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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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열반은 살아서 얻는 것
상식 벗어나는 ‘격외논리’로 진리의 본모습 설명
무한 에너지의 상징’문자’에 얽매지 말아야 이해

[원문]
해저연소녹포란(海底燕巢鹿抱卵)
화중주실어전다(火中蛛室魚煎茶)
차가소식수능식(此家消息誰能識)
백운서비월동주(白雲西飛月東走)
-송광사 화엄전

[번역]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다리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선해(禪解)]
인간이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느끼는 것은 ‘자성(自性)’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죽음을 앞두고서야 이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 살아 있을 때는 왜 이러한 깨달음을 일찍 얻지 못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분분한 의견이 있다. 인간은 원래부터 생각하는 존재인데 이것이 짐승과 다른 이유이다. 인간의 이러한 생각은 마음에서부터 흘러나온다. 이것이 바로 인간만이 가지는 고유한 능력이며 또한 한계(限界)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가진 ‘무지와 판단’ 이 두 가지의 명제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마음’이라는 존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바로 불교는 이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자살을 할 수 있는 이유도 ‘마음’의 존재 때문이다. 짐승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가 없다. 아니 생각하지도 못한다. 인간이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모색할 수 있는 것도 이 마음이라는 존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이를 다스리지 못하면 결국 ‘극단’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죽음을 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노무현 前 대통령뿐만 아니라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은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고통을 던져 주고 있다. 평생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원래 부처님 법에는 생사가 없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죽는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법에는 생사가 없으므로 내세관(來世觀)도 존재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부처님의 법은 어불성설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생각이 바로 대승(大乘)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생사가 없으므로 고통과 번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육근(六根)이라고 하는 ‘안이설비신의(眼耳舌鼻身義)’는 본래 청정하므로 또한 사대(四大) 역시 청정하다. 고로 우리의 몸은 나고 죽음이 없는 그곳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냥 본래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열반은 죽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얻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불교를 믿는 중생들은 결코 스스로 목숨은 끊는 어리석은 극단의 선택을 하여서는 안 된다.
오늘의 주련 여행은 송광사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로 알려져 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 가지 전설이 있다. 하나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하는데 산에 소나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원래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절이었다. 그 뒤 고려 인종 때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후 50여 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 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명종 27년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주련의 내용 속으로 들어가 보자. 화엄전에는 유명한 송광사화엄전화엄탱(松廣寺華嚴殿華嚴幀)이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그림으로, <화엄경>의 7처9회(七處九會)의 설법내용을 그린 변상도이다. 이 화엄탱은 기본구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구도상 상·하단 모두 법회장면이 거의 대칭을 이루며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짜임새 있는 구도와 더불어 황토색 바탕에 홍색과 녹색 및 금색을 사용하고, 각 회주인 보살형 노사나불의 영락에 고분법을 활용하여 장식함으로써 화면이 밝고 화려해지는 18세기 불화의 경향을 살필 수 있다. 한편 그림 아랫부분에는 보현보살이 대중들에게 비로자나불의 정토인 연화장세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화엄경> 39품 중의‘화장세계품’ 내용을 도해한 ‘연화장세계도’가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 그림에 대한 내력은 조선 영조 46년(1770)에 화련을 비롯한 12명의 승려화가들이 무등산 안심사에서 조성하여 이곳으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해저연소녹포란 화중주실어전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다리네.’
선문(禪文)을 이해하려면 우선 불교를 알아야 하고 선(禪)을 이해해야 한다. 불교는 직관적인 종교이다. 석가가 영산(靈山) 설법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迦葉)이 그 뜻을 알았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종지(宗旨)가 바로 불교이다. 이를 알아야만 선문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다 밑에는 제비집이 존재 할 수 없다. 하지만 불교의식의 바탕 안에는 분명히 바다 밑에 제비집이 존재한다. 또한 사슴이 알을 품고 불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다린다. 이것은 바로 형상이 없는 격외(格外)의 소식 다름 아니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불음(佛音)의 이치가 이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찰이며 깨달음이다.
‘차가소식수능식 백운서비월동주: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집안 소식이란 격외의 소식을 말한다. 바다 밑에 제비가 살고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있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무한의 힘을 가진 것이 바로 불교사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신비한 세상이듯이 불가의 뜻 또한 깊다. 그렇다. 자연은 늘 그 신비한 이치 속에 격외의 말씀을 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조계종 원로의원

■ 조계종 원로의원

2009-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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