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亦無修證 亦無因果 亦無筋力 亦無相貌 猶如虛空 取不得捨不得 山河石壁 不能爲碍 出沒往來 自在神通 透五蘊山 渡生死海 一切功業 拘此法身不得 此心微妙難見 此心不同色相.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으며,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결과인 것도 아니며,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며, 허공과 같아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산이나 강이나 절벽이라도 걸림이 될 수가 없어 나고 들고 가고 옴이 자유롭고 신통한 것이니라. 오온(五蘊)의 산을 벗어나 생사의 바다를 건너리니, 온갖 업(業)이 법신을 구속하지 못하느니라. 이 마음은 미묘하여 보기 어려우니라. 이 마음은 밖으로 드러나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니라.”
[해설]
성철 스님께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 몰록 깨달아 몰록 닦음)’ 라고 하셨습니다. ‘돈오’라는 것은 우주가 그대로 하나의 마음으로 돼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을 말하는데, 여러분들도 이론으로는 깨달은 겁니다. 이것을 ‘해오(解悟)’라고도 하고 직접 수행을 통해 깨달은 것을 ‘증오(證悟)’라고 합니다. 증오와 해오는 분명 다른 겁니다. ‘증오’는 그대로 습에서 바로 벗어나지만, ‘해오’는 지금 말씀 하신대로 잘 안 됩니다. 익혀온 습 때문에 잘 안 되는 것이 해오입니다. 그래서 보조 스님께서도 전생에 업(業)이 있으니까 돈오가 됐어도 점점 닦아나가야 한다는 점수(漸修)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성철 스님께서는 ‘한 번 깨달으면 닦을 것이 없다’는 돈오돈수를 주장했어요. 우주가 그대로 하나의 마음으로 된 세계를 체험하게 되면 닦을 것도 없고 성인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선에 들어가면 본심의 자리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까 분명 수행을 하는 것으로 보이잖아요. 그런데 본인은 그 자리에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있다는 생각, 없다는 생각이 끊어집니다. 그래서 닦을 것도 없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보조 국사의 입장에서 보면 깨달았지만 전생에 업이 있으니까 닦아야 되지 않느냐, 업을 녹이는 수행을 하여야 되지 않느냐? 하고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러나 돈수나 점수나 그 자리에서 보면 절대 다른 말은 아닙니다.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으며,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결과인 것도 아니며,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며, 허공과 같아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산이나 강이나 절벽이라도 걸림이 될 수가 없어 나고 들고 가고 옴이 자유롭고 신통한 것이니라.’
이는 나다, 너다 하는 경계가 다 끊어진 자리에서 말씀하신 겁니다.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우주의 근본 실상자리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45년 설하시고 “만약에 너희들이 내가 법을 설했다고 하면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하셨듯이, 실상자리에선 이름과 형상을 떠났기 때문에 산이나 강이나 절벽이라도 걸림이 될 수가 없어 나고 들고, 가고 옴이 자유롭고 신통한 것이라 합니다.
‘오온의 산을 벗어나 생사의 바다를 건너리니 온갖 업(業)이 법신을 구속하지 못하느니라.’
오온이란 것은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이 과거에 수행하실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보고 일체 괴로움을 여의었다고 했습니다. ‘오온’은 물질과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즉,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인 ‘색(色)’과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식(受想行識)’을 오온이라 합니다. 오근(五根)을 통해서 경계를 접하는 것을 ‘수(受)’라고 하며, 받아들인 다음에 생각하는 것을 ‘상(想)’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한 다음에 행동하는 것이 ‘행(行)’입니다. 행동한 다음에 생각을 하잖아요 ‘아! 잘했다’ 이것이 ‘식(識)’이라는 거죠.
그런데 물질은 사실이 아닌 것인데, 이것을 눈으로 보고 실제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큰스님께서도 “여러분들 눈 앞에 핵폭탄이 떨어져도 죽지 않는 법을 아십니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위대한 나를 가지고도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물질과 마음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오온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지나가다 금덩어리를 발견했다면 우리가 그냥 지나가겠습니까? 못 지나가죠. 옛날에 도인들은 그것이 독이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봐도 본 것이 아니고 냄새를 맡아도 맡은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들이 인과(因果)에 걸리지 않지만 모두 걸리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오온의 산을 벗어난다면 생사에 걸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의 마음을 법신(法身)이라고 부릅니다. 본래 부처이니까 인연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을 화신(化身)이라고 그래요. 부처가 마음이고 마음이 곧 부처입니다. ■ 청주 혜은사 주지
사진
명나라 때 손극홍(孫克弘)작 ‘붉은 가사의 달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