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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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제10장 證果 ⑫
최초 발심과 구경정각은 두 마음 아니다

기초가 견고하면 천층만층 건립할 수 있듯이
발심이 원만하면 오십오위의 깨달음도 성취

涅槃經云 發心畢竟二不別 如是二心前心難

범어의 열반은 멸도(滅度)라고 번역한다. 멸도는 커다란 환란이 영원히 소멸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건넌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최후의 법이기 때문에 열반이라고 한다.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이 처음 수행인지의 마음을 발심한 때로부터 구경극과에 이르기까지 따로의 마음으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때문에 처음 발심하여 법신자체를 증득하면 몸을 나누어 부처가 될 수 있고, 최후에 이르러서도 법신을 증득하는데 불과하며 역시 몸을 나누어 부처가 될 수 있다. 이는 수행의 마음과 깨달음의 마음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처음 발심할 때에 부처가 되는 것은 수행인지의 마음에서 깨달음의 과위를 갖추고 있는 것이며, 수행한 이후 마음에서 부처가 되는 것도 처음 수행인지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깨달음의 과위가 수행의 인지의 마음에 사무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인지의 마음과 과위의 두 가지 마음 가운데서 발심을 한 인지의 마음을 일으키기가 어렵다는 것은 인지에서 발심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수행인지에서 발심을 했다 해도 원만하고 상주한 올바른 신심을 갖추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
옛사람은 “천리 길도 첫 걸음에서 시작한다”라고 하였고, 또 “높은 누각도 땅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난다”라고 하였다.
가령 땅의 기초가 견고하다면 천층만층이라도 마음먹은 대로 건립할 수 있듯이 보살의 발심도 이와 같다. 최초의 발심이 원만하고 상주한 진심을 얻는다면 오십오위(五十五位) 진실한 깨달음의 길도 따라서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두 가지 마음가운데서 처음 발심하기가 어렵다고 말하였다.

大品經云 須菩提 有菩薩摩訶薩 從初發心卽坐道場 轉正法輪 當知則是菩薩爲如佛也 法華經中 龍女所獻珠爲證 如是等經 皆明初心具作一切佛法 卽是大品經中阿字門 卽是法華經中爲令衆生開佛知見 卽是涅槃經中見佛性故住大涅槃 已略說初心菩薩因修止觀證果之相

범어의 마하는 대(大)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보살가운데서 대보살에 해당된다. 이들 보살이 최초에 발심하여 도량에 앉아서 사제법륜을 설명할 때가 부처의 경지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만 된다.
여기에서 ‘부처와 같다’는 것은 상사위(相似位) 부처님을 말하는 것이지 구경각의 부처님은 아니며, 처음 발심주에서 정인, 연인, 요인 등 삼인불성(三因佛性)의 의미가 원만하게 발현했음을 나타낸 것이다.
또 <법화경>에서 문수보살이 용궁에서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할 때 한 용녀가 선근이 맹렬하고 날카로웠는데, 그녀는 겨우 나이 일 곱살에 성불하였다.
그 때 그 모임에 있던 대중들은 모두 의혹심을 일으키고 말하기를 “여인은 많은 장애 때문에 성불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용녀는 겨우 일 곱살에 성불을 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그 때 용녀가 즉시 자기의 목에 걸고 있던 영락을 풀어서 세존께 받치고 사리불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이 영락을 세존에게 바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통쾌한가”하였더니 사리불은 대답했다.
“매우 통쾌하다.”
그 때 용녀는 즉시 남방무구(無垢) 세계에 가서 성불을 하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였는데, 이러한 성불은 이와 같이 신속하다 할지라도 그대로 팔상성도를 나타낸 최초 발심주의 부처님인 것이다.
앞에서 모든 경전을 인용하여 증명했던 것은 초발심에 일체불법을 만족하게 갖췄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대품반야경> 가운데서 최초의 아자문(阿字文)인데, 바로 사십이위(四十二位)를 비유한 것이다. 바로 이것은 <법화경> 가운데서 중생을 위하여 부처님 지견을 연 것이며, <열반경>에서 불성을 보았기 때문에 대열반에 안주한 것에 해당된다.
<법화경>에서는 비록 부처님 지견을 연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부처님 지견을 보이고 부처님 지견을 이해하고 실천하여 끝내 깨달아 들어간다는 의미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열반경>에서는 비록 불성을 본다고 말하였으나 최초로 발심하는 순간이 도를 증득한다고 순간이며 최후마음도 역시 최초 발심하는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처음 발심하면 일체 불법이 만족한다”라고 하였다.
최초로 발심한 보살이 지관을 수행하여 수행분야만큼 과보를 증득하는 모습에 관해서는 대략 설명이 끝났다.

次明後心證果之相 後心所證境界則不可知 今推敎所明 終不離止觀二法 所以者何 如法華經云 殷勤稱歎 諸佛智慧則觀義 此卽約觀以明果也

앞에서는 최초 발심한 보살이 수행분야만큼 과보를 증득한 모습에 대해 밝혔으므로 여기에서는 최후에 마음으로 구경과를 증득하는 모습에 대해 밝히려 한다.
최후 했을 때의 ‘후’는 처음 발심을 대비해서 한 말로 최후의 일심을 말한다. 그러나 서로 번갈아가면서 뒷 마음을 논변할 수 있는데, 가령 예를 든다면 십주 가운데 제이주를 처음 발심주에 대비한다면 제이주가 후심(後心)이 되며 제삼주를 제이주에 대비하면 삼주가 후심이 된다. 이것은 초지보살이 이지보살의 일을 모르고 등각보살이 묘각의 일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금 부처님 가르침에서 밝힌 것을 추론해 본다면 증득한 수행만 지관을 떠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깨달은 과보 역시 지관을 떠나지 않았다.
대승의 수행도 지관이며 대승의 과보도 역시 지관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을 추론해서 밝힌다면 오류가 없을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은 따져 묻고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법화경>에서 세존이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에서 서서히 일어나 말하기를 “제불지혜는 매우 심오하고 한량이 없으며 그 지혜문은 이해하기도 깨달아 들어가기도 어렵다”라고 하시며 은근히 모든 부처님 수행방편문에 대해 칭찬하였다.
비록 방편법문은 한량이 없으나 귀결점은 하나이다. 이는 방편에는 많은 수행문이 있으나 근원으로 되돌아가면 두 갈래 길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미 두 길이 없다고 했으면서도 한량없는 방편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관’의 의미를 밝힌 것이다.
문자반야(文字般若)를 따라서 관조반야(觀照般若)를 일으키고 관조반야를 따라서 실상반야(實相般若)에 일치하게 된다. 문자반야는 뗏목과 같고 관조반야는 뗏목을 젓는 것과 같고 실상반야는 피안에 도달한 것과 같다. 이는 관 수행편에서 부처님 극치의 과보에 대해 밝힌 것이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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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