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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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수행의 목표는 견성
[원문]
善星旣如此 今時人 講得三五本經論以 爲佛法者愚人也 若不識得自心 誦得閒文書 都無用處 若要覓佛 直須見性 性卽是佛 佛卽是自在人 無事無作人 若不見性 終日茫茫 向外馳求 覓佛元來不得.
선성(善星)도 그러한데 요즘 사람들은 겨우 서너 권의 경전을 읽고 불법을 알았다고 하니 참으로 어리석다. 만일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문구나 외운다면 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 만일 부처를 찾으려 한다면 모름지기 견성해야 한다. 성품이 곧 부처이다.

[해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는 말이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곧 부처님 말씀이고 선은 곧 부처님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을 다른 말로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내 마음을 깨달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정진했을 때 우리가 하루 빨리 성품을 보는 계기가 오는 것이지, 경을 외우고 절을 하는 수행법은 큰 이익이 없습니다.
우리 불자들 가운데는 천수경이나 금강경, 혹은 법화경 공부를 몇 번씩 했다면서 스스로 공부가 많이 됐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품을 보지 못하고 참 뜻을 새기지 못하면 책을 읽는 것이 큰 이익이 되지 못합니다. 반면, 성품을 보는 마음의 눈을 뜨고 나면 모두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설령 금생에 눈을 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눈을 뜰 수 있는 참선 수행법을 택해야 합니다. 염불을 하더라도 우주 실상의 근본 자리에 마음을 두고 묵묵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성품을 볼 수 있는 자리에 다가가게 됩니다. 성품을 볼 수 있는 공식은 없습니다. 다만 길만 알려 줄 뿐입니다. 스스로 정진하되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누워서 하든, 앉아서 하든,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를 찾는다’는 얘기는 나의 본래 성품 자리, 즉 나의 불성 자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모든 불자들의 발원이고 수행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성불 하십시오’라고 인사를 하는 것 또한 성불할 수 있는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불자님들이 설령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처님 도량에 찾아 왔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깨닫는 것이 목적이어야 합니다. 어떤 수행을 하든, 무엇을 해결하고자 하든 마음을 어디에 두고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마음을 어디에 두고 하느냐에 따라서 이것이 화두가 될 수도 있고 외도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상 반야의 차원에서 보면 일체가 마음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나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자리를 우리는 ‘체(體)’라고 이야기 합니다.
열심히 정진을 해서 나름대로 견성했다고 생각을 하는 한 비구스님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스님이 좌선을 하고 있는데 한 비구니스님이 와서 주장자를 짚고 스님을 세 바퀴 돌더니 주장자를 세 번 내리치면서 “스님께서 한 소식 했다고 하는데 어디 일러 보십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체(體)’와 ‘용(用)’이 있다고 했을 때 ‘체’를 묻는 겁니다. 그러나 스님은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비구니스님은 “스님이 한 소식을 했다고 해서 배우려고 했는데 그냥 갑니다.” 하면서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나름대로 한 소식 했다고 자부한 이 비구 스님은 비구니 스님의 질문에 답을 못하고 당했다는 생각 때문에 분한 마음이 들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은사이신 천룡 스님을 찾아뵙고 비구니 스님이 다녀간 이야기를 들려 드렸더니 “그럼 네가 비구니가 한대로 나에게 해보거라.” 하시는 것이었어요. 제자가 스승을 세 바퀴 돌고 주장자를 내리치면서 “한 소식 했다는데 일러 보십시오.”하니 은사이신 천룡 스님은 엄지손가락을 턱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에 그 제자가 깨달았습니다. 은사 스님이 손가락을 턱 내민 순간에 제자가 도를 깨달은 겁니다.
그 때부터 누가 와서 법을 물으면 엄지 손가락을 내밀었습니다. ‘당신이 견성했다고 하는데 일러 보시오’ 라는 그 말은 우주의 근본 실상을 묻고 있는 겁니다. 우주의 실상은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그랬잖아요. 여기서 말을 하면 답이 아닙니다. 그러니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자리를 손가락을 탁 내밀어 답을 했단 말이죠. 그 때 제자가 깨달은 겁니다.
그런데 ‘용(用)’ 차원에서는 어떻게 보겠습니까? 예를 들어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 하고 묻는다면 여러분들이 꽉 막힌단 말이죠. 이것은 ‘용’ 차원에서 묻고 있는 겁니다. ‘체’ 에서는 오고 감이 없기 때문에 묻는 사람이 ‘용’ 차원에서 묻고 있는 겁니다. ‘용’ 이라는 말은 우주의 근본 실상에선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데 우리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존재는 모양이 없는 자리에서 나온 겁니다. 이 ‘안경 주머니’의 본질은 바로 마음에서 작용(인연)을 통해서 나온 것입니다. 마음에서 나왔으니 이 안경 주머니와 마음은 하나입니다. ■ 청주 혜은사 주지
200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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