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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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되는 거든 잘되는 거든 다 마음의 조작입니다
강물 흐르듯 그냥 흘러갈 거를 자꾸 붙잡지 마세요

이세상 살아나가는 게
다 놓고 가는 건데
왜 마음을 그렇게 놓지 못합니까?

어떠한 문제가 생겼어도
그걸 놓게 되면
그냥 저절로 풀려서 돌아갈 것을…

누구에게나 따뜻한 어머니 마음으로…
운? 어버이날이 되면 항상 부모님께 제가 카네이션을 달아 드렸는데 이제 저도 처음으로 제 자식에게 꽃을 받고 보니 부모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더욱 깊어짐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이 꽂을 받을 만큼 어머니로서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 돌아보게도 됩니다. 스님, 내 자식에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항상 따뜻한 어머니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 우리가 카네이션이다 이런다면 어머니 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죠. 그래서 어머니날에는 꼭 카네이션을 꽂아 드리게 됩니다. 그러나 어머니날에만 어머니 꽃이 아니라 전체 이 유생 무생이 다 어머니로 인해서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이렇게 소생시키게 돼 있으니까 이것이 즉, 어머니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
그러니 ‘이 어머니 꽃이라는 건 꼭 어머니날만이 아니라 사시사철에 쓸모가 있구나. 아주 우리가 항상 써야 되는 것이 어머니 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때 그 어머니 꽃을 믿게 되고 들어가게 되는 거죠. 이게 어머니 꽃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머니 꽃이 사시사철 만날 돌아가면서 아름답게 쓸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마음!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그 아름다움의 마음을 항상 쓰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어머니 꽃이나 마찬가지다 이겁니다. 어디에고 어머니 꽃은 쓸 수 있는 거다 이겁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항상 아리따우니깐 말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꽃이라는 건 자식에게 줄 수도 있고, 자식은 어머니에게 줄 수도 있는 거죠. 내 마음을 너한테 전달하고, 자식은 자식대로 어머니의 마음이 내 마음이니 또 자식은 어머니에게 전달을 하고, 남편에게도 바로 부가 붙으니까 그 뭐, 카네이션을, 마음의 꽃을 드려도 되는 겁니다, 어머니의 꽃을. 또 그쪽에서도 나한테 또 그렇게 꽃을 줘도 되는 거고 말입니다. 그래서 카네이션이라는 꽃은 어디에고 다 쓸 수 있는 겁니다. 그렇듯이 모든 꽃이 한데 합쳐진 것이 카네이션이거든요.
그와 더불어 그 꽃과 같이 모든 것이 한데 합쳐진 건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잘 쓰게 되면 카네이션 꽃과 같고 다양하게 쓸 수 있지만 내 마음이 카네이션같이 그렇게 지혜가 넓지 못하고 부족하다면 바로 딴 꽃이 되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고정된 관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이름에만 속하고 어떤 물질에만 속하다가 보면 그냥 빠지게 돼 버린다 이겁니다.
우리가 이 마음 하나 잘 쓰고 잘못 쓰고 그러는 데서 이 믿음이란 게 오고 종교라는 게 있고, 부처님 법이란 게 있기 이전에 바로 자기 법인데, 그대로 법인데, 마음을 우리가 자꾸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기 때문에 역대의 부처님들도 그렇게 가르쳐 주신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이 어머니의 마음도 되고, 할머니의 마음도 될 수 있고 또 아내의 마음도 될 수 있고 또 형님의 마음이 될 수 있기도 하고, 동생의 마음이 될 수도 있기도 하고, 아주 다양하게 그렇게 돌아가면서 만나면 만나는 대로 그렇게, 친구를 만나면 친구의 마음이 되고 이렇게 자꾸 돌아가잖습니까. 그러니 이 부처님의 마음이 얼마나 묘하냐 이겁니다.
