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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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자기 마음속에 부처님의 밝음이 영원한 것입니다
자기 내공에 모든 거를 일임시켜 놔 버려야

여러분 마음에 부처님이 밝게 계시고
여러분 마음도 밝으니
그렇게 마음으로 지어서
자기가 고통을 받지 마시고
한 철 즐겁게 사세요

마음의 불을 밝힐 수 있으려면…
운?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 며칠 전 선원에서는 장엄물 점등식을 했습니다. 평소에도 부처님 가르침을 늘 새기며 살려고 하지만 생활에 쫓기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잊고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 점등식을 계기로 저희들도 마음의 불을 환히 밝힐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뜻을 일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우리가 보는 등(燈)은 우리의 모습 즉, 이 몸을 등으로 표현했고, 등 속의 촛대는 우리네들 중심을 표현했고, 그 불은 영원한 우리의 불성을 뜻한 것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이면 켜는 그 등의 뜻을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마음과 더불어, 내 마음을 계발시키고 내 마음을 진화시켜서 승화할 수 있는,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마음은 체가 없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그 의식, 욕심, 아집 그런 것을 버리지 못해서 지금 살아나가는 모든 것에 걸리고 자기를 꽁꽁 매 놓고 삽니다. 자기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 의식 자체가 업식이 돼서 요다음에 그 몸을 벗지 못하고 또 다시 출현을 해야 하는 그런 문제가 생기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항상 중생이요, 벗어나면 영원히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삶의 길을 인도해 주시면서 ‘어려운 사람이나 약한 사람이나, 또는 고통스러운 사람이나, 그것을 한생각에 놓으면 그 고통은 다 사라지느니라. 네 아집을 갖지 않고, 욕심이 없고, 또는 남을 탓하지 않는다면, 한마디로 말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참 사람이 됐으니 부처도 될 수 있느니라.’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랜 세월을 이렇게 배우고 나가면서도 자기 마음속에 부처님의 밝음이 영원하다는 것을 한 치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정자와 난자가 한데 뭉쳐서 그 한 놈만 태어나게 되는데, 업식은 거기에 다 한데 뭉쳐져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된 거기에서 가지각색의 그 마음을 다 조절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속고 삽니다.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기의 경험대로 사세요. 누가 이렇게 하란다고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란다고 저렇게 하고, 이거 버리란다고 버리고 이렇게 남을 따라가는 그런 자세로 살지 말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나가는 한 철의 인생, 한 찰나의 살림살이, 이 도리를 우리 인간으로서 잘 알 수 있고 파악할 수 있고 또 할 수 있다면, 목마르면 물 마시고 똥마려우면 똥 누고 잠자고 싶으면 잠자고 하는 세 가지뿐만 아니라 이 삼천대천세계의 원리가 거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알고 가야 할 시급한 문제입니다. 그러니 부처님 오신 날이 어떠한 날인지도 모르면서 등을 켜고, ‘우리 이 식구가 잘되게 돼야지.’ 하고 등을 켜는 그런 어리석은 마음은 버리세요. 등을 켤 때 우리 마음이 항상 온 누리에 같이 하고 있고, 같이 공생하고 같이 공용하고 공체로서 사는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상대가 있기 때문에 온 누리가 있다는 것. 보이지 않는 데도 생각이 있고 보이는 데도 생각이 있고, 보이지 않는 데도 생명이 있고 보이는 데도 생명이 있으니 이렇게 조화를 이루면서 화목하게 돌아가는 이 찰나찰나의 생활, 시공이 없는 생활, 이것이 그대로 밝은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밝다, 밝지 않다, 컴컴하다 하고 온갖 고(苦)의 생각을 다 하면서 거기에 걸려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길을 인도하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마음, 고통 속에서 벗어나서 즐거운 마음, 이 양면을 다 누가 하는지 그것을 알기 때문에 자유스러우니라. 여러분은 마음 한생각이면 자유스럽고, 한생각에 빠지면 바로 고가 붙어서 중생이니라. 그러니 한생각을 잘하라. 너희 맘대로 하는 생각인데 어찌 그렇게 어둡다고 하느냐.’ 이렇게 모든 것을 자세히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니 바로 여러분 마음에 부처님이 밝게 계시고 여러분 마음도 밝으니 그렇게 마음으로 지어서 자기가 고통을 받지 마시고 한 철 즐겁게 사세요. 그렇게 밝게 살아도 한 철인데 어찌 그렇게 이 모습을 가지고 바쁘고 고통스럽게 사십니까. 부처님이 일러 주신 대로 밝고 고통스럽지 않게 나를 버린다면, 아집을 버린다면, 내 것을 버린다면, 그렇다고 해서 버리라는 게 그냥 버리라고만 하는 게 아닙니다. 생산이 돼야지요.
