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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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없는 공덕’이해 할 수있다면
굶주림은 곧잘 비굴함을 불러들인다. 예부터 이를 간파한 군주 가운데 백성이 비굴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은 성군이라면 백성들의 배 채워주는 일에 힘썼을 것이고 독재적 성향을 가진 군주였다면 백성의 가난을 알뜰히 챙기지 않았을 것이다. 비굴한 복종을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독재적 군주에게 바람직한 통치술로 보였을 것이다.
나라의 양식 주머니 끈을 혼자 독점한 다음, 굶주린 이들에게 조금씩 베풀며 ‘감사함’을 받아들이는 그 기분이란?
굶주린 백성들은 그때마다 군주의 온정 넘치는 베풀음을 찬양했을 것이다.
‘따뜻이 입혀 주시고, 배 불리 먹여 주시고…’ 그런 세상에서 백성들의 그 찬양은 어쩌면 진심이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베풂이 과연 온정일까? 그것은 온정도 자비도 자선도 사랑도 아닌 사악함이다. 희한하지만 현대세계에서도 그런 ‘비굴한 복종’을 통치술로 여기는 대책 없는 폭군의 나라가 아직 몇 곳 있으나 ‘온정’에 대한 의미는 시대를 달리하며 바뀌어 왔다.
동·서양, 봉건시대 식민시대의 양반 귀족 계급이나 지배계층 가운데 자기 땅이나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복지를 알뜰히 챙긴 온정 넘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야 보기 드문 자비로운 행위로 상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심리를 깊게 파고들 줄 알게 된 현대는 이를 ‘온정적 간섭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온정’이라면 ‘온정’의 의미가 상당히 희석된다.
여러 이데올로기의 시험을 거치며 사회주의 자본주의 시대를 몸으로 겪으며 살아 온 현대인들에게 자선, 기부, 온정, 사랑, 자비 등 단어들이 갖는 의미와 이들 단어들이 갖는 체감온도는 지난날에 비해 상당히 다르다.
인간 탐욕만을 극대화 한다는 비판을 들어 온 자본주의도 이제 가진 자들이 나서 세계의 빈곤과 질병, 양극화를 없애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창조적 자본주의’에 눈 뜨기 시작했다. 가진 자들의 자선은 가진 자들의 의무라는 쪽으로 의식이 바뀌어 가고 있다. 미국 마이크로 소프트 사를 창업한 빌 게이츠가 이 ‘창조적 자본주의’를 주창하고 있으며 미국 대부분의 재벌들이 세운 자선단체들, 그 이외에 3만여 개의 크고 작은 자선단체에서도 그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가진 자들에 의해 자본주의의 모순이 해소될 수 있다는 희망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옛 현인들이 지적했듯이 ‘사유재산은 개인이 자연으로부터 잠시 맡아 있는 것’일 뿐이다.
소유와 보시는 그래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 다니는 것이어야 한다.
달마대사가 양무제의 ‘수많은 보시에도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답한 뜻을 헤아린다든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한량없는 공덕’을 이해 할 수만 있다 해도 우리는 자선 자비 사랑 온정 등의 단어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남의 선심을 분석하고 파헤치며 의심하거나, 베푸는 이들에게 감사할 줄 모르게 된다면 이 역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의 상당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의 자녀를 위해 기부했다고 한다. 시대상황으로 볼 때 분명 앞선 실천으로 박수 받아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회적으로 비슷한 실천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기대 또한 받고 있다. 대통령 주변에서 이를 부추기는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그의 ‘기부’를 보다 높은 경지로 이끌 수 있는 길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마음가짐임을 그가 알고 있을까?
200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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