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잘되든지 잘못되든지 내가 떡그릇에 들어가보고
그냥 아무 데라도 들어가보고 그걸 체험하고 들어가야 됩니다
런데 저는 굉장히 공부를 빨리 하고 싶어 하고 가능한 한 많이 하려는 욕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스님들께서도 그렇게 말씀해 주시고요. 그래서 공부하는 과정을 말씀드리면 저는 스님께서 “요거 한번 해보세요. 요거 하면 아, 평생 동안 다른 사람이 못한 거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해주시면요, ‘진짜 한번 꼭 해봐야지!’ 그러면서 해봤습니다. 해봤는데 표현을 하자면 너무 그것이 딱 맞는 것 같아서, 아주 조금도 틀림이 없는 거 같아서 그 맛에 반해가지고 스님께서 해보라고 그러시는 거는 찾아가지고 가능한 한 전부 해보려고 그랬습니다. 그래, 그런 식으로 하다 보니까 점점 그런 걸 계속하려는 버릇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 스님께서 과연 그것이 잘하고 있는 건가, 잘못하는 건가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큰스님: 음, 누구나가 다 자기를 자기가 몰라서 길을 잃고 길을 헤매고 길을 찾으려고 하는 거죠. 그런데 그 길을 찾기 위해서 그거를 자기가 정립시키고 나가면서 체험하고 나가는 거죠. 체험하고 나가다가 보면 이제 ‘아, 이런 거로구나! 이렇게 아주 틀림없는 사실이구나!’ 하는 거를 알고, 알았으면 그것을 놓고, 또 딴 데로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보시고요, 또 딴 것도, 또 자연스럽게 오는 것도 대치할 수 있게끔 이렇게 한번 해보시고요. 모든 걸 이렇게 살림살이 속에서 모든 걸 다 해보세요. (가슴을 가리키시며) 찍어서 안 먹혀지는 게 없어요. 이 세상을 다 한 주먹 안에다 넣고 한 입에 털어넣으려도 털어넣을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이 도리를 아셔야 돼요. 이 삼라대천세계를 한 주먹에 넣고, 한 입에 넣어서 소화를 시킬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겠느냐? 영묘한 까닭이고, 무변한 까닭이고, 체가 없는 까닭이죠. 지금 여기에서 앉아서 마음이 저 미국에서 “스님, 이러이러한데요, 오시겠어요?” “알았다, 오바.” 하하하. “오시겠어요?” 하고 “오바.” 하면 여기서 “알았다.” 하고 “오바.” 해서 그냥 그 찰나찰나예요!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체가 없는 모습인 까닭이죠. “알았다.” 이거는 (가슴을 가리키시며) 방편이다 이겁니다. 그 방편이 있는 반면에 진실이 있고 진실한 참이 거기에 있다. 그래서 부처의 도량은 아주 그냥 이 허공 안에 꽉 찼는데, 여러분도 여기 지금 이 몸이 부처의 도량이거든요. 한 도량이거든요. 그리고 몰아서 보면 지구가 한 도량이고, 또 몰아서 보면 그냥 우주 전체가 한 도량이고요. 그러니 그 ‘오바’ 하는 거는 방편이지마는 ‘알았다’ 하는 것도 ‘오바’나 똑같은 얘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멀고 가까움이 없이 행한다. 여러분도 그렇게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내가 그렇게 따라 쓸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내가, 그거 중생이 뭐 그렇게 할 수 있나?’이렇게 아주 믿지들을 않아요. 자기 부처를 자기가 믿지를 않고, 이론이 많고, 사연이 많고, 착이 많고, 또 그냥 한꺼번에 공부를 얼른 해버리려고 하죠. 얼른 해서 될 일입니까? 이게?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이렇게 체험하면서 돌아가야 되는 건데요.
그게 점수(漸修)입니다, 점수!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게 돈오(頓悟)라면 이 세상에서 살고 느끼고 알고 배우고 나가는 게, 깨닫고 나가는 게 그게 점수죠. 그래서 돈오와 점수는 둘이 아닌 반면에 알게 되면 바로 돈수(頓修)가 된다. 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나중엔 합해진다. 돈오와 점수가 둘이 아니게 합해진다 이런 거죠.
하여튼 공부 잘 하세요. 부산을 가는 길이라면 한 대구쯤 갔다면 이리로 가는 게 빠르냐, 저리로 가는 게 빠르냐 이런 생각도 들겠지만 길을 가는데 틀림없는 이 길이라는 걸 믿지 않아요? 믿죠? 믿으니깐, 그 믿는 마음으로 딴 거를 또 해보세요, 자연스럽게. 예.
질문자3(남): 감사합니다.