용광로에 헌 쇠를 넣으면 새 쇠로 생산이 돼서 나오지만, 버리란다 놓으란다 이랬다고 해서 그냥 팽개치고 사량으로 그렇게 하시면 생산이 돼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여러분의 주인공에서 나오고 주인공으로 들고, 즉 핵이 질량이고 질량이 핵이듯 여러분은 그대로, 우리가 먹고 싶으면 요런 음식도 해 먹고 조런 음식도 해 먹고 이런 거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용도에 따라서 여러분 앞에 닥치는 대로, 해 먹을 수 있는 대로 해 먹을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면서 중세계에서 상세계로 승화시키고 하세계로 퇴보해서는 아니 된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은 다 아셔야 합니다. 하루하루를 밝게, 언제나 영원한 밝음을 가지시고 부처님 오신 날만 등을 켜는 게 아니라 인등을 항상 켜시고 계신다면 오늘은 항상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니 공부를 열심히 하시고 항상 내 마음을 밝혀서 그렇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앉으면 졸리기만 해요
운? 스님 법문 듣고 발심해 아침 저녁으로 조용히 앉아서 관하는 시간을 가져 보고자 했는데 앉으면 졸리기만 해서 집중이 잘 안됩니다. 열심히 수행하고 싶은데 스님, 이 졸음을 어떻게 극복하면 좋겠습니까.
답? 그러니까 공부를 하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을 쓰는 거죠. 어떻게 방법을 쓰든지 간에 ‘나’를 만나면 되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남자들이 여자 애인을 생각하고 여자들이 남자 애인을 그리워하듯 그런 식으로 방편을 쓰는데 그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에요. 왜, 이 사람의 사량이라는 게 있잖아요?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니까 그런 방법을 대기도 하거든요.
생각하기에 달린 겁니다. 생각에 ‘애인이다’ 이러면 아예 그냥 가까운 마음이 들어가죠. 그건 방편이지 속임수가 아닙니다, 진정이지. 그래서 딴 사람을 그려서는 안 되죠. 자기 내공의 그 주인, 내 불성이 있는 주인과 내 몸이 있는 주인과 한데 합쳐지기만 하면 그 물그릇은 그냥 없어지는 거죠.
그러니 하도 졸리다니까 결국은 이런 방법을 댄 거죠. 예를 들면 대통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대통을 이렇게 이 끄트머리만 삐죽하게 해서 턱 밑에다 딱 대 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조금만 졸아도 여기 퍽 찔리게끔 돼 있어요. 그러니깐 그걸 놓고선 앉아 있는 거예요.
또 어떤 선지식은 그랬죠. 대통이 이렇게 구멍이 뚫렸지 않습니까. 좀 어리석은 듯 해야죠. 그 구멍 뚫린 속에서 소 눈깔이 나올 테니 이거를 꼭 지키고 있으라고 그러니까 이걸 꼭 그걸 노려보고, 하여튼 한 시도 눈을 다른 데 두어선 안 된다고 했거든요. 그러니 그런 것도 그렇고요. 여러 가지가지죠. 그런 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날마다 열 시간을 앉아 있다 해도 바깥에다 두고 하면 안 됩니다, 이거는. 안에다, 내공에다 집중을 해야지. 그러곤 자꾸 이렇게 탁탁 쳐 주는 겁니다, 주인공에다. 탁탁 쳐 주면 그게 결국은 뚫리게 마련입니다, 이게. 그냥 뭐 애절복절하는 거죠. 애절복절 안 하면 안 되잖아요. 애절하게…. 그래서 옛날에 선지식들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고양이가 쥐 노리듯, 아주 배고픈 어린애가 엄마 젖 찾듯 이렇게 하라고요. 그러면 반드시, 반드시 이건 꼭 되게끔 돼 있다고요.
