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학 스님 ‘동다송’ 특강
강 사 : 원학 스님 (조계종 총무부장)
일 시 : 2009년 4월 13일
장 소 :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주 제 : ‘동다송(東茶頌)’
믿음과 정절 상징하는 차나무의 덕성 필요한 때
뜻밖의 횡재는 그동안 쌓은 선업에 대한 선과
초의 선사 탄생지인 전남 무안군은 4월 25~26일 초의 선사 탄생 223주년을 기념하고 초의 선사의 차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초의 선사 탄생 문화제’를 개최했다. 행사에는 외국인, 다인, 관광객, 지역주민 등 2만 여 명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초의 선사와 차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차 문화·산업의 위상을 알리는 세계적인 축제로 발돋움하는 행사였다.
이어 5월 4일 경남 하동에서는 제14회 하동야생차문화축제의 일환으로 ‘제2회 대한민국 차인대회’가 다인 3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진행됐다. 대규모의 ‘대한민국 차인대회’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초의 선사의 <동다송(東茶頌)>이었다.
차인들의 초의 선사에 대한 관심이 식을 줄 모르는 가운데 3월 30일~ 4월 13일 조계종 총무부장 원학 스님은 중앙 종무기관 종무원을 대상으로 강의한 초의 선사의 <동다송>을 정리했다. 3회에 걸쳐 진행된 강의 시간의 한계로 <동다송> 8절까지 강의가 진행됐다.
#1절
하늘이 좋은 나무(차나무)로 하여금 귤나무와 같은 덕을 갖게 했나니(后皇嘉樹配橘德), 하늘이 명한 너의 천성을 바꾸지 않으며 남쪽 나라에서만 자라도다(受命不遷生南國). 촘촘이 나는 싸라기눈과 싸워 겨우내 푸르고(密葉鬪霰貫冬靑), 흰 꽃은 서리에 씻겨 가을의 풍성함을 발하는구나(素花洗霜發秋榮). 고야산에 사는 신선의 하얀 살결 같이 깨끗하고(姑射仙子紛肌潔) 수미산 남쪽 염부주에서 나오는 금 같은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다(閻浮檀金芳心結).
차나무는 귤나무처럼 군자의 덕을 가지고 따뜻한 남쪽에서만 자라고 옮겨가지 않은 것에서 영원한 믿음과 정절을 상징한다고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매서운 눈보라에도 굴하지 않고 늘 푸른 것에서 선비의 충절과 강인한 순결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변절하지 않고 절개하면서 살기는 쉽지 않아요. 결국 절개를 지키는 사람은 손해보고 낙오자가 되기도 합니다. 공자(孔子)가 <논어> ‘자로편’에서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하다’라고 말했어요. 남과 화합은 하지만 흔들리지는 않는다는 뜻이에요.
절개를 가지며 지혜를 품고 타협하면서도 깊이 물들지 않으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진정한 차인으로 이 시대 세상의 난관을 극복하는 차나무의 덕성이 필요할 때입니다.
#2절
밤이슬이 푸른 구슬 같은 가지를 맑게 씻었고(沆瀣漱淸碧玉條) 그 잎은 아침 안개를 듬뿍 머금어서 마치 푸른 새의 혀와 같도다(朝霞含潤翠禽舌).
밤중에 내리는 이슬 항해(沆瀣)는 도가에서 신선이 마시는 물로 아주 신성한 물입니다. 이 물로 씻긴 가지가 푸른 구슬 같이 아주 아름답다는 소리겠죠. 또 이른 봄철 차나무에서 움이 터 올라오는 찻잎은 새의 혀처럼 아주 작습니다. 역주를 보면 이태백이 말하기를 중국 호북성 강능현 형주에 있는 옥천사 진공 스님은 가지와 잎이 푸른 옥과 같은 차를 늘 따서 마셔 여든의 나이에도 얼굴빛이 북숭아와 자두처럼 불그레했다고 합니다. 차를 마시면 건강해지고 늙지 않습니다.
#3절
선인과 사람과 귀신이 다 같이 사랑하고 아끼었나니(天仙人鬼俱愛重), 차의 됨됨이 참으로 비할데 없이 기이함을 일 수 있도다(知爾爲物誠奇絶). 그리하여 염제가 일찍 맛을 보고 식경에 적었느니라(炎帝曾嘗載食經).
인간만이 아니라 하늘에 사는 신선, 보이지 않는 중생인 귀신도 차를 너무도 좋아해서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왕 염제(炎帝)는 ‘차를 오래도록 먹으면 힘과 황홀한 뜻을 얻는다’고 <식경>에 올려 후손들에게 차 마시기를 생활화 하라고 일깨우고 있습니다. 차를 마시면 생기는 힘이란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힘이 아니라 이로움을 주는 힘이요, 황홀하다는 것은 삶을 기쁘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인생의 의미를 반조하고 깨닫게 되면서 삶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열식(禪悅食)과 같습니다. 차라는 것은 씁쓸하고 또 덤덤하면서도 떨떨한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락성쇠(苦樂盛衰)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삶이 차 한 잔속에 담겨있는 것이지요.
요즘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에는 순간적인 즐거움을 주지만 선열식과 같은 본연의 기쁨을 주지는 못합니다. 왜 그렇겠어요? 바로 인공적인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하면 차는 치금(稚禽)의 혓바닥처럼 아주 작고 여릴 때 따서 덖은 것을 하늘이 내린 가장 맑은 물을 넣어 우려낸 자연의 차지요. 차를 덖을 때는 정성을 다해 적당히 볶아서 중정불과(中正不過)의 맛을 내는 차, 자연 그대로 맛을 지닌 차를 어떻게 커피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4절
제호니 감로니 불리며 예부터 그 이름 전해왔노라 (醍甘露舊傳名).
