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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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그 소중한 지혜
이 강 렬
극작가, 한국문인협회 상임이사

좋은 글들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난 문인들이 참 많다. 몇 해 전까지 소설가로는 박경리를 비롯해 오찬식, 홍성원 그리고 시인 정공채도 있다. 특히 그는 임종을 예감이나 하듯 한편의 시를 필자가 주간으로 있는 잡지에 보냈다.
“세상 떠나면서 운다/ 그때 태어날 때와 지금 운다/ 눈물 소리 못 내고 한두 방울/ 이 빗방울에 말도 없이 고별사 안긴다/ 잘 있거라 내 사랑아.”(‘고별사’ 전문) 몸은 비록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들 속에 담긴 감동적인 교훈과 가르침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번뇌의 중생계가 다하는 날은 기약조차 할 수 없으며 삶은 찰나처럼 한낮 보잘 것 없음을 알게 한다.
얼마 전 신문에 미국에 50여개 투자자문회사를 운영하는 40대 억만장자의 삶을 소개한 기사가 있었다. 그는 부자가 되고 보니 소유에는 점차 더 흥미를 잃게 됐다고 하며, 고급주택이나 심지어 자동차도 없이 호텔에서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앞으로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거기까지이다. 주변에는 가진 게 없어서 무소유로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그런 미담도 사치스러울 수도 있다. 물욕은 인간이 갖는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어느 사회든 버리는 사람보다는 갖기를 욕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회는 발전해왔지 않은가.
에리히 프롬이 말년에 저술한 <소유냐 존재냐>에 의하면 인간은 소유 지향과 존재 지향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소유 지향은 꽃은 아름다운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거냐 아니냐가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존재 지향은 꽃을 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좋기 때문에 꼭 가져야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점차 소유 지향으로 바뀌어 간다고 말한다. 오죽하면 요즘에는 사람에 대한 평가도 그가 누구며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보다는 그가 얼마를 가지고 있느냐에 초점을 맞춰 얘기할까. 어떻든 소유와 욕망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소유지향적인 삶은 행복하기가 힘들고 결국 후회하게 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배운다. 그래서 비움의 문화 즉 기부가 있는 것이다. 삶을 정리하는데 있어서 그것만큼 가치 있고 진실한 행위는 없을 것이다.
나눔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지혜이고 행위이다. 한마디로 말해 부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지름길인 셈이다. 부처님도 깨달음을 이룬 뒤 줄 곧 법을 나누는 생활을 몸소 실천했다. 만약 부처님께서 그러한 나눔의 행위를 가르치시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떠했을까. 따라서 우리도 ‘중생공양(衆生供養)이 제불공양(諸佛供養)’이라고 하듯 항상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뒤돌아보는 공덕의 숲을 가꾸어야 한다.
그러나 나눔에 아쉬움이 남거나 나눔을 즐거워 할 줄 모르면서 말로만 나눈다고 하면 진정한 비움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처음 이 세상에 등장했던 어린아이의 심성으로 돌아가 보자. 피카소가 말년에 아기들의 습작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물었다. 무슨 그림을 그렇게 유치하고 장난스럽게 그리느냐고. 그때 피카소는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되기까지 평생을 노력하며 얻어진 결과물이라고 대답했다.
누구나 머릿속 생각을 가슴으로 가져오게 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마음속에 비움이 꽉 찬 상태의 경지가 아닐까. 비움이 곧 채움이고 채움이 곧 비움인 것을 우린 매일 학습하면서도 어리석게도 또 망각한다. 초파일을 맞은 아름다운 5월에 지금이라도 자비행의 실천과 나눔의 참 정신을 전하는 무소유의 초발심을 내어보는 것은 어떨까.
200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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