그럼 부처님만 그렇게 돌아가느냐. 우리도 그렇게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 마음 쓰는 게 부처다 이겁니다. 중심에다, 뱃속에다 참자기가 있으니깐 거기다가 참구하고 그렇게 무겁게 탁, 바람에도 쓸리지 않게 둔다면 그게 주장자가 될 것입니다. 그 주장자로 하여금, 일월이 밝아서 고요하게 잠든 밤같이, 만강에 달이 비쳐도 내 중심 하나로 인해서 그 달을 몽땅 몰아서 내가 가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겁니다.
어느 강에든지 그렇게 달이 비춰 줄 수 있듯이 여러분도 같이 살면서 누구한테나 그렇게 해 줄 수 있다 이겁니다. 그 마음이 문제죠. 그 마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면 가정도 가난할 것이고 마음이 풍부하다면 가정도 풍부할 것입니다. 마음이 진득하고 중심을 잡고 무겁게 사는 사람이라면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겁게 갈 것이고, 값비싸게 갈 것이고 가볍게 사는 사람은 발걸음도 가벼울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바로 하는 일마다 가벼워지게 됩니다. 그러니 항상 진중하고 넉넉한 어머니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무주상 보시에 대해서
운? 육바라밀 중 첫번째가 바로 보시인데 그 동안 저는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참 인색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좀 보시를 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무주상 보시를 강조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스님, 우리가 정말 했다는 상(相)이 없이 보시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주상(無住相) 보시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답? 팔만대장경이 책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책을 통해서 본다는 건 벌써 그건 이차적인 겁니다. 일차적으로 보세요. 우리가 사는 생활 속에서 모든 것이 돌아가고 있는 걸 좀 더 자세히 지켜보세요. 부처님께서도 육바라밀의 첫째 구절에 보시를 말씀하셨습니다만, 보시라는 건 물질적으로 주는 거는 금방 깨져 버리거나 먹어 버리거나 써 버리면 그뿐이지만, 무주상 보시라는 건 내가 한 생각을, 그 전체 대공의 이치에 돌아가는 내 귀합된 한생각을 해 준다면, 바로 그게 무주상으로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부를 배우는 사람한테는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몰락 놔 버려라.” 하지만, 길에서 당장 죽어가는 사람을 만났는데 다짜고짜 “너, 공부해라.”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그 얽히고설킨 유전성이나 인과응보나 그러한 것이 많아서, 죄업에 끄달려서 그냥 엎어지는 사람에겐 가다가도 무주상 보시를 해야 된다 이겁니다. 예를 든다면 어떤 이유로다가 법정에서 뻘건 줄을 치고 ‘너는 오 년을 징역을 받아라. 무기 징역을 받아라. 사형이다.’ 이렇게 된 것을, 즉 말하자면 ‘야, 모르고 지은 죄니까.’ 하고 모든 거를 용서할 수 있는 아름다운 향기와 더불어 나의 그 전체적인 생명체에, 이 모두가 시공이 둘이 아닌 전체에 돌아가는 에너지를 그대로 내가 같이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바로 그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내가 된다면 바로 그것은 무주상(無住相) 보시로 돼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죽어 가는 사람도 살릴 수가 있고, 심장이 멎어 가는 사람도 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병에 의해서 너무 망쳐지고 죽게 된 사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가 도살장으로 간다든가, 또 사람이 가다가 어떠한 문제가 생겼다든가, 이럴 때 무주상 보시를 하는 겁니다. 가난해서 동냥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본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동냥을 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하는 진실한 한생각이 그 사람을 동냥을 해서 먹고사는 굴레에서 벗어나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주상 보시라는 것은 아주 말로 헤아릴 수 없는 보시인 것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방생이라고 하면 물에서 잘 노는 걸, 제 집에서 잘 노는 걸, 어부더러 잡아오라고 해서, 자꾸 그렇게 잡아오니까 팔리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잡아오죠. 그러니 잡아 올 때 죽이지, 잡아다 넣었을 때 죽이지, 또는 가지고 가면서 죽이지, 갖다 넣었을 때 죽는단 얘깁니다. 그러니 그것이 놀부의 짓이지 어디 그것이 보시입니까? 방생이고? 방생이라는 것은 물가에 가다가도 물이 없는 데서 퍼덕퍼덕 생명이 뛸 때 그때에 물에다 갖다가 넣어 주는 것이 방생입니다. 그럼 이것은 보시가 아닙니다. 이건 오히려 죄를 짓는 법입니다. 그걸 잡아오라고 가르쳐 준 자도 죄를 안 받지 않을 것이고 또 갖다 넣은 사람도 죄를 지은 것입니다.
