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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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기반으로 문화도시 만들어야
이제는 문화의 시대이다. 실제로 문화가 사회 제 분야의 변혁을 이루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글로벌시대 삶의 방식과 경쟁력도 모두 문화에서 나온다는데 이견이 없다. 그렇지만 문화라는 게 인위적으로 흉내 내고 만들어서야 어떻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정말로 우리의 문화가 사회 각 분야의 저변에 번지게 하려면 이벤트나 일회성 행사에 취해있을 것이 아니라 전통 속에서 소재를 발견 수용자들의 입장에서 사고의 틀을 바꾸는 능동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조금 다른 예지만 과거 명절이면 흔히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잡다한 서커스나 마술 따위의 기예들 역시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해 사장되어버린 아쉬운 추억들이 있다. 이들도 근자에 들어와서 예술가들의 손에서 창의적인 그 무엇으로 탈바꿈하여 대중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얻을 수 있음을 여러 장르에서 조금씩 발견되어지고 있다. 문화콘텐츠의 중요성을 비로소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즈음 문화정책 입안자나 자치단체장들이 얼마만큼 진정으로 문화의 소중함과 가치를 알고나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이것은 식민지시대나 유신시대의 참담한 문화 퇴행시기와는 또 다른 것으로 마치 깨어진 유리파편의 조각에 비친 잔영의 얼룩과도 같은 환경을 보고 있는듯하다.
너나 할 것 없이 과거 것들은 지워버리고 새로운 한껀주의의 가시적 전시효과를 문화 경쟁력으로 포장하여 소란스럽게 내놓고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현실성에 의문이 가는 관념적인 아이디어만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다. 그 하나하나는 국민의 혈세임을 알고나 있는지. 또한 중?장기 정책이 입안되어 있다기보다 경제논리를 토대로 성과주의라는 미명하에 행해진다.
어떻든 서울은 한국의 얼굴이고 가치이다. 지금처럼 깊이 없이 가볍고 현란한 아이디어만 있는 정책으로는 결코 뿌리내릴 수 없다. 관에서 이끌 것이 아니라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고 필요한 곳에 따라 찾아 지원해 주는, 기본적으로 시민이 중심인 요란스럽지 않은 낮은 자세의 문화행정이 요구된다.
요즘처럼 복잡하고 급격한 변화의 사회 환경에서 삶의 즐거움을 채득할 수 있는 것이 문화말고 무엇이 또 있을까.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상투적인 단어조차도 세월의 이끼가 낀 거리에서 우리의 혼과 얼이 담긴 멋진 음악과 춤에 담아 보여 질 때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희망을 꿈꾸게 된다.
그럼에도 갈수록 도시축제가 자기 과시적이고, 자극적이며, 외형적인 화려함만을 추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문화는 없고 쇼만 있다. 진정 시민이 참여하고 함께 즐기는 문화는 이런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가 살아온 터전을 오래되고 낡은 것이라 하여 무조건 버려야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뉴욕 휘트니 미술관 재건축과 도쿄 모리 미술관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 리처드 글룩먼은 한국을 방문해 옛 건물을 무조건 부수는 것은 짧은 시간에 다시 만들 수 없는 ‘시간’을 지우는 일이라고 했다. 그나마도 서울 강북은 그자체로 아름다운 역사의 흔적이 배어있는 지역이다. 현존하는 근대 건축물이 100여점도 남지 않은 서울을 과연 이대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씩 밀어버려야만 옳은 일인가.
삭막한 도시의 거리를 걷노라면 ‘보현시원가(普賢十願歌)’의 음률이 들려오는 듯하다. 삶의 기층에서 거대한 실존의 꿈과 현실을 보여주는 서정적인 노래가 아니던가. 보현보살의 행원으로 이루어진 이 노래 속에는 세상 사람들이 놀고 즐기는 데 쓰는 도구라는 함축된 교훈이 담겨 있다.

이강렬
극작가·한국문인협회 상임이사
2009-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