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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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내지 말고 주인공에다 모든 걸 일임시켜라
개별적인 자기가 아니라 포괄적인 자기
자기 잠재해 있는 원소 자체
실상의 주인공을 믿어야 합니다

아서 전부 다스리는 겁니다.
생각해 보면 널리 울을 쳐 놓고 있는 게 지금 이 지구 아니겠소? 이 지구 바깥을 벗어나지 못하죠? 울타리를 널리 쳐 놓고선 그 안에서들 지금 사는데, 그 안에서나마 좀 활력성 있게, 마음이 좁지 않게 지혜로이 나가게끔 개선해 주는 게 어머니나 부인이나 또는 아버지나 남편이나 자식에게나 서로 똑같은 일이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좀 넓게, 이 손바닥 안에서 어디로 가질 못해요. 전부 가설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다 팽개치라는 것이 아니고, 좀더 거기다가 넓게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저의 질병을 공부 재료로 삼고 싶은데…
운? 스님께서는 대상포진이라는 병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지금 저는 그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근데 이 병도 다 마음으로 인해서 생긴 거라면 저도 이걸 공부 재료로 삼아 한번 마음 도리를 알고자 합니다. 어떻게 실천을 해야 좋을는지요?
답? 사실 자기가 실질적으로 그렇게 해 보지 않고는 그 도리를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애기가 되라. 아는 거와 모르는 거를 다 그 주인공에 일임시키면서 자기는 자기대로 거기 믿고 거기 감사하고, 들이고 내는 것도 거기다 들이고 내야 된다. 그러는 동시에 내 이 육의 기능도 모든 것을 거기에서, 즉 말하자면 감독이 되는 거죠, 모든 게. 기능의 감독자로서 전부 응용하듯이. 그러니까 내가 인체 안에서 모든 생리적인 작용을 하는 것을 다 관리로서 하다가 보면 바로 제작자가 되는 거죠. 배역자가 되는 게 아니라. 이 안에서 생리적인 작용을 하는, 즉 말하자면 그 곤충들이 다 나한테는 호법신장들이 되는 거죠. 그래서 팔만 사천 털구멍도 업보가 되려면 그 털구멍 하나에 한 생의 업보가 된다 하지마는, 그것이 호법신이 된다면 일분일초도 안 돼서 항상 다니면서 자기를 보호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자기 마음이 그렇게 그 주인공에 모든 걸 몰락 일임시켜 버리고 잠재해 있는 자기 실상이 지금 현재 의식과 계합이 된다면 그렇게 좋은 보물을 얻을 수가 없는 거죠. 그럼으로써 일체 만법을 자기 응용대로 참, 하늘과 땅을 상응하면서, 모든 일체 유생 무생을 다 상응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둘로 보질 않고 하나로서 다 작용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 몸 안에 들어 있는 곤충의 생명이나 내 큰 생명이나 둘이 아니죠, 하나하나가.
그러니까 겁낼 것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도 겁내지 말고 모든 걸 일임시킨다면, 겁을 내기 때문에 일임해도 진짜 되질 않지, 겁을 내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믿는 게 되거든요. 육신마저도 진짜 자기, 이 주인공에다가 내버리는 격이니까. 그러니까 거기다 던져라, 던져라 하는 거죠. 몰락 던져라. 던지면 건져진다.
그래서 업보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자(慈)와 비(悲)가 둘이 아니고, 즉 말하자면 악과 선이 둘이 아니고 이게 전부 해말갛게 이렇게 연기가 같이 돌아가는 것처럼, 에너지가 같이 돌아가는 것처럼, 구름이 같이 돌아가는 것처럼 이렇게 돌아가고 있거든요, 사람의 마음들이. 생각 내기 이전 마음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그거 조절을 하는 거는, 바로 빼 쓰고 잠그고 하는 거는 마음, 지금 내는 마음, 이거죠. 그것을 조절하려면 내가, 나도 이게 물질이기 때문에, 작용하는 그림자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참나에게 모든 걸 일임하는 거죠. ‘네가 형성시켰고 네가 움죽거리게 했고 네가 말을 하고 네가 생각나게 하는 거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하고 탁 맡겨 버리는 거죠. 그리고 요구하는 것도 거기다 요구를 하고요. 감사하는 것도 전체니까, 전체가 돌아가는 거니까 거기 하나만 감사하면 전체가 다 감사를 받고, 이건 주고 받고 하는 것이 없이 우주간 법계에서도 다 상응을 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이론적으로 이것이 이렇다, 이것이 이렇다 이런 거를 이론화할 필요가 없는 거죠. 팔만대장경이 뭐 이 세상 돌아가는 진리인데, 어디서 또 찾겠습니까? 항상 날마다 보고 있는데. 불교가 따로 있고 생활이 따로 있어서는 절대 안 되죠. 불교가 생활이고 생활이 불교고 종교가 생활이니까. 내가 근본이고 내가 원인이 되고 내가 바로 화두고 나라는 존재가 있기에 모든 존재가 있는 거지,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모든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댁도 나 자신의 모두를 갖다가 포기하고, 포기하되 그냥 포기하는 게 아니라 자기 주인공에다가 모든 걸 일임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께서 형성시킨 거니까 당신께서, 기계를 하나 만들어 놨다면 기계 만든 사람이 더 잘 고치지 기계 안 만든 사람이 더 잘 고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 육신이 기계라면 기계 만든 사람, 그 사람한테 모든 걸 맡겨야죠.