모르니까 다 그렇겠지만, 이 도리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도 안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르고 지은 죄는 모르고 받게 마련이다 이 소립니다. 자기가 요만큼 했으면 요만큼 받게 되고, 요만큼 버렸으면 요만큼 버린 것만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를 버려라! 버려라! 놔 버려라! 쉬어라! 공에다 일임시켜라!’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급하면 굶어 죽는 사람 앞에는 무조건, 즉 말하자면 부황이 난 사람한테는 당장 먹어야 사니까, 이웃돕기를 해서 부황을 면하게 해 주는 그것도 보시요, 이건 유(有)의 보시이면서 또 무주상 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먹이면서 살려 가면서 끌어다가 이 한마음의 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입니다. 그러니 물질로 줘서만이 보시가 아니라, 물질을 안 주는 것도 보시가 될 수 있고 방생이 될 수도 있고, 물질을 줘서 보시가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주상 보시라는 것은 마음의 양식을 넣어주는 데, 에너지를 넣어주는 데서 바로 무주상 보시가 나오는 겁니다. 본래 가지고 있는 양식이 충만한데 그것을 먹게끔 해 주는 것이 무주상 보시다 이겁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다시 말하면 유주상 무주상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마는 같이 마음을 한데 하면서 내 몸과 같이 생각을 하고,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내 자리와 똑같이 생각한다면, 어찌 내 생명은 아깝고 남의 생명은 아깝지 않겠습니까? 이 생명은 다 똑같습니다, 아픔도 똑같고 자유도 똑같고 몸도 똑같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자기 마음으로 굴리고, 굴리면서 지켜보는 사람이 된다면, 모든 걸 공에다 놔 버리고 지켜보는 사람만 된다면 하나하나 그것이 능력이 되고, 능력의 빛이 나가게 되고, 그 빛으로 하여금 오장육부의 모든 생리적인 작용을 자기가 마음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나를 건질 수 있는 그 사람이라면 딴 사람의 육의 구원도 받게 해 줄 수 있고, 영원의 구원도 받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갖는다 이겁니다.

남편 마음이 잘 안 잡혀…
운? 저의 남편이 회사가 부도나면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았으나 여의치 않자 몇 년째 연일 술로서 마음을 달래며 버럭 소리를 질러 대기만 합니다. 자식들은 계속 불안해하고 있고요. 그래서 열심히 관한다고 하는데 여전히 남편 마음은 잘 안 잡힙니다. 남들은 관하면서 다 잘사는 것 같은데 저는 왜 잘 안 되는 걸까요?
답? 이것이 전부 마음의 조작입니다. 잘못되는 것도 마음이요, 잘되게 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마음의 조작이니만큼 마음으로서 서로서로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빛보다도 더 빨리 연결이 됩니다.
빛은 가다가도 어떠한 변고가 생기지만 마음은 은산철벽도 뚫을 수 있고 남의 마음으로 같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음이 자식이나 남편이 잘 안됐을 때 내 마음이 그쪽으로 투입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내 마음이 말입니다. 그렇게 관하고 그렇게 ‘너만이 할 수 있어!’ 할 때에 바로 내가 남편한테로 들어갈 수도 있고 남편이 아내한테로 들어올 수도 있고, 그래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가 아주 특별한 인연이 되고 그러는데, 어째 나만 그렇게 안 되겠습니까?
