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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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지관좌선법요 <80>
하나가 공하면 십법계가 모두 공하다

백천삼매가 마음의 근원에 함께 있으며
항하사 공덕이 동일하게 마음으로 귀결

故經云 前二種爲方便道 因是二空觀 得入中道第一義觀 雙照二諦 心心寂滅 自然流入薩婆若海 若菩薩欲於一念中具足一切佛法 應修息二邊分別止 行於中道正觀
앞에서는 단지 공관만 닦으면 선정에 치우쳐 중도를 증득하지 못하고, 가관만 닦으면 지혜에 치우쳐 중도를 증득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밝혔다.
따라서 반드시 지관을 동시에 수행해야만 선정과 지혜가 평등하여 중도를 증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앞에서 두 종류는 방편도인데 이공관(二空觀)으로 인해서 중도제일의제관(中道第一義諦觀)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이공은 아공과 법공이다. 범부 중생이 오온법에서 주재자를 억지로 세우는 것을 아집이라고 한다. 가령 색수상행식 등 다섯 법을 추구해본다면 오온법에는 자성이라고는 없어 아의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아공이라고 명칭한다.
오온법을 실재있다고 헤아리는 것을 법집이라고 한다. 가령 이 오온법은 허깨비와 같다는 것을 추구한다면 그 모두는 인연을 따라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도 역시 자성이 없는 법공이라고 한다.
공관을 닦으면 인공을 증득하고 가관을 닦으면 법공을 증득하게 된다. 만일 중도제일의관을 닦는다면 아집과 법집을 동시에 버리게 되어 공이라는 개념까지도 제거된다. 공과 집착을 둘 다 잊게 된다면 공공(空空)을 증득하게 된다.
진속이제를 쌍으로 관조하여 진제 공과 속제 유를 떠나지 않는 것을 중도관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과 유를 떠난 밖에 따로의 중도가 있다면 이는 단지 중도일 뿐이다. 이를 비유하면 마치 구름 밖에서 달을 보는 것과 같아서 원만한 중도라고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중도는 반드시 진속이제를 쌍으로 관조하여 양쪽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양쪽에 상즉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분명한 일념가운데 삼천성상(三千性相)과 백계천여(百界千如)를 갖추어 일념마다 공가중 아님이 없다. 가령 일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일념자체를 끝내 얻지 못하며 또 일념을 공이라고 한다면 삼천성상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일념이 일어날 때에 일념이 일어나는 곳을 관조해보면 그 실체를 끝내 얻지 못하므로 공의 의미가 되며, 동시에 일념이 일어나는 곳에 현상세계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을 가의 의미라고 한다.
일념가운데 세계가 분명히 나타나지만 그 일어난 실체를 끝내 얻지 못하므로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다. 따라서 공과 가의 이변을 쌍으로 떠난 자리에서 바로 공이고 바로 가여서 이변을 쌍으로 관조하면 바로 중도의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이공관으로 인해서 중도제일의제관으로 들어가면 마음마다 적멸하여 염염이 상주하고 공과 유가 두 모습이 아니어서 진제로서의 부정과 속제로서의 긍정이 동시여서 자연히 생각 생각이 살바야해(薩婆若海)로 흘러 들어간다.
살바야는 지혜라는 뜻인데, 생각 생각이 모든 부처님의 대지혜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보살이 일념가운데 일체불법을 갖추고자 한다면 우리의 분명한 일념가운데 모든 법을 갖추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된다.
이를 두고 백천삼매가 마음의 근원에 함께 있으며 항하사 공덕이 마음으로 동일하게 귀결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한 법도 자기의 마음을 떠나지 않고 법마다 자기마음에서 나타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은 미혹하여 자기 마음 여래의 오묘한 능력이 번뇌에 덮여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보살이 일념가운데서 일체 불법을 성취하려면 반드시 식이변분별지(息二邊分別止)를 닦고 중도정관(中道正觀)을 실천해야만 한다.
식이변분별지를 설명해본다면 이변은 상대적으로 의존하는 법을 말한다. 예를 들면 공과 유, 아와 무아, 상과 무상, 대와 소, 높고 낮음, 길고 짧음, 친근하고 소원한 것 등인데, 일반적으로 이와 같이 상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이변으로서 상대적으로 의존하는 법은 단정적인 실체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서로가 의존하는 법은 모두가 상대적인 비교를 따라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크고 작음이 상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에 대해 말해본다면 큰 것은 진실로 큰 것이 아니고 작은 것으로 인해서 크다는 것을 보며, 작은 것은 진실하게 작은 것이 아니라 큰 것으로 인해서 작은 것을 보는 것이다.
지금은 일체 경계를 마주하면서 상대적인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공과 유에 대한 집착을 쉬어 어느 한 쪽 법에 치우치지 않으므로 생사를 싫어하지도 않고 열반을 기뻐하지도 않아 어느 한쪽을 그친다는 생각이 없이 이변에 나아간 상태에서 바로 중도이다.
도는 이변이 없는데 무엇을 그치겠는가. 대체로 그치기를 기약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그치게 된다. 그러므로 이를 두고 불지지(不止止)라고도 말한다. 이것이 최고의 공부이며 식이변분별지이다.
올바르다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도 빗나가지도 않는다. 이것은 공과 유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에서 공과 유를 떠나지 않고 이를 부정한다면 둘 다 부정하고 긍정한다면 둘 다 긍정하여 긍정과 부정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수행하기 때문에 “중도정관을 실천한다”라고 말하였다.

云何修正觀 若體知心性非眞非假 息緣眞假之心 名之爲正 諦觀心性非空非假 而不壞空假之法 若能如是照了 則於心性通達中道 圓照二諦 若能於自心見中道二諦 則見一切諸法中道二諦 亦不取中道二諦 以決定性不可得故 是名中道正觀
무엇을 정관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정관을 수행한다는 것은 현전일념이 유도 아니지만 공도 아닌 것을 관조하는 것을 말한다.
진실이 아니면 진실한 공이 아니고 거짓이 아니라면 오묘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라고 인식하고 거짓이라고 인식하는 마음을 쉬어야만 이것이 오묘한 삼매로서 진제법문이다.
이것을 두고 하나가 공하면 일체가 공하여 십법계가 동시에 공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다. 우리의 심성을 진실하게 관찰한다면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므로 공과 가를 파괴하지 않는 상태에서 모든 차별상이 완연하게 드러나 공이면서도 진실한 공이 아니다.
이처럼 공이면서 공이 아닌 상태를 속제법문이라고 한다. 속제는 유에 속하고 진제는 공에 속한다. 공을 취하지도 않고 역시 유에 집착도 하지 않아서 밖으로는 경계에 머물지 않고 안으로는 지혜에 머물지도 않아 지혜밖에 경계가 없고 경계밖에 지혜가 없음을 명료하게 통달하여 경계와 지혜를 쌍으로 잊는다면 진제와 속제를 둘 다 초월하게 된다.
이와 같이 관조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심성에서 중도를 통달하게 된다. 이처럼 진속이제를 원만하게 관조하여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분별한다 할지라도 항상 자체는 공적하고, 항상 자체는 공적하다 할지라도 분별인연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를 두고 중도정관을 원만하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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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