뿐만 아니라 사람에 이르기까지 생명이라는 것은 불(佛)이라고 말했죠.
그래서 불살생계를 말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남을 죽이면 꼭 내가 죽는다 이런 법이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남을 해하면 내가 해해진다. 이게 질서정연한 진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음으로 더불어 사는 그런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알게 되고 그렇게 하려면 바로 공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몸뚱이 하나 속에도 헤아릴 수 없는 생명체들과 의식과 모습이 있습니다. 그 모습과 의식이, 생명이 어째서 내가 아니겠습니까. 다 나와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 물 한 컵을 먹고 빵 하나를 먹어도 같이 먹는 것이고 잠을 자도 같이 자는 것이고 또 움죽거리는 것도 같이 공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체고요. 그리고 공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를 내 생명과 같이 사랑하라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직업이나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하는 문제가 있죠? 그럴 땐 항상 관하고 하십시오. 관하고 하시게 되면 그 살은 약이 되고 그 혼은, 즉 말하자면 환생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도리를 모르면 진짜 살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관하고 하십시오.
동생이 툭하면 손을 벌려요
운? 스님, 제가 맏딸이고,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결혼해서 각각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살림이 어려워지면 자기가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툭하면 제게 손을 내미는 겁니다. 몇 번은 그냥 도와줬는데 너무 제게만 의지하니 너무 속이 상하고 답답합니다. 동생이라 모른 척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도와주면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걱정입니다.
답? 여러분은 여러분의 고귀한 생명과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마음을 착잡하게, 또는 어둡게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모습만 바꿀 뿐이지, 우리의 이 삶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하기 때문에 영원히 남한테 얻으러 다니지 않고, 영원히 남한테 짓밟히지 않고, 영원히 담 밑에 돌아가면서 눈물을 흘리고 남한테 짓밟히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바로 올바로 진실하게, 남을 주더라도 무주상 보시로서 주어야, 내가 준다는 상(相)을 두지 않고 주어야 합니다. 상을 두지 않는 그 물건이 바로 나한테 다 있는 것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그것도 한 통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여기 와서 설법을 한 서너 번 들었답니다. 근데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맏이로서 동생 일곱을 다 키웠답니다. 밥 장사를 하고 물 장사를 해서 말입니다. 그랬는데 그 키워 놓은 동생들이 언니는 그 고생을 해서 동생들을 공부시키느라고 공부도 못하고 그렇게 했건만 그렇게 고생하고 자기네들을 공부시킨 걸 모르고, 그것이 피 나오는 핏방울인 줄 모르고 자기네들은 아무렇게나 구경 다닐 것 다 다니고 없으면 손을 벌린답니다.
그래서 동생들은 그렇게 자기처럼 고생하지 않고 잘 공부해서 짝들 만나서 잘사는데도 때에 따라선 조금만 부족하면 와서 막 압박을 하고, 언니는 그렇게 벌어서 쓰면서 왜 주지 않느냐고 그런답니다. 그래서 ‘사람이 올바로 그 뜻을 알고 나간다면 좋겠는데….’ 하고 아주 괴로워했답니다. 그런데 내 설법을 듣고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얘, 쟤가 쓰는 것이 바로 부처가 쓰는 거고, 저 애가 바로 나이기 때문에 내가 쓰는 거니까 그냥 내가 써 보자.’ 하고서 자기도 없는데, 장사를 하기 때문에 빚을 져 가면서 사는데도 ‘이것도 시주다.’ 하고선 집어 줬더랍니다. 주니까는 그렇게 마음이 편안하더랍니다. 그렇게 마음이 편안하다 보니까 그저 조그마한 거라도 또 뭐가 팔려서 고걸 메워 나갔답니다.
그랬다고 하면서 “너무도 고맙습니다. 내 마음을 이렇게 넓게, 부드럽게, 사랑할 수 있고 둘로 보지 않게 해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이날까지 그 불쌍한 동생들을 키워 왔건만 오늘날에 보니까는 내 동생이 언제 적의 내 동생도 아니고 내 동생 아닌 것도 아니고, 모두가 남들이 남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또 돈도 쓸 때 쓰는 것이지 그렇게도 내가 안 써야만 하겠다고 할 필요도 없고, 내가 타이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건만 왜 내가 그렇게 내 속을 썩여 가면서 그렇게 싸움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제 싸움 안 하렵니다.” 그러면서 고마워하더군요. 그러니 우리가 남을 주어서 쓰는 것도 자기가 쓰는 겁니다.
