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 종합 > 기사보기
19.반연하는 생각을 쉬어라
[원문]
佛無持犯 心性本空 亦非垢淨諸法 無修無證 無因無果 佛不持戒 佛不犯戒 佛不修善 佛不造惡 佛不精進 佛不懈怠 佛是無作人 但有住着心見 佛卽不許也 佛不是佛 莫作佛解 若不見此義 一切時中 一切處所 皆是不了本心 若不見性 一切時中 擬作無作想 是大罪人 是癡人 落無記空中 昏昏如醉人 不辨好惡 若擬修無作法 先須見性然後 息緣慮.
부처란 지키는 것도 없고 범하는 것도 없으며, 심성이 본래 공하여 더럽거나 깨끗한 것이 아니므로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으며,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느니라. 부처는 계율을 지니지도 아니하고 범하지도 아니하며, 선을 닦지도 않고 악을 짓지도 아니하며, 정진을 하지도 아니하며 게으르지도 않으니,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니라. 무엇에라도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부처라 할 수 없느니라. 부처라 하면 부처가 아니니 부처라는 견해를 가지지 말지니라. 이 뜻을 알지 못하면 언제 어디서나 본심을 알 수가 없느니라. 자기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 언제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생각만 하고 있으면 큰 죄인이고 어리석은 사람이라서 무기공(無記空)에 빠지며 술취한 사람처럼 캄캄하여서 좋고 나쁨을 가리지 못하리라. 만일 ‘무위의 법’(無作法)을 닦으려 하거든 우선 견성한 뒤에 반연하는 생각을 쉴지니라.

[해설]
달마 대사께서는 ‘한 마음이나 한 작용이나 한 생각이나 한 소견에라도 집착을 하면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반야자리에 마음을 두면 어떤 생각이 들 수도 없고 어떤 것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혜능 스님께서도 <금강경>에 ‘응당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써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구절을 듣고 눈을 떴던 것입니다. 우리가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마음을 쓰면 그것이 곧 부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곧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얻었다는 생각이 든 것도 실제로 얻은 것이 아니고, 깨달았다고 생각을 해도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표현을 할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두고 달마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부처란 심성이 본래 공하여 더럽거나 깨끗한 것이 아니므로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으며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느니라.’
바로 반야자리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 마음을 둔다고 하면 우리가 별도로 무엇을 한다는 생각, 계율을 지켜야 된다는 생각, 어떤 것도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相) 무념(無念) 무주(無住) 즉 부처님 자리에 마음을 둔 도인들은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비가 오면 오는대로, 물이 흘러 가는대로 끄달려 가지 않는 무애행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성품자리는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는 자리로, 억겁 전이나 억겁 후나 항상 그 자리이니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고, 선도 악도 끊어진 자리로 돌아간 부처님 경지를 말합니다.
이는 그 어떤 생각도 일으킬 수 없는 반야의 자리에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정진을 하지도 아니하며 게으르지도 않으니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신 겁니다. 이 자리에 마음을 두고 경을 읽으면 모두 이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마음에 답답한 게 없어지는데, 이것을 모르면 답답한 일이죠.
그러나 ‘마음이 곧 부처다’ 라는 말을 잘못 이해해서, 내 마음이 부처인데 닦을 것이 있나 하는 자만심으로 닦지도 않고 스스로 부처라고 망언을 하는 자들을 큰 죄인이라 합니다. 본래가 부처라고 하는 것이지 성품을 보지 못한 이를 부처라 하지 않습니다. 성품을 보지 못하였다면 언어 이전의 자리에 마음을 두고 성성하게 깨어 있어야지 그렇지 않고 ‘본래 부처다, 마음이 부처다’ 하고만 있으면 무기공(無記空: 아무 생각도 없이 멍청한 상태)에 빠지며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만약 무작(無爲)의 법을 닦으려 하면 먼저 자기의 본성을 본 후에 어떤 대상에 대해 일어나는 마음을 쉬어야 하느니라.’
이것은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를 ‘유위(有爲)’라고 하고, 형상이 없는 세계를 ‘무위’, 즉 반야의 자리라 이야기 합니다. ‘만약 무위의 법을 닦으려면 먼저 자기의 본성을 본 후에 어떤 대상에 대해 일어나는 마음을 쉬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유위의 존재는 인연에 의해 잠시 형상으로 느낄 뿐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조단경>에선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라는 말로 이를 표현하셨습니다. 즉, ‘일상삼매’란 우주를 하나로 보는 견해를 말하며 ‘일행삼매’란 하나에 마음을 두고 끊임없이 정진함을 말합니다. 과거의 습(習)을 녹이는 정진을 통해 경계에 끄달려 가지 않는 무념(無念)의 경지에 도달해야 마음을 쉴 수 있을 것입니다.
■ 청주 혜은사 주지

''달마절로도강(達磨折蘆渡江) 도''(김홍도 작).
2009-06-10
 
 
   
   
2024. 11.2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