나쁜 사람이 생기는 것도 모두가 이 마음의 조작입니다. 돈이 있어도 도둑질하고 싶어서 도둑질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리고 뭐 죽일 것도 아닌데 죽이거든요, 또. 이게 마음의 조작이란 말입니다. 고가 있느니 집착이 있느니, 그게 고와 집착만 없으면 멸이 되고 이러는 것 아닙니까. 모두가 이 집착이 없으면 욕심이 없고 그렇다면 고라는 건 없어요. 모두가 우리가 만들어서 ‘고’라고 하는 거지. 보세요. 강물 흐르듯이 흘러갈 거를, 기껏 그냥 흘러갈 거를 붙잡는단 말입니다. ‘아이고, 우리 남편은 이렇게 되고 우리 자식이 이렇게 됐으면 좋겠는데….’ 그냥 이럭하고 집착하니까 강물이 흘러가다가도 그냥 걸려 버려요. 그러니깐 안될 수밖에.
그게 왜 안되겠어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강물 흘러가듯 하는 건데. 우리가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지고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지는 이런 사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고정된 게 하나라도 있습니까. 여러분이 볼 때 고정된 게 하나라도 있습니까? 이것 보면 저것 봐야 하고 이것 들었으면 저것 들어야 하고, 저 사람 만났으면 이 사람 만나야 하고, 이것 했으면 저것 해야 하고 이게, 매사가 하나서부터 열까지 다 고정됨이 없이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지듯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을 해도 내가 이렇게 말을 하는 대로 벌써 과거로 흘러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거를 붙잡아요, 자꾸. 여러분이 살면서 붙잡는 게 고(苦) 인(因)이에요. 잘되는 건 붙잡지 않는데 잘못되면 더더욱 붙잡고 늘어져요. 아, 좀 느긋하게, 회사가 망한다 하더라도 느긋하게 좀, 이게 진짜로 자기 뿌리를, 자기 불성이 자기 뿌리거든요. 자기 종자며, 깨달은 분의 종자는 종성이라고 그러죠. 나무가 자기 뿌리 없이 사는 거 보셨습니까? 뿌리가 있기 때문에 싹이 사는 거거든요. 그렇듯이 뿌리에서 모든 에너지를 흡수해서 싹으로 올려보내야 싹이 푸르게 살 수 있는 거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뿌리는 어디다가 팽개치고 항상 이름이나 형상을 보고 기도를 하고 찾아다니려고 하니 그게 통신이 되나요? 이 나무가 저 나무한테 에너지를 달라고 그러면 주게 될까요? 자기 나무에는 자기 뿌리만이 자기 나무를 이끌고 있는 거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 행복하게 살려 해도 살지 못하게 자기네들이 마구 붙들고 그래 가지고선 그릇되는 거죠.
잘 생각해 보세요, 왜 그런가? 이 세상 살아나가는 건 다 놓고 가는 건데 왜 마음을 그렇게 놓지 못합니까. 어떠한 문제가 생겼어도 그걸 놓게 되면 그냥 저절로 풀려서 돌아갈 걸 외려 붙들어서 풀려서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삼세심 불가득의 의미는?
운? 요즘 수행 삼아 『금강경』 독송을 하고 있습니다. 근데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요,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여쭙니다.
답? 옛날에 덕산 스님이라고 계셨어요. 그 스님이 하도 금강경을 많이 알아 가지고 금강경을 누구든지 해석을 해 달라 그러면 아주 자세하게 잘 말을 해 주고 이렇게 했는데, 하루는 저 중국의 남쪽에 사는 사람들이 ‘직지인심 견성성불이요, 불립문자요’ 하는 얘길 하니까, 금강경을 이렇게 많이 알면 내가 바로 견성을 시켜 줄 텐데 어째서 이 자들이 문자를 세우지 않고 알겠는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좀 구원을 해야 되겠다 해 가지고 괴나리봇짐에 금강경에 대한 강의 책을 짊어지고 찾아갔었습니다.