큰스님: 그 공부할 땐 뭐 별의별 걸, 똑같은 방편은 없어요. 자기 나름대로, 여북하면 부처님을 찾는데 “야! 과거에 살던 이놈아! 영원한 친구야 이놈아!” 이렇게도 찾는 사람이 있고요, 친근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또 사실이니까요. 자기 전 조상이니까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별 이름을 다 부르고 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건 이름이니까요. 진실만 똑같으면 되죠.
질문자4(여): 스님, 만나뵙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대전지원 청년회에서 왔습니다. 제가 질문 드리고 싶은 거는요, 정말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지금 사람 몸에 이르기까지 계속 나고 죽고 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이 자리까지 정말 귀중한 생명을 얻어서 오게 됐다고 하셨는데요, 그럼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그것이 무엇인지, 또 그렇게 변하면서도 뭔가 찾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말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큰스님: 지금 어떻게 표현을 할까? 저 콩나무로 표현을 할까? 콩이 말이야, 콩씨가 있어서 땅에다 심었더니 콩싹이 났어. 뿌리로 화해가지고 싹이 났다고요. 싹이 났는데 그 싹이 그 뿌리에 의지를 해야지, 그렇지? 뿌리에 의지를 해야 싹이 잘 되지? 그리고 또 콩씨가 열리지? 콩꽃이 피고.
그럼으로써 또 콩나무가 자기 내년을 기약한다는 생각도 없이 영원히 지속해서 이어가는 거야. 그 생각도 없는데 자연스럽게 그냥 자연적으로 그렇게 이어가게 돼 있단 얘기야. 그러면 자기 뿌리는 자기 싹을 위하고 자기 싹은 자기 뿌리를 연상하고, 즉 붙들고 믿고 나가야지. 그런데 그 콩이 말이야, 뿌리로 화했는데 그게 무슨 콩이냐고 그럴 거냐 이거야. 그래서 무슨 콩이냐고 한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찾으려고 아무리 뿌리를 헤쳐봐도 콩이 없더란 얘기죠.
여러분이 아무리 과거로 돌아가서 콩씨를 찾으려고 그래도 콩씨는 없고 자기 몸에, 즉 콩나무 안에 콩씨가 있다 이런 거지요. 그러니까 콩씨가 아직 안 열린 콩나무는 콩씨가 잘 되게 꽃이 피고 콩씨가 열리게끔 뿌리에게 거름을 줘라. 이런 거는 뭐냐 하면 모든 거를 믿고 거기에 의지하면 콩나무는 거름이 된다. 그 마음이 말이에요. 거름이 돼서 그 콩나무를 푸르게 만들고 꽃 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고 그 나무에서 무르익게 하고, 그래서 모든 만민을 또 먹이게 하고, 되남게 하고, 되남아서 또 심어서 또 먹이게 하고, 그러니까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러하다 이거야.
새들도 뭐 자기가 꼭 그렇게 해야만 된다 이런 것도 없이,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려고 애를 쓰고 주워다 먹이느라고 애를 쓰고, 그러다가도 누구한테 알을 뺏기면 속수무책으로 그냥 쳐다보고 울고 서 있게 되는 거죠. 우리도 자식을 기르다가 어쩌다가 그냥 보이지 않는 데서 만약에 채갈 때 그냥 누가 채가는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수밖에는 없지. 어떡해요? 보이는 사람이 때려서 죽였다면 그냥 사생결단을 하지만 보이지 않는 데서 채가는 거는 어쩔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이 공부, 마음공부를 해야지, 사는 날까지는 꼭 편안하게 살게끔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콩씨가 다 여물어 심을 수 있게끔 된 연에 콩깍지가 벗겨져야지 정상인 거거든요. 그러니깐 인간도 그렇게 되게끔 하기 위해서 사는 날까지 꼭 틀림없이 편안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그 나무를 정상적으로 기르려면 이 도리를 알아야 한다 이겁니다. 새알 잊어버리듯이 자식들도 잊어버리고 새 새끼가 죽거나 또 채가고 먹히듯이 그렇게 당하고 살지 않으려면 이 도리를 알아야만 되는 거죠. 새 새끼만 그런 게 아니죠. 그렇게 강하게 스스로 자기가 해결해야 될 문제를 즉, 소임을 꼭 해야 지키고 간다 이겁니다.
