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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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되고 잘되고 무조건 근본자리에 놓고 지켜보세요
자기 자성 이 자체가 바로 영원한 자기 생명의근본

모든 것을
자기 주인공에다
몰락 놓는다면

그 사량의 분별과
산란함이 다 사라지고
평화로워집니다

나와 남을 이익 되게 하는 삶 살고 싶어
운? 스님께 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저는 이제 50대에 접어드는 주부인데요, 자식들 키우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지내다가 이제 몸이 아프게 되니 비로소 제 인생에 대해서 돌아다보게 됩니다. 남들한테 나쁜 짓 안 하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이익을 주거나 베푸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주변에 저보다 어려운 사람들도 많은데 그저 눈 감아 버리고 오로지 나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나와 남이 이익되게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스님께서도 이 마음 도리를 꼭 알고 가야 된다 하시는데 정말 이 몸 벗기 전에 이 도리 알고 갈 수 있게끔 저를 채찍질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옛날에 이런 사람이 있었더랍니다. 아주 자린고비로서 유명했던 사람인데 부인이 절에 가면서, 옛날에는 쌀 한 말이 컸지 않습니까? 그 달구지에다 인제 그 쌀 한 말을 싣고 가려고 들면 달구지에서 그 쌀을 도로 내려서 들고 들어가고, 못 가져가게 말입니다. 중놈들 갖다가 먹이려고 그러느냐고, 이게 쌀 한 톨 쌀 한 톨이 얼마나 그 노력을 해서 번 것인데 그러냐고 하면서요. 아, 근데 아주 큰 재산가죠. 그런데 그분이 인제 늙어서 죽게 돼서 고만 세상을 떴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사람은 3일을 두고 돈 꽤나 있는 사람은 일주일까지 가지 않습니까? 9일장도 가고. 7일장, 9일장 이렇게 가는데 아, 이게 돈 많은 집이니까 9일장까지 가고 이랬더랍니다.
아, 그런데 3일을 죽었다가 턱하니 깨어났단 말입니다. 병풍이 탁탁 쳐지는 거죠. 그러니 자손들이 깜짝 놀라서 보니깐 살아났더라는 겁니다. 살아나서 앉아서 하는 말이 “세상에 내가 그런 줄 모르고, 하다못해 애 낳는 사람에게 그 짚 한 단을 안 줬구나!” 이러면서 “내 곳간에 가 보니까 한 알갱이도 없고!”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내 통장에 보니까 한 알갱이도, 통장조차도 없더라는 얘깁니다. 새로 이렇게 나올 때에 가져 나올 것이 하나도 없더라는 얘깁니다.
그리고 목마른 사람 물 줬느냐, 배고픈 사람 밥 줬느냐, 헐벗는 사람 옷을 줬느냐. 아, 이 문초가 들어오는데, 그래서 저는 재산은 많은데 몰라서 그랬으니,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시고 잠시라도 나갔다 들어오게 해 달라고 빌었답니다. 인제 그냥 빌면서 간청을 하니깐 “그러면 일주일만 말미를 주겠노라.” 하고 내보낸 겁니다. 일주일 안에 그것을 다 치우려니까 재산을 자식들한테 몫몫이 다 나눠 주고, 어떻게 욕심꾸러긴지 자식들한테까지 나눠 주질 않고 그냥 죽었거든요. 참, 부모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눠 주고선 그 나머지는 다 자식들한테 한 저거씩 달구지에다 짊어지워서, 옛날에는 뭐 그냥 달구지에다 져도 하인들을 시켜서 져가지고는 어느 고을이든지 서당 없는 데는 서당 지어 주고, 공부 가르치는, 지금으로 치면 학교죠. 학교를 지어 주고 가난한 사람 있으면 다 나눠 주고, 그 재산을 다 나눠 주고 그러고선 떠났답니다. 아, 떠났는데 떠나는 마당에 자기 친구가 3년 전에 죽었는데 옷이 없어서 옷 한 벌 가져오라고 그랬답니다. 그래서 옷 한 벌을 달라고 그래서 그걸 같이 가지고 갔답니다.
그런 예가, 그게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이 세상에 그렇게 자린고비로 그랬다가 그렇게 해 가지고 나중에 그 자손들이요, 그 부모의 마음이 자손들한테 그냥 다, 그 마음이라는 건 체가 없어서 서른 개든지 마흔 개든지 만 개든지 천백억이든지 그 마음이 다 거기 마음에 가서 하나로 돼 주는 거죠. 그러니깐 그 자손들이 아버지가 그렇게 하고 간 데다가 자손들이 그렇게 그냥 번창하고 과거를 보게 되면 그냥 턱턱 붙고, 이렇게 해서 그 참, 나라의 국록을 먹어 가면서도 백성들에게 아버지 본을 받아서 잘 이끌어 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곰곰이 생각을 하면서 위로 묵은 빚도 갚고 아래로는 햇빛도 주고 그럴 수 있게끔 자기 자신이 이 몸 떨어지기 전에 이 도리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이거는 어느 사찰이나 기독교 가톨릭교, 이 타의에서 구하는 것은 그건 참선이 못 될 뿐만 아니라 나를 발견하는 데는 천리만리 먼 것입니다. 항상 창살 없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러한 아마 영식이 될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세세생생에 벗어나서 그 괴로움을 벗어나겠습니까?
지금 너무도 아픈 사람이 많습니다. 몸이 아파서 아픈 게 아니라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것을 해결 못하고 천차만별로 용도에 따라서 그 아픔을 주는 것을 어떻게 커버를 해 나가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도리를 깨치면 길에 가다가도 소가 도살장에 가든지 또 어떤 사람이 끌려가든지, 형무소에서 나오든지 들어가든지 그럴 때에 ‘아, 저 사람은 참 안됐어. 그러니까 주인공, 당신만이 할 수 있잖아.’ 하는 그 마음 한번 내 주는데 얼마나 성과가 있는지 모를 겁니다, 아마. 길에 가다가도 어린애를 들쳐 업고 걸리면서 이 광주리에다 뭘 파는 사람도 그거 쪼금 팔아서, 푸성귀나 팔아서 그저 식구가 다 살 양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 병든 남편을 두고 그렇게 하는 사람, 병든 부모를 두고 그럭하는 사람, 병든 자식을 두고 그럭하는 사람, 그건 부지기숩니다.
여러분이 이 도리를 공부하실 수만 있다면 열심히 정성스럽게 하셔서, 길에 오고 가다가도 건질 수가 있습니다. 이 도리가 그러한 도립니다. 내가 나를 건질 수가 없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남을 건질 수 있겠습니까? 이건 형상 노름이 아니라 마음 노릇입니다, 마음. 이 사람은 마음이 육신을 끌고 다니지 육신이 마음을 끌고 다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보살님도 이제 새롭게 발심하셨으니 열심히 정진하셔서 꼭 뚫어 보십시오.