그래서 선가에서 유명하다는 용담 스님을 좀 만나려고 갔는데, 몇 달을 걸려서 그곳을 찾아가서 용담 스님이 계시는 절 부근에 도착했을 때 어떤 떡집에 도달했답니다. 떡집에 들어가서 떡을 썰고 있는 할머니를 보고 “여기에 선에 유명하다는 용담 스님이라는 분이 계시다는데 그분이 계시는 곳을 좀 가르쳐 주시오.” 하고 할머니한테 얘기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가만히 있더니, “그럼 좋소. 내가 지금 이 떡을 썰고 있는데 당신이 보나마나 배가 고파서 지금 나한테 떡을 사 먹으려 할 텐데, 당신이 내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하면 떡을 당신한테 팔 것이요, 대답을 하지 못하면 내가 떡을 팔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럼, 한마디 일러 보시오. 내가 금강경이라고 하면 당신 정도는 얼마든지 내가 설득시킬 수가 있소.” 하고 얘길 했거든요. “그럼 『금강경』에 있는 말 중에서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지금 떡을 썰고 있는 이 마음이 어느 심에 떡을 썰고 있소?” 하는 질문을 하니까, 금강경을 그렇게 낱낱이 해석을 잘한다는 사람이 당장 말이 막혀서 대답을 못했단 말입니다. 대답을 못하니까 할머니가 당신은 떡 먹을 자격이 없으니 가 보라고 하고 들어가 버렸어요.
그래 가지고 거기서 한 방을 얻어맞고 덕산 스님이 용담 스님이 계시는 회상에 올라가 가지고 자기는 금강경을 잘 알고 경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안다는 얘길 하니까 용담 스님은 아무 말씀 없이 그냥 듣고만 계셨거든요. 아무 말씀 없이 듣고만 계시다가 “이제 밤이 늦었으니 어서 가서 주무시오.” 그렇게 얘길 하니까, 자기는 그만큼 하루 종일 얘길 해 놓고 나니 힘도 들고 밤도 늦어서 숙소로 들어가려고 “등불에 불을 좀 켜 주시오.” 했거든요.
그래서 용담 스님이 불을 확 켤 때 바로 다시 용담 스님이 그 불을 향해서 훅 불어 버리니까 꺼졌거든요. 그때 덕산 스님이 『금강경』 해설에 대한 그 책을 갖고 간 것을 내려놓으면서, 통곡을 하고 울면서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그 불을 가져가다 문지방을 탁 넘어서면서, 이 문지방 사이가 교차로니까, 문지방을 넘어가는 동시에 껐을 거다 이겁니다. 문지방이 아니라면 안 껐죠. 근데 방에는 언제든지 문지방이 있거든요. 예전에는 문지방이 지금처럼 이렇게 얕은 게 아니라 높았지 않습니까? 문지방을 이렇게 넘어가는 동시에 훅 끄니까 캄캄해서 앞이 안 보였단 말입니다. “이래도 금강경을 다 잘 안다고 그러느냐.” 하고선 말을 했을 게다 이거예요. 그러는 동시에 자기는 ‘참, 이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해서 이걸 못 보는구나.’ 하는 걸 느꼈기 때문에 자기는 그 금강경을 놔 버린 거다. 그 순간 금강경을 몰락 놔 버린 거다 이겁니다, 그 순간. 그 마음이 순간 그렇게 들 때, 앞을 못 보는구나 하는 순간에 금강경은 벌써 확 놔 버린 거다. 금강경을 그 순간에 몰락 내버렸기 때문에 금강경을 놔 버린 거다. 깨쳤다 이거죠. 남이 불을 켜 줘서 그 환한 것만 알지, 자기의 마음 안의 그 불은 켜지 못했다 이 소리거든요. 그래서 마음 안의 불을 켠다면 바깥에도 비치련만 마음 안의 불을 켜지 못했으니 어떻게 바깥에 불을 환하게 비추어 줄 수가 있겠느냐 이겁니다.