우리 이 생명은 어디서 생긴 건지요
운? 저는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스님께서는 이 생명이 어디에서 생겼다고 보시는지요?
답? 어떤 목사님이 나한테 묻기를 이렇게 물었어요. “태초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태초는 내가 나오고부터 태초지, 왜 그렇게 멀리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하느냐 그랬어요. 태초는 내가 나오고부터 태초다 이겁니다. 그때부터 내가 알았으니까. 알고 보니까 일체 생명은, 지금 유생 무생 하는 보이지 않는 생명, 보이는 생명, 태로 낳는 생명, 알로 낳는 생명, 화해서 낳는 생명, 질척질척한 데서 낳는 생명, 이 모두가 다 생명이다 이겁니다. 이 생명이 한데 합쳐서 돌아가는 이 에너지가 바로, 거기에서부터 우리가 생겨난 거죠. 우리가 사람이 죽으면 “아, 큰 별이 떨어졌다.” 그러죠. 지금 우리의 마음들이 아니라면, 마음의 씨가 아니라면 태양도 형성시키지 못했어요. 자기의 마음의 씨가 아니라면 자기도 형성시키지 못했어요.
그럼 억겁 천 년 전에서부터 진화됐다고 합시다. 생각을 하는 것이 진화요, 그 생각을 했기 때문에 어떠한 것을, 즉 마음에서 생각을 한 것이 진화라면 창조해 낸 것은 설계를 바깥으로 내놓은 거죠. 그럼 그 설계는 한군데만 쓰여지는 게 아니에요. 다양하게 이 설계도, 이 설계도, 이 설계도, 이 모든 것이 다 다양하게 쓰여지고 있어요.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 예를 들어서 물감이 열 가지가 있다면, 물감은 이 열 가지를 한데 몰아서 물감이라고 하지만 색은 전부 다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때에 따라서는 이 물감을 쓸 수도 있고, 저 물감을 쓸 수도 있는데 어떤 것을 물감이라고 하겠느냐 이거예요. 이런 거 생각해 보셨어요?
그러면 당신이 어머니를 만날 땐 자식이 된 마음으로 어머닐 대하죠? 그리고 형님을 만났을 때는 어때요? 형님을 만나는 마음으로서 대하죠. 동생을 만났을 때는 내가 동생을 만나는 마음으로 대하고 친구를 만났을 때는 친구를 만나는 마음으로 대해요. 그게 나툼이에요, 바로. 이 색은 여러 가지지마는 근본은 하나기 때문에, 그럼 이 색 쓸 때에 ‘나’라고 하겠느냐, 이 색 쓸 때 ‘나’라고 하겠느냐, 이런 얘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때에 따라서는 다양하게 이렇게 돌아가면서 쓰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평등공이라고 그래요. 어떤 걸 내세울 수 없는 게 물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어떤 걸 내세울 수 없는 게 지금 당신이란 말이지요. 자기라고 내세울 수가 없는 게 당신이에요, 지금. 그러면서 나투어서 돌아가고 있어요. 그러나 바퀴가 굴러가면 심봉은 움쩍도 안 하고 능력만 줄 뿐이지 그 심봉이 움죽거리는 건 아니에요. 바퀴가 구를 뿐이지.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모든 일을 나투어 가면서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저 고정적이기만 한 일 해 보셨어요? 고정적인 생각, 이날까지 한 가지만 생각하고 한 가지만 먹고 그런 예 없죠? 그러니까 사람은 하난데 다양하게 여러 가지 먹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여러 가지를 활용하고 살고 있죠. 그런 것처럼 우리의 영원한 생명들은 그것이 쪼개져 있는 게 아니라 전체 한데 뭉쳐서, 비교해서 에너지라고 한다면 에너지가 그냥 전체 이렇게 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너니 나니 하고 따지고 이 종교가 틀리니 저 종교가 틀리니 하고 따지고 이러거든요.
비유하자면 종지가 있고 접시가 있고, 사발이 있고 대접이 있고, 컵이 있고 차관이 있는데 말이에요, 그 여러 가지 다양한 것이 때에 따라선 다 쓰여지죠? 필요하죠? 그러니까 사발은 종지를 미워하지도 말고, 업신여기지도 말라 이거예요. 또 사발은 저 큰 그릇을 웃보지도 말고요. 때에 따라서는 다 자기가 아무리 못났다 할지라도 잘난 사람보다 못난 내가 더 귀중하다는 걸 아셔야 돼요. 엄마도 아무리 못났어도, 코가 언청이라도 아마 잘생긴 남의 어머니보다 당신 어머니가 중요할 거예요.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자기 나무에서 자기 열매가 열려서 그 자기 열매가 무르익어서 그 나무에서 그 맛이 나는 거예요. 그 열매가 딴 나무에서 무르익은 것은 딴 나무에서 무르익은 거지, 내 나무에서 무르익은 게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를 알아야 해요, 각자. 개별적인 자기가 아니라 포괄적인 자기, 자기 잠재해 있는 원소 자체, 실상의 주인공을 믿어야 합니다.