그러나 공자, 노자도 말씀하셨듯이 얻으러 온 사람도 주지 않을 사람은 주지 않아야 된다 했습니다. 그건 나도 똑같이 말합니다. 왜 그러냐? 그 뜻을 모르고,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함부로 하는 사람 앞에는, 남한테 기대기만 하는 사람, 이런 사람한테는 천만 냥을 보태 주어도 그건 온데간데가 없고, 오히려 반성하는 기간이 늦어져만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지 않는 것도 덕이 되고 공덕이 되고, 주는 것도 공덕이 되고, 모든 것이 공덕이 된다 하는 것은 우리가 이 한 점의 마음 여기에, 이 중심에 바로 부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체에 우리가, 만법의 만 부처가, 만 생활이 다 이 한 점의 마음에 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게 나고 들고 하는 것이 이 한 점에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그렇게 살펴서, 오관을 잘 살펴서, 내 한 점의 마음을 알아야 오관으로서 모든 걸 해 나가는 데 정밀하게 해 나갈 수 있는 거지만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 할지라도 올바로 진실을 안다면 그게 바로 깨달음의 길입니다.
그러니 나부터 진실하고 나부터 알아야 모든 살림살이가 적당하고 소소영영하게 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이 돼 가지고 어렵다고 하면서 자기 뒷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지 않습니까. 내가 나기 이전을 알아야 내가 전에 살던 걸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고려시대도 있었고 고구려 시대도 있었어요. 몽고가 쳐들어올 때도 있었고, 또는 그 시절이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이 되기까지, 이런 공부를 할 수 있는 이 자리에 인연이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겪었겠습니까. 이렇게 인연이 닿은 것은 바로 그런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닿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히가 아닙니다. 절대 우연이라는 건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연에 관한 것도, 내 마음에서 올라오는 모든 것들도 진짜 나를 알게 하기 위한 거름인 줄을 알고 열심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이 생명이 생겨났는지요
운? 기독교에서는 이 모든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창조설을 주장합니다만 이 불교에서는 인연법에 의한 진화설을 주장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인연법에 따른다면 어떻게 이 생명이 생겨나고 존재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답? 이거는 내 생각일지도 모릅니다만, 여러분이 깊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아무것도 없었을 때, 암흑이라고 합시다. 암흑! 암흑에도 다 각각 제각기 놀았을 거다 이겁니다. 바람도 흙도 모두 뭉쳐서 돌아가질 않고 제각기 돌아갔다 이 소립니다. 그럼 제각기 흩어져서 돌아간다면 그냥 암흑이죠. 그러나 이것이 생명이 있는 겁니다, 다. 흙도 생명이 있는 거고 물도 생명이 있는 거고 모두가, 바람도 생명이 있는 거고 이 모두가 생명이 있는 겁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이 한데 합치니까 온기가 생기고 그 온기가 바로 불이니까, 암흑을 면하지 않았나 이렇게 봅니다.
암흑이 없어지고 광명시대가 오게 되는 것은 생명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미생물이라는 그 생명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미생물이 생겼는데, 공룡시대라든가 무슨 시대, 시대가 가고 인간 시대가 맨 나중에 닥쳐왔기 때문에 이 인간은 맨 나중에 났다 합니다. 우리가 수억겁 광년으로부터 쫓고 쫓기면서 진화돼서 이렇게 인간까지 올라왔을 때는 여러분의 각자 주인공이 그로부터 쭉 형성시켜 가면서, 진화시켜 가면서 이렇게 발전시켜 온 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자기 주인을 자기가 믿지를 않고, 자기 껍데기를 자기라고 하면서, 또 껍데기가 가지고 있는 걸 자기 거라고 하면서 온통 야단법석이죠.
