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날도 궂고 또 이 도량도 좁은데 이렇게 같이 한자리를 하게 돼서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살이가 상당히 복잡합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우리 인생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화가 나면 살얼음을 지나가면서 모닥불을 놓는 것과 같아서 얼음이 빨리 녹아서 내가 빠진단 말입니다. 빠지게 돼 있죠. 그런데도 그 살얼음판을 걸어가면서도 누가 이렇게 하느니 저렇게 하느니, 이거를 양쪽 탓을 하고 이것을 간섭하고 이렇게 가다보니깐 자기 갈 길을 못 가고 결국은 때에 따라서는 얼음이 녹아서 빠지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경향이 있죠.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어떠한 빌딩에 불이 났으면 나갈 구멍 찾을 생각뿐이지 다른 거는 도대체 생각이 안 날 겁니다. 이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것도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오직, 오직! 난 이날까지 오직이지 이런 거 저런 거 다 상관 안 했습니다. 돈? 몸? 먹고 사는 거? 친척? 뭐 어느 거를 막론해놓고 그 가운데 오직 그거뿐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그거는 아마 세세생생에 변치 않을 겁니다.
‘왜 우리 인생이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거를 부처님께서 제시했습니다. 제시하기를 “공(空)이 색(色)이고 색이 공이니라. 그러하니까 그대로 여여하니라.” 그렇게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헤아리질 못합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광대무변하고 영묘하니까 “네 육통 안에서 벗어나서 공기주머니 안을 벗어나야 되느니라.” 했는데도 불구하고 영 그 뜻을 헤아리질 못합니다.
그래서 업이 없다든가 고가 없다든가 이런 뜻은 무슨 까닭에 없다고 하느냐? 여러분이 평상시에 살아가시면서 보고 듣고, 말하고 만나고, 가고 오고, 가정에서 아버지가 됐다가 남편이 됐다가 이렇게 다단하게 바뀝니다. 보는 것도 고정된 게 없이 봤으면 그냥 훅 날아가고, 들었으면 훅 날아가고, 또 그것을 듣는다 하더라도 훅훅 그냥 날아갑니다. 날아간다는 언어도 붙지 않아야 되겠죠? 하지만 말을 하려니까 그렇습니다. 여기 올라오실 때도 뒷발자국 자체가 그냥 휙휙 가버린 거죠. 하나 떼어놓은 사이에 벌써 하나는 가버리고, 하나 떼어놓은 사이에 가버리고 그렇듯이, 보는 것도 그냥 그것만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 봐가지고 끝나면 다른 거 봐야 하고, 또 이거 들었으면 다른 거 들어야 하고 이렇게 연방 그러한 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거 잘 들으셔야 됩니다. 물론 상근기가 있고 중근기가 있고 하근기가 있겠죠. 하지만 근기를 따져서 같은 근기를 모아놓고만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상근기로 뛰어넘으려면 이 소릴 듣고 벗어나는 겁니다, 벗어나요 그냥! 그런데 그렇게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고 몸이 움죽거리는 것도 없고, 만나는 것도 없는데 무엇을 있다고 하랴? 어떤 거 할 때 내가 움죽거렸다고 하랴? 어떤 걸 봤을 때 내가 봤다고 하랴? 어떤 걸 들었을 때 내가 들었다고 하랴? 이렇기 때문에 고가 붙을 자리가 없어요. 고가 붙을 사이가 없다고요. 자리가 아니라 사이가 없다고요. 보고는 훌떡 가고 듣고는 훌떡 가고, 움죽거리곤 훌떡 가고 만나고 훌떡 가고, 하고 훌떡 가고 이러는데 그 사이에 고가 붙을 사이가 있어야 붙을 거 아닙니까? 그리고 붙을 자리가 있어야 붙을 거 아닙니까?
고가 붙을 자리가 없어서 고가 없다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이것 보고 말들 하고 저것 보고 말들 하고 이것 듣고 말하고, 말을 하되 누가 하지 말랬나요? 하되 하지 않으면서 해라 이거죠. 함이 없이 해라 이겁니다. 왜냐? 이 도리를 알면 함이 없이 하는 것이 된다 이겁니다. 함이 없이 사랑하라, 함이 없이 보시하라, 함이 없이 들어라, 함이 없이 책을 봐라, 함이 없이 공부하라. 왜 이런 말을 하는가를 여러분이 잘 아셔야 인간 세상 아닌 인간 세상으로 넘어서서 그 도리를 행하게 되는 거죠. 즉 무(無)의 세계에서 용무를 하면서 즉, 모든 것을 다 앎으로써 세세생생의 이 모든 것을 이끌고가면서, 지금 현재 세상도 버리지 않고 현재 몸도 버리지 않고 현재 생활도 버리지 않으면서도 모든 거를 다 버려서 다 얻을 수가 있고, 얻은 것을 다 베풀어줄 수 있게끔 만들어라 이겁니다.
