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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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마음은 안과 밖이 없다
[원문]
旣不辨白 憑何免生死 若見性卽是佛 不見性卽是衆生 若離衆生性 別有佛性可得者 佛今在何處 卽衆生性 卽是佛性也 性外無佛 佛卽是性 除此性外 無佛可得者 佛外無性可得.
흑백도 가릴 줄 모르면서 무엇에 의지하여 생사를 면하겠느냐. 자성을 보면 부처이고 자성을 보지 못하면 중생이니라. 중생의 성품을 떠나서 따로 부처의 성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부처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중생의 성품이 곧 부처의 성품이니라. 성품을 떠나서는 부처가 없느니라. 부처가 곧 성품이니 이 성품을 떠나서는 부처가 될 수 없고 부처를 떠나서는 성품을 얻을 수 없느니라.

[해설]
‘흑백도 가릴 줄 모르면서 무엇에 의지하여 생사를 면하겠느냐.’
이 말씀은 수행자가 정확하게 어디에 마음자리를 두고 정진하는 것인지를 몰랐을 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어디에 두고 정진을 해야 하겠습니까? 본래의 마음자리를 떠난 생각은 모두 번뇌이고, 생각하기 이전의 자리가 진짜 부처님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자리가 부처님임을 믿고 거기에 마음을 두고 화두를 들거나 또는 염불을 하는 것이 바로 성품에 마음을 두고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 이전의 자리에 의지를 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마음을 두고 정진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성을 보면 부처이고 자성을 보지 못하면 중생이니라.’
본래의 성품을 깨친다는 것은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는 생각하기 이전의 자리를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깨닫고 보면 쉬운 것이지만 모르면 어려운 겁니다. 한생각(一念) 이전의 자리가 부처였구나! 그 자리가 나의 본래 자리이고 우주의 근본 자리였구나! 이것을 아는 순간 견성했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자성을 보는 순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자성을 보면 부처이고 자성을 보지 못하면 중생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중생의 성품을 떠나서 따로 부처의 성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부처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성품을 떠나서 따로 부처의 성품을 볼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외도의 말입니다. 마구니라는 얘깁니다. 부처는 내 본래 마음에 있는 것이지 내 마음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절을 할 때도 내 본래 마음자리에 두고 절을 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들 마음이 부처님자리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합장을 할 때도 우주를 상대로 한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그런 행위가 우주를 상대로 하는 위대한 마음의 세계로 가는 길입니다. 알고 보면 쉬운 일이지만 과거로부터 익혀온 습(習)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에 알면서도 습을 못 떼는 겁니다.
‘중생의 성품이 곧 부처의 성품이니라. 성품을 떠나서는 부처가 없느니라. 부처가 곧 성품이니 이 성품을 떠나서는 부처가 될 수 없고 부처를 떠나서는 성품을 얻을 수 없느니라.’
달마 대사께서는 성품을 부처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본래 마음’이라 했을 때 여기서 ‘본래’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지금 쓰는 마음도 마음은 마음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이것은 번뇌입니다. 지금 보고 듣고 분별하고 있기 때문에 번뇌라고 하는 것이고 진짜 마음 자리는 이름을 떠난 자리로서 어떤 표현도 할 수가 없으므로 그 자리를 이름하여 ‘부처’라고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 자리에 여러분들이 마음을 두고 정진 하시면 바로 업(業)도 맑아지고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나무가 자랄 때도 똑바로 자라는 나무는 드뭅니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자랍니다. 그러면 그 나무는 어느 쪽으로 넘어질까요? 기울어진 쪽으로 넘어가겠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자리에 마음을 두면 언젠가는 그 자리로 돌아간다 이런 얘깁니다. 전생의 습이 금생에 이어진다고 말을 했듯이, 여러분이 금생에 그 자리에 마음을 두고 정진하면 다음 생에 태어나 불교를 믿지 않더라도 진리의 눈을 금방 뜰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성품 자리에 마음을 두고 꾸준히 정진하시다 보면 언젠가 눈을 뜨게 됩니다.
깨닫는 데 공식은 없습니다. 우리가 물을 마셔봐야 물맛도 알 수 있듯이 깨달음의 세계도 직접 깨닫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과거로부터 육체 위주로 살아온 습 때문에 조금만 불편해도 수행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 몸뚱아리는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혀도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것인데, 애착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 밖에 불성이 따로 없다’는 말씀에 눈을 뜨면 마음은 안과 밖이 없습니다. 대자유인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다 같이 반야바라밀 수행으로 성품을 깨달으시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 청주 혜은사 주지
200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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