그리고 수행이 안된다 할지라도 그냥 저절로 자기가 이런 게 불편하다 저런 게 불편하다 하는 거를 내공에다 그냥 놔 버리세요. 일임시켜 버리세요. 그렇게 하고 놔두면 자기가 생각한 것대로 들어오게 됩니다. 닿게 됩니다. 그러니 열심히 정진하세요.

집안이 거덜나게 돼
운? 저의 아버지께서 믿었던 친구 분께 보증을 잘못 서 줬다가 그 분과는 척을 지게 되고 저의 집안은 거덜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급한 마음에 처음으로 가까운 절에 가서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면서 정성껏 빌었는데도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현대불교신문을 보게 됐고 답답한 마음에 스님께 도움 말씀 청하고자 합니다.
답? 어려운 일이 부딪쳤다 하면 그걸 누가 부딪치게 한 겁니까? 다 자기가 해 놓고 자기가 부딪치게 한 거지 딴 놈이 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거예요.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상대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듯이, 내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렇게 상대성 원리로서 내가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고 부딪칠 수도 있다 이겁니다. 각자 내가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 내 마음의 주인으로서 그것이 다 가능한 겁니다.
그러니까 급한 일이 생겼다 이럴 때는 그 마음의 주인한테 모든 거를 일임해 버리고 놔 버리세요. 그럼 거기에서 다 해결할 수 있다 이겁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는 내 마음의 주인이 다 해결을 하고 보이는 데서도 마음의 주인이 움죽거리게 한다 이거예요. 모든 것을, 일체를 다.
그 마음이 중요한 겁니다. 자기가 마음을 잘못 먹어 가지고 구덩이에 빠지는 수가 있습니다. 그 마음이 문제지, 절에 가고 오고 이게 문제가 아니에요. 돈을 많이 내고 적게 내고 이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마음이다 이거예요. 마음이 그렇게 부족하면 남한테 잘한다 하면서도 벌써 남한테 좋지 않게 하는 수가 많아요. 그런데 자기가 자기 하는 일을 모르죠.
그래서 하나하나 일거일동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주인이 하는 것이니까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항상 그 마음을 변치 말고, 자기 믿는 마음을 변치 말고 타의에서 구하지 마세요. 어느 누가 있어도 타의에서 구하게 되면 마가 생겨서 달려든다 이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네 집안이 산란해지고 우환이 생기고 그러는 걸 누구한테다 항거합니까.
그러니까 마음이 산란하면 살림도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고, 차분하게 자기 자신의 마음의 주인한테 탁 일임시키고 중심을 잡고 있으면 항상 이렇게 걸어가도 무겁게 걸어가게 되고 바람이 불어도 끄덕도 안 하고 그냥 무겁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삼 톤 무게가 됩니다. 그러니 아무리 바람이 불고 비바람이 친다 해도, 삼 톤이라면 얼만 줄 아세요? 삼만 톤이라도 해도 되죠. 삼만 톤이 무겁게 걸어가는데 어디 바람에 쓸리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가볍게 그냥 사량으로서 ‘아이구! 이러면 좋단다. 저러면 좋단다.’ 내가 이러면 이것은 중심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삼만 톤이라는 게 무겁질 않고 그냥 가볍게 되니까 결국은 땅에 이렇게 발을 딱 디디면 삼만 톤이라는 게 무겁게 디뎌져야 비바람이 불고 뇌성벽력을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무겁게, 가볍지 않게’ 그래야 생활도 무겁게, 값비싸게 돌아가고 내 몸도 값비싸게, 무겁게 광채가 바깥으로 나며 향기가 나오고 여러 사람한테 이익 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 중생을 자기가 이익 하게 하니 어찌 남한테 이익이 안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 중생이라는 것은 항상 남을 접하고 상대를 두고 살아나가는데 어찌 해가 남한테 가겠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향기요, 그것이 빛이요, 그것이 능력이요, 그것이 보살행이다 이겁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그런 이치예요. 그러니 우리가 종교라는 이름과 더불어 같이, 이 종교라는 자체가 이름일 뿐이지, 우리는 한 배를 타고 한 지붕 밑에서 마음을 닦는 그런 공부를 참구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본래 닦을 것은 없으나 자기 마음들이 자기 마음들 중심을 완전히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나니깐 마음을, 그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쁜 일은 행하지 말고 좋은 생각을 잘해라 이겁니다. 생각을 잘못한다면 내 육신도 고달프게 되고 가정도 고달프게 됩니다. 그러니깐 마음을, 그 중심을 탁 쥐고서, 한번 한생각을 낼 때 이 삼세 우주간 법계가 들썩들썩해야만 되지, 그렇게 가볍게 살면 가정도 가벼워지고 하는 일마다 가벼워집니다. 그러니 바람에 쓰러지게 돼 있죠. 구덩이에 빠지게 돼 있고요. 그걸 누구한테 항거를 하겠습니까.

