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을 만나게 돼서 참 기뻐요.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이 믿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의 진리는 어느 사람이든 다, 나 아님이 없고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는 한 진리예요. ‘어머님의 은혜’라는 노래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마음속으로 진짜 부를 수 있는 노래랍니다. 젊은 사람들만 부르는 게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한테 말씀드릴 거는 불교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불(佛)이요, 보이지 않는 데서나 보이는 데서나 서로 말을 하고 서로 대화를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교(敎)예요. 일체가 혼자, 독불장군은 없죠? 마음의 인연줄이라는 줄은 보이지 않아요. 전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가설을 해 놨기 때문에 그 전력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못 보지만 불이 들어오는 거는 볼 수 있고 알 수 있죠? 그와 같이 인간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인연줄도 역시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연결이 돼 있습니다. 그것을 우주 법계라고 하죠. 그거는 이따 이어 가고요.
그래서 불교라는 것은 그렇게 광대무변하고 어느 한군데 국한돼 있는 게 아니라 포괄적인 하나의 진리입니다. 이 세상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불바퀴의 근본이, 우리가 수십억 겁을 거슬러 올라가서 얘기한다면, 지수풍(地水風) 세 가지가 서로 암흑에서 휘적거리고 서로 만나서 뭉치고 그러다 보니까 그 안에서 바로 온기가 생겨서 광(光)이 일어난 거죠. 그래서 그 광력으로 인해서 생명이 생겼죠. 그래서 지수화풍 그게 원천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뚱이도 지수화풍입니다. 지수화풍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도 흙과 물을 개서 바람에 말려서 불에다 구워서 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온 겁니다. 그러니 이것도 지수화풍으로 등장을 한 거죠.
불교라는 것이 너무 엄청납니다. 서로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 하고 돌아가는 이 우주의 섭류가 전체의 진리입니다. 자기의 영원한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근본이 있기 때문에 내 몸뚱이가 떨어졌어도 그대로 진행해 나가는 겁니다. 차원에 따라서 이 모습으로도 나올 수 있고 저 모습으로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마음먹는 대로 모두가 이루어질 수도 있고 패배할 수도 있는 그런 문제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죽은 세상의, 보이지 않는 세상의 영혼들도 서로 교류를 하고 날아다니는 새들도 교류를 하고, 핀 꽃들도 서로 대화를 하고 나무들도 무정물도 생물도 식물도 다 서로 대화를 하고 돌아갑니다. 대화를 하고 돌아가는 게 즉 교(敎)입니다.
불이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을 말합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풀포기 하나도 생명은 있는 것입니다. 생명 없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외국에 가니까 블랙홀이라고 합디다. 작은 거든 큰 거든 모든 것이 돌아가는 그 자체가 불바퀴라 이겁니다. 지구가 쉬지 않고 돌아가듯이 우리 인간도 삶에 의해서 생활이 쉬지 않고 돌아가는 겁니다. 잔다 깬다, 일한다 앉는다 선다, 변소에 간다 먹는다 하는 것이 고정된 게 하나도 없죠.
보는 것이 고정됨이 있습니까? 듣는 것도 고정됨이 없죠, 만남도 고정됨이 없죠,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됨이 없죠, 먹는 것도 고정됨이 없어요. 모두가 그렇게 쉴 사이 없이, 비행기 프로펠러 돌아가듯 그렇게 쉬지 않고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 사는 것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는 게, 그렇게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우주의 근본도 우리 마음에 직결이 돼 있고 세상살이 만사가 다 우리들 마음에 가설이 돼 있습니다.
새삼스러워하거나 거짓으로 알지 마시고요. 여러분을 만나니까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옳을지 말을 잊어버렸어요.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나는 아홉 살에 남의 집에 갔어요. 그런데 그 집에 갔더니 엄마 없는 두 살이 된 아이가 있고 재혼한 부인이 어린애를 낳아서 그 나이가 된 아이가 또 있었어요. 그래서 부모 없는 아이는 내가 맡고, 한 아이는 저희 엄마 아버지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 아이를 맡아 가지고 있는데 밤이면 울고 그러니까 항상 등에다 업고 잠을 재웠어요. 어린애가 울면 같이 울고 그랬죠.
