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제실상은 시종이 없고 공간적으로 한계가 단절
삼관은 일심서 일어나고 오안차별은 하나의 지혜
深尋此偈意 非惟具足分別中觀之相 亦是兼明前二種方便觀門旨趣 當知中道正觀 則是佛眼一切種智 若住此觀 則定慧力等 了了見佛性 安住大乘 行步平正 其疾如風 自然流入薩婆若海.
이 중관론 사구게의 의미를 깊이 연구하면 중관의 모습을 빠짐없이 만족하게 분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앞에서 나왔던 두 종류의 방편관문의 귀결점까지도 함께 밝힐 수 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중도의 정관은 바로 불안이며 일체종지라는 점이다. 가령 이 관법에 안주하면 선정과 지혜의 힘이 평등하여 분명하게 불성의 이치를 볼 수 있다. 대승에 안주하면 수행마다 평탄하고 정직하여 그 빠르기가 바람과 같이 자연스럽게 깨달음의 세계로 흘러 들어갈 수 있다.
천태종 제2대조사인 혜문(慧文)대사가 중관론을 읽다가 사제품(四諦品)에 나오는 ‘인연소생법 아설즉시공 역명위가명 역명중도의(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 亦名爲假名 亦名中道義)’라는 사구게에 이르러서 제법은 인연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즉공 즉가 즉중 아님이 없음을 단박에 깨우치고 나서 일심삼관의 이치가 원만하게 되었다.
그 뒤에 혜문대사는 일심삼관의 이치를 남악혜사(南岳慧思)대사에게 전수하였고 남악혜사대사는 천태지자(天台智者)대사에게 전수하여 지자대사가 이를 더욱 광대하게 펼쳤다.
지자대사는 마침내 삼대부오소부(三大部五小部)를 설하여 천태종을 창립하고 부처님 일대설법시기를 다섯 시기로 교판하여 모든 종파를 꺾고 뭇 학설을 뛰어넘었다. 따라서 이 사구게야말로 천태종이 건립한 삼관의 발원한 근본처소이기 때문에 그 의리가 심오하고 오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사구게 의미를 연구하면 중관의 모습을 분별할 뿐만 아니라 앞에서 나왔던 공관 가관의 의미까지도 함께 밝힐 수 있다.
중도의 오묘한 관찰은 공관 가관을 무너뜨리지 않고 공관 가관은 중도를 떠나지 않는다. 따라서 삼관이 일심에 상즉하고 일심이 삼관에 상즉하여 시간적으로는 전후가 없고 공간적으로는 함께하지도, 차별이 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불안(佛眼)은 범부의 육안(肉眼)이 아니며 하늘나라의 천안(天眼)도 아니고 이승의 혜안(慧眼)과 보살의 법안(法眼)과도 동일하지 않다. 오직 불안만이 나머지 네 가지 안(眼)의 작용을 빠짐없이 갖추어 오안(五眼)을 하나의 ‘안’ 속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 없고 분명하지 않은 일도 없으며 보지 못하는 것도 없다.
불안으로는 항하사와 같은 한량없는 세계 밖에서 내리는 빗방울의 숫자까지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안’이라고 부른다.
게송에서는 “천안은 걸림 없이 소통하고 육안은 장애를 통과하지 못하며 법안은 속제만 관찰할 뿐이고 혜안은 공의 이치만을 알 뿐이다. 하지만 불안은 천개의 태양이 모든 사물의 차별을 관조하나 그 자체는 동일하다”라고 하였다.
불안은 십법계의 차별적인 모습을 보편하게 관조하지만 차별이 바로 차별이 아니어서 그 자체가 다시 하나의 동일한 이치가 되고 동일한 이치에서는 차별이 없지만 속제에서는 차별이 나기 때문에 그 차별을 관조하면 그것이 바로 속제의 가이고, 속제의 차별에서 바로 차별이 없어 그 자체가 동일한 하나의 이치인 진제의 공이며, 이처럼 진제의 공과 속제의 가가 둘이 아닌 것이 바로 중관인 것이다.