자식에 대한 애착이 커서
운? 안녕하세요? 예전에 제가 자식을 갖기 전에는 자기 자식을 너무 과잉보호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왜 그럴까 싶었는데 제가 이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자식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보니 자꾸 충돌도 일어나게 되고요. 어느 새 내 뜻대로 자식이 따라 주길 바라게 됐나 봅니다. 자식에 대한 이런 애착을 두면 안 되겠죠?
답? 애착을 두지 말라는 거는, 부모한테도 그렇게 애착을 두지 말고 효도를 하라고 그랬습니다. 그건 자식이나 부모나 또는 남이나 똑같이 항상 남을 이익 하게 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겸손할 줄 알고, 마음으로 고개 숙일 줄 알고, 이렇게 살면 누구한테든 인과응보라는 그런 소리조차 없을 것이고 또는 자식과 부모지간에 다시 만난다 할지라도 금끼리 만나고 이렇게 된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내가 고생을 하고, 이렇게 받아야 하고, 이렇게 아파야 하나 이러지만 그것이 애당초부터 자식이 자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인연에 따라서, 인과응보에 따라서 만났기 때문에 그 고통을 면치 못하고 애를 쓰고 이렇게 살아나가는 거죠. 그렇다면 그런 대로 우리가 지금 살아 있을 때 이 도리를 알고 배워야, 지금 살아 있을 때의 그 애착과 모든 걸 다 몰락 버리고서, 애착을 두지 않고 욕심도 두지 않고 내가 한생각 전부 놨을 때 죽어서도 그것은 시공이 없는 그 대공의 한자리를 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끄달리지 않고. 우리가 윤회에 말리는 것도 억 겁을 거쳐서 말리지만 우리가 한생각 돌려서 이 도리를 몰락 놔 버리고 안다면 영원토록 또 말리지 않고 끄달리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예전에 내가 산으로 돌아다닐 때 빨치산으로 붙들렸거든요. 그러니 어디 가서 죽은 줄 알았는데, 어머니가 조회를 했나 봅니다. 조회를 해서 산으로 찾아온 거죠. 그런데 보니깐 부모는 부모이기 때문에 참, 그 마음은 어디다가 다 할 수가 없어서, 나는 사람 같지도 않으니까 어머니가 그 자리에 펄떡 주저앉으시면서 그만 몸을 못 쓰게 돼 버렸던 모양입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그렇게 됐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또 몸을 못 쓰고 뭐고 그런 건 아랑곳없이 거기에서 그냥 “어머니! 어머니의 진짜 자식이라면 요다음에 다시 내가 사람이 돼서 올 것이고 어머니의 자식이 아니라면, 진짜 사람이 못된다면, 다시는 어머니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아주 애착을 떼 버리시고 죽었다고 생각을 하십시오.” 하고 떠났거든요.
떠날 때에 어머니가 좋은 옷을 두 벌을 가져왔는데, 바지가 이게 다 떨어지고 그랬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몸에다가 그 옷을 걸치면 뭘 하겠습니까. 아니, 말도 못하게 찢어지고 피가 나고 딱지가 앉고 사람 같지도 않은 데다가 그 옷을 입으면 뭘 하겠어요? 그래서 가다가 그 좋은 옷은 또 딴 사람 주고 이러고는 한 산모퉁이로 돌아섰을 때 가랑잎이 자욱자욱 밟히더라고요. 그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나를 울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이렇게 덧없는 인간의 이 모습의 그림자를 보시고 저렇게 쓰러지셨으니 눈물이 너무나 쏟아지는 거예요. 이것마저도 보이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이렇게 보이게 됐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나는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냥 돌아섰어요.