그걸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그때 일제시대 때는 물 한 지게에 고련씩 받았어요. 그러니까 일 전에 두 지게씩이죠. 그때는 먹을 것도 귀했기 때문에 내가 하나 빠지면 먹는 게 좀 낫지 않을까 해서 남의 집에 갔던 거예요. 그랬는데 신발이나 제대로 있었겠어요? 게다가 다 닳아 빠져서 반쪽 남은 거를 신고 물을 길러 가니까 이게 미끄러워서 툭 하면 넘어지죠. 그래서 거기다가 새끼를 질끈 매 가지고 아홉 살 먹은 소녀는 그렇게 지냈더래요. 물지게를 지는데 하루 아홉 지게씩을 져 와야 그 집에서 먹어요. 이렇게 하면서 부모의 탓도 할 수 없고 남의 탓도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렸죠.
왜냐하면, 여러분도 생각을 잘해 보세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지 않았다면 바로 상대가 없을 거예요. 가정도 없고 상대도 없고 이런 둥지도 없고 잘하고 잘못하고도 없고요. 그런데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났기 때문에 부딪침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용도에 따라서 내 앞에 다가오는 모든 문제들을 어떻게 타개를 하겠느냐 하는 그런 말입니다. 남의 탓을 할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잘했든 못했든 내가 이 세상에 난 탓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 생긴 탓이죠. 남을 나무라기 이전에 말입니다.
여러분의 몸뚱이 속에 수십억의 생명들, 모습들, 의식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서 그렇게 인연이 된 줄 아십니까. 그 의식들이 여러분을 끌고 갑니다. 부부 사이에 한 사람이 태어나게 되면 부모에게는 몸을 받습니다. 그러나 정자 난자와 나의 영혼이, 즉 삼합이 한데 합쳐져야만 인생으로 화합니다. 그럴 때에 자기가 과거에 잘 살았든지 못 살았든지, 죄를 지었든지 죄를 안 지었든지 그 인연에 따라서 업식이 자기의 영혼에 부착이 돼서, 모두 한데 합쳐서 이렇게 인간 하나가 됩니다. 그럼 그 과거의 업은 지나갔으니까 없다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 몸뚱이 속에 가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몸뚱이 속에 생명과 의식, 모습들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가지고 나온 그 자체의 의식들은 잘하고 못하고 이런 거를 모릅니다. 그래서 중생이라고 그러죠.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그 여러 의식들을 다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여러분의 숙명통에서, 즉 컴퓨터에 입력이 됐다가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현실에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가지고 나온 업식이, 그 의식들이 그만 여러분을 충동질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하나가 ‘이럭하라’ 하면 이럭하고 ‘저럭하라’ 하면 저럭하고, 화가 나게도 하고 화가 안 나게도 하고, 여러 가지로 자꾸 충동질합니다. 수십억이 들어 있으면서 차례차례로 그렇게 나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속지 마라.’ 하는 것은 내 마음이 그렇게 나올 때 누가 될 일이라면 ‘야! 이렇게 해서 돼? 내 영원한 친구여, 이렇게 이끌어 가서는 안 되잖아.’ 하고 거기다 맡기고 ‘잘 이끌어 가 봐. 좀 더 삶에 보람이 있고 자유스럽고, 광력으로써 창조력을 갖게끔 해 줘 봐.’ 하고 거기다가 맡겨 놓으세요. 또 안되는 거라면 되게끔 거기다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한마음 주인공만이 나를 잘 이끌어 줄 수 있고, 아프면 병이 낫게끔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세요. 자기 마음의 주인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