연어나 뭐 뱀 새끼나, 뭐 뱀도 여러 종류지마는 종류대로 자기 몸을 희생해서 새끼를 살려서, 즉 말하자면 자기 몸이 아니라 자기 자식이 자기 몸이라고 생각하는 짐승은 다 자기가 희생하고 들어가요. 자기 껍데기 즉, 옷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딱 자기 새옷을 많이 내놓고는 자기 헌옷은 그냥 죽어버리는 거 즉, 부모가 죽어버리는 거 이런 거 있지요? 껍데기를 벗고선 또 새 알맹이가 나오고 말이야. 또 다른 벌레가 또 다른 벌레로다가 진화하고 이러는 거 많이 보지 않아? 그러면 인간도 역시 그렇다는 걸 알아야 돼. 마음이 차원에 의해서 바꿔짐으로써 모습도 바꿔져요. 현재 모든 사람들이 그걸 몰라서 그렇지 내 체질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야.
그래서 애 낳는 사람이 ‘순산하게 해주십시오.’그랬는데 순산치 못하게 될 때는, 즉 말하자면 거꾸로 있거나 뭐 잘못됐거나, 태반이 기울어졌다거나 이런다면 벌써 거기다가 관하면 그 태반도 올바로 세워지고 또 거꾸로 있던 아이도 바로 세워지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이거야. 그 속에 소임 맡은 공장에서들 다 너 나 할 거 없이 통신이 정수에서, 대뇌에서 사대(四大)로 통신이 가면 다 그렇게 작용을 해주게 돼 있다 이거야. 그렇기 때문에 진실하게 믿고 진실하게 해야만 대뇌로 통신이 된단 얘기야.
이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그냥 무턱대고 생긴 인간이 아냐! 이것도 과학적이고 이것도 컴퓨터가 벌써 자동적인 컴퓨터가 머리 위에 달려 있어요. 대뇌가 인간 컴퓨터야. 오신통이라고 하는 바로 머리의 누진(漏盡)에서 가지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자동 컴퓨터거든요.
그러니까 입력된 거를 지울 수도 있고 입력된 거를 입력된 대로 나오게 할 수도 있는 게 바로 누진이에요. 컴퓨터를 만지는 주인이다 이 소리입니다.
질문자4(여): 스님, 정말 감사합니다.
큰스님: 그렇게 하면서도 아리송하지? 하하하. 그저 잘못되든지 잘되든지 내가 떡 그릇에 들어가보고, 그냥 아무 데라도 들어가보고 그걸 체험을 하고 들어가야 돼.
질문자5(남): 저는 광주지원에서 왔습니다. 저는 작년 5월 18일 고혈압으로 인해서 중풍에 끄달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걷지도 못했고 그런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큰스님 덕분으로 이 법당에 걸어와서 큰스님 법문을 받들게 된 것은 다 큰스님의 법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동안에 주인공에게 믿고, 놓고 공부를 많이 해왔습니다만, 현재 왼손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께서 마음 많이 내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그런데 딴 사람들 같으면 이건 의사가 하나만 잘 고쳐놔도 아주 싱그럽고 좋아서 모두 야단들이죠, 신기하고. 그렇지만 이거는 본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신기하고 좋고 ‘내가 이렇게 했다.’ 이런 게 없어요. 왜냐하면 이 몸뚱이 하나의 개체를 놓고 볼 때에 내가 꼬집어서 내가 했다는 게 어딨습니까? 네? 더불어 그냥 꽉 찼는데요. 그러니 서로 더불어 했으니까 누가 했다, 이게 했다, 저게 했다 간장 공장에서 했다, 위 공장에서 했다, 콩팥 공장에서 했다 이렇게 할 수가 없죠. 전체가 다 움죽거린 거니까요.
그러니까 부처님이라면 부처님 아닌 게 부처님이죠. 어떤 거든지 다 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부처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니깐요. 그러니까 그 속의 의식들도 다 그 주인공하고, 다스리는 주인공하고 한 케이스가 돼서, 부처 중생이 둘이 아닌 한마음이 돼서 그렇게 작용을 해주기 때문에 그게 되는 거죠.
사회자: 질문이 이제 없습니다.
큰스님: 예. 본래 이 세상의 진리는 질문도 없고 질문 안 하는 것도 없고, 그냥 묵묵히 푸르고 묵묵히 흘러가고 묵묵히 화산이 일어나고, 묵묵히 일어나서 모든 사람들에게 과학 연구를 하게 만들고 재료가 되게 하고, 모두 그렇게 서로 돕고, 하다못해 개미 하나도 돕지 않는 게 없어요. 진딧물이 먹으면 풍뎅이 벌레가 와서 진딧물을 다 먹어치워 주거든요. 우리가 이 마음공부를 하면서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잘 활용만 한다면 모든 걸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얘기죠. 정말입니다. 이건 사실이니까요. 생활 속에서 그렇게 아주 편리하게 사시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위 법문은 1996년 6월 16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