여러분은 모습을 보고 말을 듣고 평가를 하는데 그렇게 평가를 해선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때에 따라선 벌레도 됐다가, 예를 들어서 벌레 속에 사람이 가면 벌레가 저항력을 느낍니다.
내가 예전에 요 소로길을 가다가 가재가 기어나오는데, 내가 거길 들어서니까 가재가 앞발을 딱 들고선 요러고 (양 손바닥을 펴 어깨 위로 들어 보이시며) 대항을 하고 있습디다. 그걸 보고 뭐를 느꼈느냐. ''아하,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가재를 건질 때는 내가 가재가 돼야 그 가재를 건질 수가 있다.'' 하는 그 말씀이 탁 떠오르는 겁니다. 그러니 헤아릴 수 없는 천차만별의 모습들과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중생의 마음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겠느냐? 부처님께서는 속의 그 의식들이 마음을 자꾸 자아내서 자꾸 자기한테 해롭게 하고 즐겁게 하고 화나게 하고, 일거수일투족 다 이렇게 하는 거를 속아서, 자기한테서 나오는 줄 알고 속아서 그대로 자기가 한다고 느낀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느끼는 대로, 그렇게 했다는 거를 느끼는 대로 자기는 그대로 생활을 하게 돼 있죠.
그래서 ‘고가 없다’ 이러는 거, 그렇게 찰나찰나 화해서 모두 이렇게 물 흘러가듯 뜬구름 흩어지듯 하고 그러는데 무엇을 잡고서 내가 이것이 어떠니 저것이 어떠니 하느냐. 구름을 잡는 거와 같고 물 한 주먹 잡는 거와 같은데 그것을 뭣 때문에 자꾸 붙잡겠다고 애를 쓰느냐. 그러니깐 고에서 허덕인다. 한생각이 능수하고 지혜롭다면 뛰어넘는다. 왜?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그냥 하나하나 일거수일투족 다 화해서 가버리니까요. 자기조차도 몸 안의 모든 중생들과 더불어 같이 살고 있으면서 공해서 돌아가고, 바깥에서도 공해서 돌아가고, 나와 더불어 같이 모두가 공해서 돌아가는데 거기 병 붙을 자리가 어딨으며, 고가 붙을 자리가 어딨으며, 업이 붙을 자리가 어딨으며, 괴로움이 붙을 자리가 어딨으며, 즐거움이 붙을 자리가 어딨겠습니까?
다만, 그래서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 탤런트가 영화를 하다가 영화가 막이 내리면 그뿐이듯이 인생도 그러하다. 그러니까 다만 오직 자기 중심, 심봉처를 의지해라. 의지하고 돌아가라. 의지하고 돌아가라. 하도 바람에 프로펠러가 돌아가듯 인생살이가 돌아가니까 가운데 중심, 그걸 쥐고선 바퀴가 돌아가듯이 심봉을 쥐고서, 심봉은 끄떡도 안 하고 힘을 배출하기 때문에 그 힘을 바로잡고서 인생이 돌아가는 거죠. 그래서 거기에선 이유가 붙지 않습니다. 잘하고 못하고, 못나고 잘나고, 여자고 남자고, 낮고 높고, 잘살고 못살고 이걸 떠나서, 오직 내 심봉을 딱 쥐고서 그대로 흘러가듯이 돌아갑니다. 이 심봉을 의지한다면 바퀴가 이탈되지 않으니깐요. 이 심봉이라는 건 반야줄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자기 주처라고도 할 수 있고, 자아라고도 할 수 있고 불성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자부처라고도 할 수 있고, 여러 가지로 이름이 다양합니다. 다만 그 의지처만 의지하면서 오직 내가 함이 없이 하면서 돌아간다면 여러분이 한 찰나에 그냥 그대로, 그대로 자연스럽게 여여하게 사는 겁니다. 여여한 삶의 보람을 갖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도 아리송하시죠? 이렇게 말씀을 해드려도 아리송하시죠? 한 가질 보면 열 가질 안다고 우리가 현재의 살림살이를 그렇게 하고 사시면서도 왜 아리송합니까?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그냥 화해서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는 거를 느끼고 알고 하면서, 왜 그게 아리송하냐 이겁니다. 그 생각 하나만 ''아, 이렇구나! 이러니까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하고 탁 놓는다면 그냥 그냥 그대로입니다. 찰나입니다, 그냥!
부처님이 나를 깨치게 해서 올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여러분한테 행복을 갖다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빼앗아 가는 것도 없습니다. 내가 업이 많아서 누가 빼앗아 가는 것도 없습니다. 빼앗아 갈 사이가 있어야죠? 그리고 갖다 줄 사이도 없단 말입니다. 자기가 그대로 그냥 그냥 하는 대로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보는 대로 날아가고, 하는 대로 날아가고, 듣는 대로 날아가고, 도무지 내가 했다 내가 안 했다 할 수가 없게끔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