그러니까 인연에 따라서, 즉 물의 인연, 흙의 인연, 바람의 인연, 이 인연이 한데 합쳐서, 즉 말하자면 흙과 물과 이렇게 한데 어울리면서 바람이 불어서 뭉치고 뭉치고 그러니까 이것이 또 온기가 생기고 생명이 생기고 이래서 광명을 이루지 않았나 이렇게 봅니다. 그런다면 그게 인연이죠, 다. 우리가 이 꽃도 봐 줄 인연이 없으면 어떻게 이게 꽃입니까? 물의 인연, 이 태양의 인연, 우리가 봐 주는 인연, 사 주는 인연 이 모두가 다 이렇게 인연들 아닙니까? 인연들로 인해서 이 꽃이 피고 아주 예쁘다고 이렇게 하지, 인연이 아니었더라면 뭐가 있습니까.
우리가 사장의 인연, 직원의 인연, 그런 게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발전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선생님의 인연 또는 생도의 인연, 이런 게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이 나라의 발전의 기둥이 되겠습니까? 인연에 따라서 모든 게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 인연 법칙이라는 것은 이게 상대성 원리로서 그건 필연적으로 된 법칙이며 이 인연들이 없다면 발전을 못합니다. 광명을 이룰 수도 없고 창조도 해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짐승들의 마음도 우리와 다르지 않아
운? 최근에 텔레비전에서 에니멀 커뮤니케이터, 하이디라는 사람이 동물들과 마음으로 교감하는 내용을 방영한 적이 있는데 저는 그 프로를 보면서 참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하찮게 여겼던 게 참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정말 짐승들의 마음도 우리 인간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님, 모든 생명들의 마음이 이렇게 다 똑같겠지요?
답? 그거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개미의 삶이나 어떠한 짐승의 삶이나 우리의 삶이 뭐 다른 게 있겠습니까? 우리가 짐승들이나 뭐 그런 생명들과 얽혀 있는 모든 문제들 그걸 다 얘기를 하려면 아주 얘기거리가 많죠. 우리가 참, 이렇게 알아서 음파를 통해서 같이 한마음으로서 동일하게 조화를 이룰 때 여러분이 한번 그 맛을 본다면, 기쁜 일도 있지만 너무나 슬픈 일도 많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픈 그 마음을 금할 수가 없이 될 때가 많습니다. 사람만이 그런 게 아니죠. 짐승들도 그렇고, 날아다니는 새들도 그렇고, 물에서 사는 것도 있고 또 저런 북극이나 남극 이런 데서 사는 동물들도 그렇고, 역시 식물들도 그렇습니다. 물속에서 사는 생명들이 있는가 하면, 또는 무정물이라든가 식물이 그렇게 천차만별로 돼 있고, 동물들도 천차만별로 돼 있습니다. 모든, 돌의 생명이든지 어떠한 거든지 물건이라면 생명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들이 천차만별로 그렇게 돼 있지만 인간의 그 살림살이와 그 도리가 어쩌면 그렇게 같은지 모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나 소나 그런 짐승들도 끌려가면 새끼들은 벌써 알고 그냥 우는 겁니다. 또 자식이 끌려가면 어미가 울고요. 야, 이건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이걸 보게 되면 가슴이 안 아플 수가 없어요. 이 가슴이 천 조각 만 조각 나죠. 어떠한 동물이나 식물들이라도 춥지 않은 게 어디 있으며, 마음이 어찌 없으며, 어찌 고통이 없겠습니까마는 여러분이 그거를 느끼지 못하고 생각도 안 해 봤기 때문에, 딴 데 쳐다볼 여지가 없이 살아나가시기 때문에 그런 거까지 생각을 안 해 봐서 모르시는 거뿐이지 그거를 한번 생각해 보신다면 우리 살림살이의 그 아픔이나 똑같습니다.
이 모두가, 부처님과 우리도 똑같습니다. 둘이 아니죠. 부처님의 몸도 둘이 아니요, 부처님의 마음도 둘이 아니요, 생명도 둘이 아니요. 저 미생물, 저 물에서 노는 고기, 들에서 노는 짐승, 허공에 날아다니는 새, 질척한 데서 사는 생명들, 이런 것도 둘이 아니란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도리를 알면 지렁이 하나도 스스로서 자기가 살면서 진화를 하게 돼 있어요. 모든 게 다 진화를 하고 형성되고 진화하고, 형성되고 이렇게 내려오면서 뜻을 자꾸자꾸 일깨워 자기를 자기가 알게 되는 겁니다. 모두 어느 거 하나 없이 다 건질 수 있는 게 바로 이 깨우침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모든 아픔과 더불어 같이 할 수 있는 그 문제는 바로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길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