그런 예가 있듯이, 진짜 자식이라면 금과 금이 마주 있을 때에 금은 둘이 아닌 겁니다. 금은 금이기 때문이죠. 근데 뭘 애착을 갖고 그럽니까. 다시금 이 세상에 나왔으면, 그 모습을 한 번 만났으면 헤어지는 일이 틀림없을 텐데, 헤어졌다 만났다 헤어졌다 만났다 반복하는 이 시점에서 무엇을 내 자식이라 하고 무엇을 내 부모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내가 뿌린 거니까 내가 해결을 해야겠으니 착이 없이 그대로 이익 하게 시봉을 하는 거지요. 나는 예전에 아주 못생긴 소나무를 봐도 “아이, 너도 나와 같이 못생겼구나. 이 위의 순을 자르면 넌 모가지까지 달아나가니 너하고 나하고 만난 인연도 인연이니 우리 같이 살아 보자.” 하고 맨 밑바닥에 달린 그것을 소나무 가지로 꺾어서 그 잎을 씹어 가면서, 또는 그 대를 씹어 가면서 물을 마시고,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양심에 부끄럽진 않습니다. 내 생각으로 누구를 해치려고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예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이건 끊임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 간다 하더라도 실과나무는 오늘 저녁까지는 심어야 한다.’ 이런 게 투철하죠. 착이 없으면서 그대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인과응보로서, 유전성으로서 그건 그대로, 과보대로 그냥 가는 거죠. 그러니까 막지 말라 이거예요. 애를 쓰고 괴롭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도 괴로울 게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뭐가 그렇게 괴로울 게 있습니까? 다 우리가 해 놓고서, 자기 자신들이 해 놓고서 그렇게 된 거니까 이제부터라도 알고 착을 탁, 끊어서 놔 버려라 이겁니다. 내 마음의 주처가 있듯이, 그 인연된 사람들의 마음의 주처도 엄연히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못되게 하진 않아요, 절대로요. 그러니까 놔 버려라 이겁니다.
누구든지 발등에 불이 떨어져 보세요. 어미 아비 생각 하고 자식 생각 할 사이가 없이 그냥 뛰죠. 자기 살 구멍은 다 찾습니다. 그런데 왜 애를 써야 합니까? 애를 쓸 필요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만남이 이 짚단을 이렇게 한데 붙여놨다가 헤어질 때 되면 훌훌 헤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근데 왜 애를 씁니까. 언제 적의 부모 자식이며 언제 적의 부부였고, 언제 적의 한 식구였습니까.
예를 들어서 이런 게 있어요. 부모가 “넌 이리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랬다 한다면 자식은 “난 이리로 가는 게 좋겠소.” 그럴 때에 이 부모가 생각할 때 ‘아이, 이리로 가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겁니다. 그럴 때에 자식은 부득이 이리로 가겠대요. 예를 들어 얘기예요. 그러면 “아! 네가 그리로 가는 것이 옳다. 그리로 간다 할지라도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니까 항상 가는 대로 길을 네가 찾아가면 되니까.” 하고 하나도 애를 쓸 필요가 없어요. 떨어졌다 붙었다 이래도 애를 쓸 필요가 없어요. 언젠가는 자기가 찾아 자기가 가게 돼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뒷받침을 그렇게 해 주고 원하는 자에게 마다 안 하시고 중생들에게 해 주셨죠. 지금까지도 해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있는 이상 부처님은 항시 살아 계시니까요. 아주 꽉 차 계십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사실 우리 인생이라는 게 시한부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학교 학생들이 공기 가지고 놀지 않았습니까. 또 자치기도 하고 손으로 이렇게 꼽아서들 하고 놀잖아요. 잠시 잠깐 그렇게 와서 놀다가 종 땡땡 치면 그냥 쓱쓱 지워 버리고 그냥 들어가잖아요? 우리가 소꿉장난하다가도 그냥 그렇게 집으로 들어가듯이, 그냥 “아무개야!” 부르면 “예!” 그러고선 다 지워 버리고 들어가듯이, 우리 인생이 그런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착을 둘 게 뭐가 있어요? 그냥 내던져라 이겁니다. 그렇게 바로 움쭉을 안 하는 그 마음이 돼야만이 자기 마음대로 자유자재한다 이 소립니다. 잠시잠깐 캠핑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그 뿐이라는 것을 아신다면 부모 자식이라 할지라도 집착하지 않고 그런 마음들도 자기 마음 중심에 항상 놓아 가면서 살아야 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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