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징 자
칼럼니스트
지옥과 업경대는 저승에 대한 전통적 사고 속 풍경 안에 함께 등장한다.
옛날 사람들은 염라대왕이 있는 지옥을 어느 정도 믿으면서 대왕 앞에 놓여 있다는 업경대라는 거울 역시 신비의 어떤 한 물건 정도로 믿고 있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어떨까?
과학을 믿는 현대인들은 지옥은 ‘설마 그런 것이.......’ 하면서도 업경대라는 존재의 가능성은 옛 사람들보다 확신을 가지고 믿을 수 있을지 모른다. 과학 덕분이다.
과학은 지금 이승에서도 개개인의 언행을 기억해 남기기 시작했다. 하물며 무소불위의 저승 세계 주인이야 무엇인들 못할 것인가.
현대인들의 이승에서의 삶의 흔적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몸속에 살면서 우리 행위의 잘 잘못을 낱낱이 살피다가 경신(庚申)날 우리가 잠들면 몰래 하늘로 올라가 천제에게 이를 고해바친다는 도교의 삼시(三尸)라는 벌레가 아니라, 돌이나 모래에서 채취한 규소라는 것으로 만든 반도체라는 것이다. 기억을 하는 것이 생물이 아니라 업경대와 같은 무생물이다.
도시의 길거리마다, 대형 빌딩마다, 아파트 단지, 주택가의 골목길에도 CCTV라는 것이 깔려있어 사람들의 행적이 기록된다.
생활환경의 유비쿼터스화는 편리함이라는 유혹으로 개인의 활동 하나하나를 기억하도록 설계돼 가고 있다. 이승에서의 업경대는 이렇게 진화해 가고 있다. 유전자라는 것도 이승의 미래 ‘업경대’를 업그레이드 해 가고 있다.
이러니 현대인들이 업경대 존재 가능성을 어떻게 의심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옥의 존재는 믿지 않고 업경대의 존재 가능성을 믿게 되는 현대인들은 옛 사람들과 어떻게 달라지고 있을까.
사람들에게는 드러내고 싶지 않는 원초적 욕망이라든가 대단한 비밀이 아니더라도 세상에 숨기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것이 발가벗겨지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벗어도 좋다는 쪽으로 나가게 될는지 모른다.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이 드러나더라도 뭐가 부끄럽겠는가? 누구나 다 그런 것을........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그런 것의 변화에 앞장서고 있다. 지옥은 없고 업경대는 진화해 간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모습을 인터넷이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요즘은 그 변화에 뒤질세라 공중파 방송들까지 ‘자신들의 본분이나 위치’마저 잊은 채 ‘날 것 그대로의 욕망들’, 패륜과 불륜과 흉악 범죄와 거짓말과 저질화 된 사회를 영상으로 만들어 다투어 우리들 안방으로 쏘아 보내고 있다. 사람들이 ‘보면 배우고 따라하게 되는 것’이 TV다.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만약 현대인들이 저승 염라대왕 앞에 있는 업경대 앞에 서서 ‘뭐가 죄업이란 말입니까? 약육강식, 욕망의 세계를 사는 인생이란 다 그런 것 아닌가요? 인생 공부 좀 하세요.’라고 대들지 말란 법도 없겠다.
문화나 문명은 인간 삶 안에 있는 무질서와 폭력·불안·공포·불편함 등을 줄이면서 품위 있고 안전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기위해 윤리나 도덕 종교와 함께 발전해 왔다. 여러 종교가 나름대로 내 놓은 ‘지옥’도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을 정제하려는 방편으로 탄생했을 것이다.
무질서와 폭력,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이 만들어 내는 패륜과 불륜자체가 지옥일진대 요즘 TV는 시청자들에게 그 지옥도를 보여주며 지옥이 이 땅에 현존함을 알려주려는 것일까?
삶의 품위를 위한 종교의 역할에 목마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