이로서 삼관(三觀)은 일심에서 일어난 관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삼관의 차별이 바로 일관(一觀)인 것을 오묘한 관법이라고 말하며, 오안의 차별이 하나의 안인 것을 불안이라고 하며, 삼지(三智)가 하나의 지혜인 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말한다.
수행인이 이 관법이 안주하면 선정과 지혜의 힘이 평등하여 명료하게 불성의 이치를 볼 수 있다. 진제 공은 바로 선정이며 속제 가는 바로 지혜이다. 공과 가가 둘이 아닌 것을 가리켜 선정과 지혜의 힘이 평등하다고 한다.
이승은 진제 공쪽에만 치우쳐 있고 보살은 속제 가쪽에 치우쳐 있는데, 부처님이 안주한 곳에 이르러야만 공과 가가 두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중도의 오묘한 관법이 현전하여 분명하게 불성을 보고 대승에 안주할 수 있게 된다.
법화경 비유품에서는 ‘삼승에게 평등하게 큰 수레를 하사했다’는 비유를 인용하였는데, 이는 수행인이 원돈지관(圓頓止觀)을 닦는 것을 말한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그 수레는 높고 광대하여 뭇 보배로 아름답게 꾸며졌다”라고 하였다. 또 “흰 소에게 멍에를 채워서 수레를 끌게 하였는데, 흰 소의 피부색은 깨끗했으며 형채는 특이했고 힘이 세었으며 걸음걸이는 올바르고 바람처럼 빨랐다. 그리고 많은 종들이 수레를 따르면서 호위하였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이 부분을 간략히 인용했을 뿐이다.
대승은 하얀 소가 이끄는 큰 수레를 지적한 것이다. 이는 삼관실상의 오묘한 이치는 시간적으로는 처음과 끝이 없고 공간적으로는 그 한계가 단절하여 즉공 즉가 즉중으로서 백계천여(百界千如)를 일념에 빠짐없이 갖추었다는 것을 비유했다. 그러므로 ‘대승’이라고 말한다.
흰 소(白牛)는 본성에 걸맞는 오묘한 관법을 비유한 것인데, 이는 삼제의 이치를 따라서 오묘한 삼관의 이치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흰 소에게 멍에를 채웠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흰 소가 이끄는 큰 수레인 것이다.
대승에 안주한다 함은 안주한다는 집착이 없이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인위적인 조작이 끊어진 상태에서 임의로 운행하면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흰 소의 걸음걸이가 올바르다’는 것은 삼관이 원만하여 지에 상즉한 관이고 관에 상즉한 지여서 선정과 지혜가 두 모습이 아니고 칠각지(七覺支)가 고르고 평등한 것을 말한다.
‘바람처럼 빠르다’는 것은 원만한 관법이 본성에 걸맞게 일어나 임의로 운행하면서 인위적인 노력없이 수행하는 도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말하며 또 팔정도(八正道)를 중도로 실천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신속하게 도달함을 비유한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증과장(證果章)에서 수행했던 지관은 정수행장(正修行章)에서 밝혔던 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 밝혔던 것은 십지(十地)이전의 분별적인 수행인 삼현(三賢)보살의 유루연수(有漏緣修)이며, 지금 밝히는 것은 십지 초지인 견도위(見道位)이후에 본성에 걸맞게 분별없는 마음으로 수행하는 무루진수(無漏眞修)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승에 안주하면 자연스럽게 깨달음의 세계로 흘러 들어간다는 말을 듣는 자는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는 수행으로 얻어진 경계만을 순수하게 밝혔으며 아울러 그 공덕까지도 찬탄하였다.
이와 같은 점들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면 다음문장에서 밝히는 의미와 증과장 이전의 아홉 장의 의미가 모두 밝게 드러나기 때문에 중복되는 번거로움은 없을 것이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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