저도 참나를 알고 싶어요
운? 한동안 살기 싫은 마음이 들어 삶의 의미를 찾고자 불교에 관심을 갖고 여러 경전도 보고 조사어록도 좀 보고 그랬습니다만 불법에 대해서 약간의 이해는 가는 것 같은데 확 잡히지는 않습니다. 저도 참나를 알고 싶은데 좋은 방법 없을까요?
답? 지금 내가 잘 안다고 해서, 댁이 구경도 안 해 본 데를 내가 구경했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창살이 몇 개니 거기는 무슨 섬이 있느니, 뭐 별 말을 다 해도 가서 보지도 않고 들어 보지도 않고 먹어 보지도 않은 그런 것을 갖다가 내가 얘길 한다고 해서 그게 적응이 되겠습니까? 그런 얘긴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니 직접 가 봐라 이겁니다. 내가 배고프면 내가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르지, 뭐 내가 배고픈 걸 남이 대신 먹어 준다고 해서 내 배가 부르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어디까지나 눈이 떠져야 되고, 귀가 떠져야 됩니다. 그런데 귀가 뜨이고 눈이 떠지고 가고 옴이 없이 오고 가고, 또 남의 숙명, 타심을 다 안다 할지라도 그게 도가 아니니라 그랬습니다. 아무리 저 미국에 있는 걸 본다 하더라도 내가 집어먹을 줄 모른다면 그건 보나마나니까 말입니다. 열 번 보는 것보다 한 번을 보고 내가 집어먹는 것이, 행하는 것이 그것이 제일인 거 아닙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그대로 생활 속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아이, 부처님 법은 어마어마하고 광대무변한데 고까짓 생활에서 무슨 쪼밀쪼밀하게 실험을 하라고 그러시니 그게 무슨 소리냐.” 이러는데 이렇게 업신여기는 그 마음, 자기 생활을 자기가 업신여기고 자기 몸을 자기가 업신여기고, 자기 마음을, 자기 주처를 자기가 업신여기고 그런다면 어디 가서 찾습니까. 허공에다가 아무리 이름을 가지고 불러 봐도 대답 없는 허공이요, 또 이름을 아무리 불러 봐도 대답 없는 이름이요, 아무리 이론적으로 알아 봐도 그건 말뿐인 거란 말입니다. 부처님이 이 앞에 계시다 할지라도 높이 보지 말 것이고, 개미 새끼 한 마리가 여기 있다 하고, 풀포기가 있다 해서 업신여기지 말라 이겁니다.
절에 가서 칠성이니 무슨 독성이니, 산신이니 용왕이니, 온통 부처님이니 나한님이니 이러고 부르면서 가지각색의 구원을 받으려고 앨 쓰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보되 모두 각자 나로만 생각해라. 그의 형상은 내 몸이요, 바로 그 마음은 내 마음이니 어찌 둘이겠는가!” 하고요. 그 주처로만 똘똘 뭉쳐서, 바로 주처로 알아라 이겁니다. 그럼으로써 자기가 알게 되고 그 주처마저도 없이 나툼이라는 걸 알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열반이요, 산 열반이요, 내세울 게 없는 자유인이라 이거죠. 영원한 자유인 말입니다.
이렇게 허구장창 약을 파는데도 자기에 맞는 약을 먹는 사람이 몇몇 될까마는 그래도 내가 업신여기는 것만큼 잃을 것이고, 내가 버리는 것만치 얻지 못할 겁니다. 몰락 버리되 버리지 말고, 버리지 않되 버려라. 하되 하지 말고, 하지 말되 하라. 여기 이렇게 모두 앉아 있고 일체 만물이, 이렇게 과학이 발전이 되고 물질 문명이 발달이 되고 이랬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부 공했기 때문에 모든 하는 일조차도 공해 버렸어요. 그냥 그 공에서 돌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근데 뭘 살기 싫고, 살기 좋고 이게 있겠습니까, 거기. 붙을 자리도 없는데.
나는 경을 나는 보질 않았기 때문에 모르겠지만 오직 내 주처가 있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 후에 그 주처마저도 나툼이지, 없다는 거를 내가 시험해 본 거죠. 그러니까 내 마음을 계발하고 깨달아야 된다 이겁니다. 그 주처를 알아내야 될 거 아닙니까. ‘어떤 놈이 있기에 이 살기 싫은 걸 나로 하여금 살게 했는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게 해내고, 말을 하게 하고, 이렇게 움죽거리게 했는가, 어떤 놈이!’ 그러고선 한번 지켜본다면 분명 알 바가 있을 것입니다.
200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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