불교에서는 가장 맛있는 것을 제호미(醍味)라고 합니다. 우유를 몇 차례에 걸쳐 정제한 우유의 정액(精液)으로 치즈 같은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감로라는 것은 절에서 아침 예불 다게(茶偈)에서 ‘제가 지금 맑은 차를 감로의 차로 만들어서 삼보님 전에 받들어 올리오니 원컨대 어여삐 여겨 거두어 주소서’라는 건데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맛을 뜻하는 겁니다. 이렇게 ‘차’라는 고유명사가 붙여 지지 않았을 때는 최고의 맛을 지칭하는 단어 ‘제호’와 ‘감로’를 사용해서 차를 불렀던 겁니다.
감로와 제호의 맛, 문향(聞香)을 한번이라도 느끼고자 하고 느낀다면 그것은 바로 극락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며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극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는 그 순간이 바로 극락일 것입니다.
#5절
차는 술 취한 사람을 깨우게 하고 졸음을 적게 하나니 이는 주공이 이미 시험한 바이니라(解醒少眠證周聖).
차의 이름은 차(茶), 가(), 설(), 명(茗), 천() 이라고 하는데 일찍 따는 것을 차(茶), 늦게 따는 것을 명(茗) 또는 천()이라고 합니다. 음식 백과사전 격인 <이아(爾雅)>에는 ‘가고도(苦)’라 했는데 여기서는 표현을 달리해 ‘가차고(茶苦)’, 즉 가()는 ‘쓴 차’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 <이아>를 널리 증보한 책인 <광아>에는 ‘형주와 파주 사이의 차를 마시면 술을 깨게 하고 잠을 적게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차에는 카페인 성분이 들어 있어 뇌에 스민 알코올 성분을 쉽게 중화시켜 정신을 맑게 합니다. 또 차를 마시면 잠을 줄이게 해 수행자들이 차를 즐겨 마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6절
제 나라의 영은 조밥에 차나물을 곁들여 먹었다고 하더라(脫粟伴菜聞齊).
초의 선사의 역주를 보면 <안자춘추(晏子春秋)>에는 제나라 경공(景公) 때의 안영(晏)은 거친 조밥에 고기 세 꼬챙이와 달걀 5개와 차나물을 먹었다고 합니다. 차나물은 소화를 돕고 밥맛을 돋우면서 머리를 맑게 하기 때문에 안영이 살았던 2500년 전부터 이렇게 음식과 함께 차나물을 먹었던 것입니다.
#7절
우홍은 재물을 올려 단구산에 엎드렸으며(虞洪薦乞丹邱), 모선은 구명을 보여 진정을 유인하더라 (毛仙示引秦精) .
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늘과 신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차의 신령성에서 차의 약성, 그리고 식용으로 사용했음을 보여주다가 차가 제상에 올려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인들은 좋은 차를 구할 때 재물을 차려놓고 좋은 차를 만나게 해 달라고 신선에게 빌었습니다.
#8절
땅 속의 귀신도 만금으로 사례하기를 아끼지 않았느니라(潛壤不惜謝萬錢) .
원염현(剡縣)에 사는 진무의 아내가 젊어서 남편을 잃고 두 아들과 사는데 차를 즐겨마셨습니다. 집 뜰에는 옛 무덤이 있어 차를 마실 때마다 차를 먼저 올려놓고 제를 지내니 두 아들이 무덤을 파헤치려 했으나 어머니가 말렸습니다. 그날 밤 진무의 아내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당신의 도움으로 화를 면했고 또 매일 같이 좋은 차를 주기까지 하니 땅 속에 묻힌 해골이라 할지라도 어찌 예상의 은혜를 잊겠습니까”라고 했어요. 다음날 아침 부인이 뜰에 가보니 돈 10만량이 놓여있었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는 뜻밖의 횡재는 횡재가 아니라 그동안 쌓은 선업에 대한 선과입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가치에 대해서 아무리 추구를 해도 결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여러분의 마음 씀씀이(用心)에 달려있습니다.
# 내면의 차향, 인간본연의 향기 발산하자
왜 초의가 이렇게 차나무를 세워놓고 온갖 미사여구로 찬탄할까요? 결국은 지금 여러분, 나 스스로가 차나무처럼 내면의 차향, 인간 본연의 향기를 발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차의 맛은 무엇입니까? 차맛은 아무리 좋다고 설명해도 모르고 마셔봐야 압니다. 삶의 길이가 길어지고 폭이 깊어질수록 차의 맛 ‘선열식’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문에는 ‘일심이문(一心二門)’ 중생세계로 가는 생멸문(生滅門)인 망심과 모든 괴로움을 여의고 해탈로 가는 진여문(眞如門)인 진심이 있습니다.
차와 가까이 할 수 있는 마음자세는 진심이요 차를 멀리하고 자연을 멀리하는 마음자세는 망심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차는 마음 씀씀이에 대한 깨달음과 지혜를 줄 것입니다. 이것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본래 알고 있는 것을 자각하도록 알려주는 것입니다.
시간이 부족해 동다송 전문을 다루지는 못해서 많이 아쉽지만 미당 서정주의 시에 ‘연꽃 만나러가는 바람 아니라 연꽃 만나고 오는 바람같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큰 기대를 가지고 연꽃을 만나고 돌아오는 바람은 연꽃의 향기에 젖어 돌아옵니다. 바람의 가치는 그만큼 올라가는 것이지요. 여러분과 동다송과의 만남이 비록 짧은 만남이지만 그 가치는 이전과는 엄청나게 다를 것입니다. 향기를 지니고 향기롭게 사십시오.
정리=이상언 기자 un82@buddhapia.com
사진=박재완 기자 waniholl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