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若不見性 終日茫茫 向外馳求 覓佛元來不得 雖無一物可得 若未會亦須參善知識 切須苦求 令心會解 生死事大 不得空過.
자성을 보지 못하면 아무리 바쁘게 밖으로 구하며 부처를 찾아도 원래 찾을 수 없는 것이니라. 비록 한 물건도 얻을 것이 없다고는 하나, 만약 깨닫지 못했다면 선지식을 찾아가 간절히 물어서 마음이 열리게 해야 한다. 생사 문제는 큰 것이니 헛되이 보내지 말라.
[해설]
우리가 수행을 한다고 했을 때 정확히 알고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가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것은 우주의 실상자리를 항상 마음에 두고 있기에 가능합니다. 모든 경계가 끊어진 자리에 생각을 두고 있으니 걸림이 없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밖을 내다보지 못하잖아요. 우주의 실상자리인 진여자리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경우라면 이 번뇌 망상이 다 끊어진 겁니다. 업이 다 소멸된 경우에는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벽도 투시(透視)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경지까지 들어가면 걸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육신통(六神通)을 갖춘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미국이 멀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먼 것이 아니예요. 견성을 해서 부처님 경지에 들어가면 걸림이 없습니다. ‘부처란 자유자재한 사람이며, 본래 갖추고 있는지라 쓸데없이 밖으로 구하려하지 않는 사람이며,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우주의 실상자리와 하나가 되어 무념무상의 경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성을 보지 못하면 아무리 바쁘게 밖으로 구하며 부처를 찾아도 원래 찾을 수 없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우주의 근본 실상자리, 둘이 아닌 하나의 마음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바쁘게 밖으로 구하며 부처를 찾아도 찾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부처의 실상자리는 지금 체(體)에서 어떤 것이든 하나로 본다면 상관이 없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자성을 보지 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죽비와 우주가 하나란 것을 아는 사람은 이론적으로는 바로 자성을 본 겁니다.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예를 들어 관세음보살님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일념으로 염원하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말을 믿고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서 도와주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찾는다면 외도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관세음보살님을 찾는다면 영원히 성품을 볼 수 없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자성 가운데 부처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밖에 있다는 생각으로 찾았던 분들입니다. 이런 수행을 하는 분들은 성품을 볼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용(用)에서 보면 ‘관세음’ 하는 그 놈이 우주와 하나고, ‘지장보살’을 염하면 그놈도 우주와 하나라는 것을 알고 하셔야 됩니다. 이렇게 하시면 자성에 마음을 두고 하는 것이지만, 관세음보살님이 따로 있고 지장보살님이 따로 있어서 그분을 보려고 하거나 그분을 찾으려고 한다면 외도이며, 영원히 부처를 볼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은 ‘비록 한 물건도 얻을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알지 못하면 선지식을 찾아가 간절히 구하여 마음을 알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실상 자리에서는 그 어떤 것도 얻을 것이 없는 겁니다. 반야심경에서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즉, ‘지혜도 없고 또한 얻을 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얻을 것도 없다고 하지만 선지식을 찾아가 간절히 가르침을 받아서 성품자리를 닦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이라는 말을 했을 때는 대부분 ‘착할 선(善)’자를 생각하지만 그런 의미로 쓰면 안됩니다. 우주의 실상자리를 마음이라고 하기도 하고 인격적으로 부처님이라고도 하고 또는 선이라고도 합니다. 선이 곧 부처님 마음이고 마음이 곧 선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우주를 그대로 하나로 볼 수 있고 하나로 보고 법을 설하는 분을 우리는 선지식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선지식이라는 말을 했을 때 선(禪)은 지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이미 문자언어를 초월한 자리이기 때문에 선을 가지고 지식의 논리를 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선을 말로 이해시키려고 하니까 설명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을 정확히 알아야지 바른 공부를 할 수 있기에, 달마 대사는 ‘나고 죽으며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매우 큰일이니 헛되이 보내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겁(劫)을 통해서 보면 한 생이 참 짧은 생입니다. 한 생을 마감할 때 되돌아 생을 생각해 보면 꿈에서 깬 것과 똑같은 짧은 순간입니다. 우리들 진짜 마음은 천년 전이나 천년 후나 항상 그 자리거든요. 우리의 본래마음은 생사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 태중에서 나왔을 때도 항상 그 자리인 것입니다. 육신은 껍데기이고 진짜 나라고 하는 자리에서 봤을 때는 어렸을 때 마음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그 자리입니다. 그래서 90세를 살았어도 되돌아보면 꿈속에서 깬 것과 똑같은 겁니다. 불생불멸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모르니까 죽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 청주 혜은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