버렸단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랬는데 고양이를 갖다가 시루에다 찌면 그게 비틀어지는 대로 도둑이 비틀어진다는 소릴 듣고 고양이를 시루에다 쪘답니다, 산 거를. 그러니깐 비틀리면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렇게 하는 사람을 쳐다봤는데 그달부터 그 며느리가 어린애를 가졌는데 고양이를 낳았거든요. 마음이 고양이의 마음도 있는 거지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L.A.에서 또 한 번 이런 문제가 있었죠. 차를 타고 가다가 고양이를 그냥 치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아주 그냥 고통을 견디질 못해서 비틀고선 쳐다보면서 죽더랍니다. 그런데 그달부터 어린애가 있어 낳았는데 고양이를 낳았다고 해서 전화가 오고 야단법석이 났었습니다.
이러한 거를 봐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아주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들이, ‘우리는 다 늙었으니까 괜찮지!’ 이렇게 하지 마시고 요다음에 또 젊어서 나올 때 생각을 하세요. 우리는 모두가 정자와 난자, 그리고 영혼이 들어가야만이 삼합이 합쳐집니다. 공자님 어머니는 공자님을 낳을 때 6년을 기도해서 좋은 영을 달라고 그래서 어린애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연이 됐든 어찌해서 인연이 됐든 악해도 인연이 되고 선이라도 인연이 되고 그러거든요. 선의 인연으로써 내 자식이 됐다면 아주 평화스럽고 좋지만 악의 인연으로써 자식을 낳았다면 그것은 아주 평화롭지가 못하고 가정의 분란이 끊일 사이가 없이 일어나죠.
그리고 애타는 마음에서 인연이 되고 악연으로서 아주 뼈가 아프고 가슴이 아프게 인연이 된 사람은 옛날에도 얘기했듯이, 깻벌레나 거미 얘기처럼 그 자식으로 태어나가지고선 중간에 가서 그냥 딱 없어져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동안까지 아주 잘합니다. 잘하다가 그냥 탁 죽어버려요. 탁 죽으면 가슴에 묻어버리죠. 그 자식이 가슴에 묻어진단 말입니다. 악연의 그 원리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여러분은 그냥 지나가니까 모르고 계시겠지만 그렇게 악연이 무섭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 젊으나 늙으나 남녀를 막론해놓고 어떤 사람도 소홀히 볼 게 아니죠. 예전에는 더 많이 그런 일이 벌어졌지만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줄지 않고 병으로 자꾸 연관되고 있죠. 자식을 쌍둥이를 낳았는데 한쪽은 병신이고 한쪽은 성하다, 세 쌍둥이를 낳았는데 배가 붙었다, 뭐 이런 문제 등등이 벌어지는 게 전부 그런 연관성 때문입니다. 본인들은 알지도 못하고 수습도 할 수 없는 문제들이 벌어지곤 하죠.
그래서 여자나 남자나 자식들을 귀하다고만 하지 마시고 올바르게 지도를 해주시되 이 뜻을, 항상 관(觀)하는 뜻을 ‘네 나무는 네 뿌리를 믿어야 하느리라. 네 뿌리를 의지하고 살아야 모든 그 유전성이니 인과성이니 그런 것이 다 무너지느니라.’ 하는 걸 가르치세요. 그렇게 입력을 해놓으면 앞서의 인과성이라든가 유전성이라든가 그런 것이 다 무너지니깐요. 무너지는 반면에 새로이 입력한 게 나오게 되는 거니까 팔자 운명이 붙을 데가 없다 이런 소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다.’ 이러는데, 그럼 왜 없다고 하느냐. 우리가 발자취를 볼 때에 벌써 아까 여기로 걸어올 때의 뒷발자취는 없어졌습니다. 가버렸어요. 가버렸으니깐 없고, 미래로 걸어갈 거는 아직 걸어갈 게 오지 않았으니깐 없고, 현재에는 그것이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찰나찰나 돌아가니까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이것 한생각으로써 입력하는 데 문제가 달려 있다 이겁니다. 한생각 입력하는 데서 업보가 오고, 착을 두는 데서 인과가 오고 그러는 거죠, 유전성이 오고. 영계성도 착에서 오는 겁니다. 타의에서 영계성이 오든 자의에서 영계성이 일어나든 모든 것이 착, 욕심 그런 데서 오는 겁니다. 애정도 그래요. 누가 애정을 갖지 말라나 사랑을 하지 말라나요. 사랑을 하고 애정을 갖되 순간 순간 그렇게 했으면 줄창 쥐고 있지 마라. 발자취처럼 그냥 걸어왔으면 그냥 내버려라 이거죠. 그것을 입력을 하고서 돌아서면 그게 정통으로 입력이 돼서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면서 새로 나오는데, 입력을 할까 말까 이러다가 또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왔다 갔다 하다가 입력이 되질 않아가지고는 다시 그게 자기 앞에 나타나게 되거든. 그러니 과감히 버리고 살아라. 뒷발자취를 과감히, 내가 걸어온 거 어떻게 됐나 하고 생각하지 말고 과감히 버리고 살아라 이 소립니다, 하긴 하되.
