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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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제10장 證果 ⑬
여래는 언사와 의리에 걸림이 없어

한 구절의 아미타불 염불하는 것도 ‘상적정’
염불하는 이치와 일 둘이지만 서로 자유자재

涅槃經廣辯百句解脫以釋大涅槃者 涅槃則止義 是約止以明果也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백 구절로 해탈을 광대하게 논변하여 대열반에 대해 풀이하였는데, 여기에서 열반은 그친다는 지(止)의 의미이다.
<열반경> 여래성품(如來性品) 제42에서 가섭보살이 세존께 정중히 대열반의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사 하고 간청하였더니 세존이 그를 위하여 광대하게 논변한 것이 백 구절이나 되었다. 이 백 구절은 각자 동일하지 않으나 대열반과 해탈의 진실한 의미를 환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이것은 문자가 지나치게 번거로워 모두 다 기술하지 못하고 여기에서는 간략히 한두 가지만 수록하여 참구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
<열반경>에서 세존은 가섭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남자야, 진실한 해탈은 일체 번뇌속박을 멀리 여윈다고 말한다. 진실한 해탈은 모든 법에 대한 속박을 여위었기 때문에 일어남도 없고 화합도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화합하여 자식이 태어나지만 진실한 해탈은 이와 같지 않다. 따라서 진실한 해탈을 불생(不生)이라고 말한다. 가섭아, 비유하면 최고의 버터인 제호(醍?)의 성질이 청정하듯 여래도 역시 그러하여 부모가 화합하는 것으로 인해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성질이 청정하다. 그런데도 부모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은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려 했기 때문이다. 가섭아, 마땅히 알아야 될 것은 진실한 해탈이 바로 여래이며 여래와 해탈은 둘도 없고 차별도 없다는 점이다. 이를 비유하면 봄날에 종자가 따뜻한 기운을 만나면 바로 싹이 터서 출생하지만 진실한 해탈은 이와 같지 않다.”
또 말하기를 “진실한 해탈은 모든 탐욕과 일체 분별상과 일체 속박과 일체 번뇌와 일체 생사와 일체 인연과 일체 과보를 끊는 것이며, 이것을 여래라고 한다. 따라서 여래가 바로 열반이다. 일체 중생은 생사에 대해서 공포의 두려움을 느끼는데 그 이유는 번뇌 때문이다. 따라서 삼귀의를 해야만 한다. 이는 마치 한 무리의 사슴이 사냥꾼을 두려워하다가 사냥꾼을 멀리 떠난 상태에서 한번 팔짝 뛰어넘으면 삼보에 한번 귀의하는 것이 되며, 세 번 뛰어넘으면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되는데, 이처럼 사슴들이 세 번 뛰어넘었기 때문에 안락을 얻게 된다. 중생도 그러하여 마군과 악한 번뇌를 두려워하므로 삼귀의를 해야 한다. 삼귀의를 하기 때문에 안락을 얻게 되는데, 안락을 받는 자가 바로 진실한 해탈을 얻으며 진실한 해탈이 바로 여래다. 여래는 바로 열반이며, 열반은 다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것이 불성이며, 불성이 바로 결정이며, 결정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라고 하였다.
여래가 비록 언사에 걸림이 없고 의리에도 걸림이 없어 이 두 가지의 오묘한 변론으로 답변하여 열반을 백 구절로 풀이했으나 최후엔 대열반과 해탈의 진실한 말은 끝까지 다 하지 못하고 단지 그 의미만을 취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대열반과 해탈을 백 구절로 논변하기에는 실로 부족함이 많다.
열반을 ‘지(止)’자로 요약하여 깨달음의 과보를 밝혔는데, 열(涅)은 불생을 의미하고 반(槃)은 불멸을 의미한다. 불생불멸이 바로 ‘지’이며 ‘지’가 바로 선정의 의미이다. 따라서 선정을 일으키는 ‘지’로서 깨달음의 극치인 과보를 밝힌 것이다.

故云 大般涅槃名常寂定 定者卽是止義 法華經中雖約觀明果 則攝於止 故云 乃至究竟涅槃常寂滅相 終歸於空 涅槃中雖約止明果 則攝於觀 故以三德爲大涅槃 此二大經雖復文言出沒不同 莫不皆約止觀二門辨其究竟 ?據定慧兩法以明極果

“대열반은 항상 고요한 삼매”라고 명칭한다. 삼매는 바로 ‘지’의 의미이다.
<법화경>에서 ‘관’의 편에서 ‘과’를 밝혔다면 ‘지’를 포섭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구경열반상적멸상이 끝내는 공으로 귀결된다”라고 하였다.
<열반경>에서 ‘지’의 편에서 ‘과’를 밝혔다면 ‘관’을 포섭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삼덕을 대열반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 경전에서 비록 문자언어가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 동일하지 않다 할지라도 지와 관 두 수행문의 편에서 최후를 논변한 것이며 아울러 정혜 두 가지 법에 의거해서 극치의 과보에 대해 밝힌 것이다.

열반이라는 두 글자는 간략하게 호칭한 것이며 갖추어 말하면 반열반라(槃涅槃那)인이다. 대열반은 마하반열반라이며 ‘대(大)’는 마하이다. 이를 번역하면 대멸도(大滅度)인데, 최후까지 불생불멸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항상 고요한 삼매, 즉 상적정(常寂定)이라고 명칭하는 까닭은 소승교 가운데도 불생불멸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소승은 열반을 상적정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생사를 벗어났다 해도 반쯤만 끝냈고 번뇌를 끊었다 해도 반쯤만 끊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대승에서는 분단생사와 변역생사를 건너서 지말번뇌와 근본번뇌까지 소멸하였다.
여러분이 알아야 될 것은 한 구절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도 상적정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염불하는 이치와 염불하는 일은 둘이지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理)와 사(事) 사이에서 혼란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은 종일토록 전도된 망상 속에 있다. 그러므로 생멸이 없는 열반 속에서 허망하게 생멸을 보는 것은 마치 눈을 손으로 누르면 본래 없던 허공 꽃이 보이듯 항상 적정하지 못하다.
그러나 아미타불 한 구절의 명호를 가지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극히 염불한다면 삼계 내 범부의 견혹과 사혹에 요동하지 않고, 출세간 소승의 진사무명(塵沙無明)에도 요동하지 않는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위없는 반열반은 최후까지 항상 고요한 삼매이며, 이것이 바로 한 구절 아미타불이라는 점이다.
열반에서 삼매를 말한 까닭은 삼매가 바로 ‘지’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는 세존께서 은근하게 수행방편을 칭찬하면서 ‘관’의 편에서 깨달음의 과보를 밝혔는데, 이는 ‘관’속에 지수행을 포섭하고 있다.
또 “구경열반에 이르면 항상 적멸하기 때문에 끝내 공의 이치로 귀결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은 관수행 속에 지수행을 동시에 갖추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 이유는 최후 열반이 바로 ‘지’이고 상적멸상도 ‘지’이며 끝내 공으로 귀결하는 것도 역시 ‘지’에 소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수행 속에 지수행을 동시에 갖추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열반경>에선 해탈의 측면에서 지수행으로 과보를 밝혔으나 이는 단지 지수행 속에 이미 관수행을 동시에 포섭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삼덕(三德)으로 대열반을 삼는다.
열반에는 세 종류가 있다. 원정열반(圓淨涅槃)은 반야의 덕이고, 방편정열반(方便淨涅槃)은 해탈덕이며, 성정열반(性淨涅槃)은 법신덕이다. 이를 열반삼덕이라고 한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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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