우리가 지금 이 방통 안에서 말입니다, 아주 그믐밤이라고 생각하고 저 불을 팍 꺼 보십시오. 그럼 불이 탁 꺼졌을 때는 그 안이 캄캄하기 때문에 바깥에도 캄캄합니다. 안이 밝으면 바깥에도 환한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안이 밝으면 왜 바깥에도 환한가, 바깥에는 캄캄할 텐데. 그런 얘기가 나오죠? 그러나 전기선은 바깥에도 있고 죄 있기 때문에 안에 켜 줄 수 있는 불이라면 바깥에도 켠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문지방을 넘어설 때 내 눈이 밝았다면 바로 그와 같다 이 소립니다. 그렇게 밝게 금강경 을 다 했는데 왜 바깥이 컴컴하다고 하느냐 이겁니다. 왜 불을 켜 달라고 남더러 하느냐 이거죠. 실질적으로 들어간 거죠. 즉각 들어간 겁니다. 그러니 그 마당에 금강경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글쎄, 그대로 현재심 불가득 떡 한 그릇 그것이 현재심에서 모든 것이 다 포함된 건데, 현재심 자체도 없는 거 아닙니까, 본래는. 그런데 떡으로 비유했다 이겁니다. 떡은 하나의 떡 한 개, 그거 하나가 우주를 싸고 있는 떡이다. 그러니 떡 하나를 먹을 자격이 없다 이겁니다. 그런 데서 ‘어떤 현재심에 떡 한 그릇을 먹겠습니까. 미래심에 떡 한 그릇을 먹겠습니까, 과거심에 그 떡 한 그릇을 먹겠습니까.’ 하는데 그만 콱 막힌 거예요.
그래서 지금 내가 떡을 달랜 것인데 그때의 거기에 걸릴 게 뭐 있습니까? 하나도 걸릴 게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 떡을 썰고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먹으려고 하는 것이고, 내가 먹으려고 하기 때문에 당신이 떡을 썰고 있지 않느냐는 얘기예요. 그렇다면 과거까지 들어가고 미래까지 들어갈 게 뭐 있겠소? 한생각에 불과한 건데.
우리가 아까의 마음이 다르고 지금의 마음이 다르고 이따가의 마음이 다른 건 아닙니다. 우리가 세세생생 살아나가는 그 마음이 중요한 거고 그 마음을 쓰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는 거죠. 그러니 마음은 똑같으나 어떻게 쓰느냐에 모두가 달려 있다는 뜻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탑돌이는 하는 건지요
운? 절에 가면 사람들이 정성껏 탑돌이 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저도 그냥 남들 따라 돌면서 소원을 빌어보게 됩니다. 근데 그렇게 탑돌이 하는 게 맞는 건지, 왜 탑돌이를 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답? 사람들이 탑돌이를 하고 들어왔기에 탑돌이를 하고 들어온 그 사람들한테 물었습니다. 기준을 어디다 두고 탑돌이를 했느냐 하고요. 그러니까 “저 탑이 성스럽고 부처님의 자리이기 때문에, 여러 부처님들이 탑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다 탑돌이를 하고 왔습니다.” 하거든요.
그래서 그게 아니라 이런 거라고 얘기해 준 것이 뭐냐 하면, 내 진정한 마음과 우주간 법계에 수많은, 위로는 삼세의 부처님들이나 역대 조사들, 선지식들, 유생 무생이 다 한데 합친 그 내공의 탑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하는 데 돌고 돌고, 또 돌고 그렇게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가 평생을 돌아도 끝이 없는 돎이 바로 탑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세상에서 살면서 이렇게 돌아가는 게 그냥 탑돌이를 하는 겁니다. 결국 자기가 자기를 끼고 도는 거지요.
그러니 이 생활 속에서 그대로 탑돌이를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탑에 부처님이 계신데….’ 이렇게 한정시키는 고정된 관념 속에서 도는 게 아니라, 우주 만유의 광대무변한 부처님의 그 향과 그 밝음이 이 대천세계를 다 비추고 있음을 아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내공에 있는 그 마음이 없다면, 그 밝음이 없다면 그 빛을 서로가 서로에게 상응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니 지금 내 마음을 밝히고자, 또 내 마음에 향기를 내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이 돌아가는 이치가 바로 내 마음에 있다는 것을 역력히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공부하고 있다 하는 것을 탑돌이로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200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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