그리고 사람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점이 너무 많습니다.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자기가 어떠한 습에 의해서, 관습에 의해서 거기에 매달려서 그 마음이 탁 틔여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되지 않는 겁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실 때에 얼마나 너그럽게 매사에 대해 다 써놓으시고 다 말해놓으시고 나중에 “그냥 여여하니라. 그냥 공(空)했으니까, 그대로 자유스럽게 살라.” 이랬는데, 왜 자유스럽게 살라고 했는데도 자유스럽게 못 살고 그렇게 ‘아, 이게 옳지. 이게 옳으냐? 이것 안 되는 일이다. 이거는 되고.’ 이렇게 걸리고 매여서 삽니까?
요즘 보면 집을 판다, 땅을 판다, 또 병이 났다 뭐 또 산소를 쓰고선 사람들이 그냥 재차 죽는다 이런 말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도 그렇죠. 반드시 믿고 입력을 했으면 어떠한 문제라도, 산소가 잘못 써졌어도 영혼만 딱 건져내면 그건 무효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거를 잘못 써서 자꾸자꾸 이렇게 망하게 되고 죽게 되니까 이 착을 떼질 못합니다. 그러니까 산소를 딴 데다 써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문제는 거기에서부터 일어나는 거죠. 이 문제가 한두 건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한테 대충대충 얘기했지만 그것은 심사숙고해야 하는 우리 생활 속에 끼어든 사건들입니다. 자식들이 나와서 별짓 다 하고 뛰어다니게 하는 것도 마음의 탓입니다. 그건 자식들의 육체의 탓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을 ‘제 뿌리나 내 뿌리나 둘 아닌데 저렇지 않게 하는 것도 너뿐이다.’ 하고 진짜로 믿고 통신이 될 때 그것은 가능합니다. 해결 못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못하는 것은 ‘나는 종이니까, 나는 종이니깐 영 주인의 말을 거역하면 안 되지!’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그래서 종 문서를 떼어버릴 수가 없는 거죠. 진짜로 믿는다면 과감히 종 문서를 탁 팽개치고 입력을 해놓고선, 그 뒤에 생각나면 또 팽개치고 그 뒤에 생각나면 또 팽개치고 이렇게 하다보면 자식들도 다 건질 수 있어요.
지금 내가 이렇게 말하듯이 딴 사람들도 이렇게 말하겠죠. 그렇지만 말은 한다 하더라도 이 뜻을 모르고 실천을 모르고, 공법(空法)의 용도를 모르고 그런다면 이 말은 그대로 한데 떨어지는 겁니다. 법으로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통신이 되지 않습니다. 작은 데서부터 큰 데까지 전부 말입니다. 아까 고양이 얘기 했지만 고양이뿐이 아닙니다. 어느 집엘 들어가니까 사람인데 의식은 개예요. 그렇지만 말은 못하죠. 어떻게 말을 합니까. 모두가 이렇게 해서 그것이 한 번 더 사람을 거쳐서 사람의 행과 도리를 배우고 그 순서가 완벽해야 세 번째 가서 진짜 사람으로 태어나는 거예요. 모습만 사람으로 태어나면 뭘 합니까? 고양이로 살고, 개로 살고, 구렁이로 살던 습이 있어가지고 사람이 사람 노릇을 못하고는 만날 그렇게 개나 고양이처럼 사는 걸요.
그러니까 그 습대로 그렇게 가지 않고, 남이 하는 걸 가만히 살펴서 자기가 사람 노릇을 한다면 다시 요다음에 한 번 더 중간 사람으로서 또 태어나서 자비를 베풀게 되고 선의를 베풀게 되고 이렇게 한 번 더 살아야 완벽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출현을 하게 되죠. 그런 사람이라야만이 또 대통령도 하고 장관도 하고 그러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은혜로써 자식이 그렇게 되는 수도 있거든요, 자기가 그렇게 못해도. 그러나 부모의 은혜는 잠시 잠깐입니다. 잠시 잠깐 그러다가 그냥 낙화처럼 떨어지죠. 떨어지게 되면 그거는 뭐 지옥거리죠. 하하하.
사람이 살아나가면서 진행되는 문제들을 잘 보세요. 지금 애틀랜타인가 거기서 올림픽인가요, 뭐 운동하는 것도요, 눈을 노리고 말입니다, 그거를 이기라고 그냥 힘을 쓰고 이러면 오히려 부작용이 더 일어나죠. 한번 ‘이렇게 조그만 나라에서 천덕꾸러기로 살던 이 사람네들이 꼭 그거만은 이겨야지.’ 이러고는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대로 진행이 될 텐데도 불구하고 그냥 모질게 마음을 쓰고 이러니, 사람이 가슴이 그냥 탁 터지는 것 같고 온통 불안하고 야단이 나죠.
그런 문제도 문제거니와 생활하는 속에서도 그런 거예요. 자식이 어떠한 문제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쓱 웃고 ‘허, 주인공,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그러고 그냥 내버려두는 거예요. 믿으면 내버려두는 거예요, 믿는다면! 그럼, 오히려 가다가도 돌아서게 되죠. 이게 이렇게, 이렇게 묘한 구석이 있는 도립니다, 이게. 가라 그러면 돌아서고, 오라 그러면 가고 이러는 도리나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 자체가 너그럽고 지혜롭고 둥글고, 둘 아니게 볼 수 있다면 모두 너그럽게 살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이렇게 쉽게 말을 하는 것 같지만 나는 쉽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운동하는 사람들 갖은 노력을 다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온갖 전력을 다해서 이기는 걸 보면 뭐 하나 소홀히 할 게 하나도 없어요.
만약이 악이 나한테 덤빈다 하더라도
둘로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악이 자기를 죽이겠습니까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