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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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과장된 자존심 버려야
멀미나는 계절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에 망연자실 한국사회가 깊은 암울함 속으로 추락하고 있는 가운데, 북녘에서 울린 핵의 진앙이 한반도를 다시 한 번 전율케 하고 있다. 여기에 이어진 크고 작은 북한의 로켓 화력 시위와 선전포고를 방불케 하는 엄포성 언어 도발, 서해에 일촉즉발 감돌고 있는 긴장감, 북한의 ‘악행’을 둘러싼 외교적 비난, 응징에서 핵무장론까지 무성한 핵 언설들이 들끓고 있다. ‘핵’이라는 아슬아슬한 물건을 놓고 벌어지는 아찔한 ‘욕망’들의 과속 질주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 현기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핵은 북한 김정일 정권에게는 주술적인 힘을 부여하는 측면이 있다. 국제적 지탄에도 불구하고 핵이 ‘강성대국의 여명’을 알리는 알레고리로 확고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핵실험은 일종의 정치적 제의(祭儀)와도 같다. 북한이 안고 있는 내외부적인 공포를 핵으로 응축하여 사회질서를 재강화하고 대외적으로 자신이 지닌 호전성을 극대화하여 약점을 최소화하려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제의는 선과 악을 가르고 내부의 순수와 외부의 적을 대비시킴으로써 권력이 의도하는 질서에 대한 강한 집착을 함축한다. 핵이 물리적 힘 이상의 강렬한 정치적 상징과 통합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핵은 남과 북이 서로를 살해할 수 있는 ‘거대한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사실 상대를 적대적으로 타자화하면서 자기강화의 자양분을 얻는 분단체제의 속성상 ‘핵’은 그런 적대적 타자화를 보다 강화하고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몰아 갈 수 있다. 또한 그것은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권리’를 근본적으로 박탈한다는 점에서 가장 치명적인 인권 유린이기도 하다. 또한 북한 핵을 필두로 동북아시아 전반에 파급될 핵이라는 존재의 대연쇄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핵’이라는 죽음의 우산 속에 삶을 영위한다는 비극적 존재감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 정부는 그런 융통성과 지혜를 구사하는 데서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 ‘핵’의 자위력에 필사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체제의 불안한 심리 상태의 상당 부분은 과장된 ‘자존심’의 표현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상대가 대화의 테이블로 나올 수 있는 명분을 갖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훌륭한 외교적 전술이다. 직진성이 강한 외교 어법보다 융통성과 대화 명분을 담은 은유의 수사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체제를 이해하는 분석적 차원, 지난 10년간 축적된 화해와 협력의 경험적 차원, 그들의 심리적 상태를 해석해 내는 해석적 차원에서 실기를 거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이 자신의 상투를 잡고 늪으로부터 스스로를 끌어 낼 가능성은 많지 않다. 대결에 필요한 연장들을 만지작거리며 냉전시대에나 어울릴법한 낡은 냉전의 대결적 품목들을 다시금 꺼내들기보다는 현 정부의 대북 인식과 접근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재성찰과 전환이 필요하다. 불안스런 타자(북한)의 거취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신뢰할 수 없는 타자로 자리매김할수록 우리 내부의 공포도 커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멸조의 비난이나 규탄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야기를 하도록 하는 공감적 태도가 필요하다. 따라서 모든 북한의 발언을 기만적인 요설들로 치부할 것만은 아니다. 멀미의 어지러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과속하는 차를 속도 조절해야 한다. 현기증 나는 과속은 유지한 채 임시방편의 멀미약 처방으로 가라앉힐 일이 아니다. 또한 이런 위기를 정략적으로 소비하려는 방식도 옳지 않다. 그래서 보다 전향적인 차원에서 대북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

홍 민
동국대 북한학과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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