몰락 놓으라고 하시는데…
운? 저는 인터넷으로 스님 법문을 항상 접하며 나름대로 마음공부를 해 나가고 있는 불자입니다. 사실은 다니던 회사에서 실직 당하고 몇 년째 지금 근근히 연명해 나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뭐든지 닥치는 대로 해 보려고 하지만 요즘은 아시다시피 일자리 얻기도 너무나 힘든 상황입니다. 딸린 식구들은 많은데 너무나 마음이 불편하고 걱정스럽습니다. 잘될 수 있을까요? 스님께서는 몰락 놓으라고 하시는데 이것저것 분별하는 마음 때문에 쉽지가 않습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그러니까 잘못되고 잘되고 무조건, 그렇게 무조건 놓고 자기가 지켜보는 겁니다, 이제. 지켜볼 때, 그때 자꾸자꾸 저거 하다 보면 계합이 되거든요. 그런데 무조건 할 생각을 안 하고 이거는 벌써 사량이에요. 이것이 금새 나오는 겁니다, 이게 벌써. 이건 이럭하면 잘못되고 저건 저럭하면 잘되고…. 그러니깐 내 육에 대해서만 위했지 이 정신, 이 마음자리에 의해서 서로가 그 마음과 마음으로 믿질 않았다 이 소리죠. 이 겉으로 보이는 것만 위했단 말입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그런데 이 마음에서는 전체 같이 돌기 때문에, 역대 조사들의 말과 이 뜻이 같이 돌아가고 있는데, 그걸 개별적인 저 하나가 부정한다면, 이쪽에서는 전체적으로 돌아가는 마음자린데 그것을 이 사량으로다가 이렇게 따져서 한다면 이건 부당하다 이겁니다. 금방 죽을 일이죠, 이게.
예를 들어 얘기예요. 이 돈 백만 원을 이렇게 주는데, 이걸 주게 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여기에서 살 수가 없으니까. 근데 이게 사람이 볼 땐 “아, 당장 지금 한 달을 살 수가 없는데 이 백만 원을 주라면 어떡합니까?” 예를 들어서 그런다 이겁니다. 그러면 무조건, 만약에 한 달을 살든지 꼬꾸라지든지 말든지 주라면 그냥 “예!” 하고, 그냥 자기라는 그 사량을 버리고 그냥 ‘예’ 그럭하고 이렇게 그냥 줘 버린다면 그게 바로 이 닦는 건데 말입니다, 근데 “이것으로 한 달을 살아야 할 텐데 이것을 주라고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이렇게 말 한마디 딱 붙죠. 그러면 “그냥 무조건 줘!” 이렇게 다시 반복돼서 말이 돼야만이 이걸 그냥 준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라도 꼭 이게 들어가게 되니까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구덩이에 빠질 일이라도, 이게 죽을 일이라도 하라면 그냥 했으면 될 텐데….’ 하는 생각, 그 아쉬움이 항시 들어요, 내 가슴에.
그러니까 이 도리를 완전히 파악하시려면 ‘나의 주인공 즉, 우주 대생명들, 하나로 돌아가는 그 근원, 자기 자신의 주인공, 꼭 거기에다가 일체를 다, 하지 못할 것도 사량으로, 잣대로 재지 말고 무조건 거기다 맡기고, 고하고, 믿고 그냥 생각을 해서 자를 건 자르고, 심을 건 심고, 기를 건 기르고, 행할 건 행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어떠한 급한 일이 있어도, 만약에 내가 칼을 맞는다고 할 적에도 그 칼을 떨어뜨리게 만들 수 있는 바로 자기 주장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모든 것을 거기에다 몰락 다 놓는다면 그 사량의 분별과 더불어 산란함은 다 사라지고 참 조용하게 자기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만물이 하나로 연결됨을 느끼게 돼
운? 스님께서도 자주 전기와 전구에 대한 비유를 하시는데 그냥 그렇구나 하고 알고 있었거든요. 근데 어제 방 안에 딱 누워 천장에 있는 형광등을 보니 갑자기 스님 말씀처럼 ‘아, 저 형광등이 전기로 다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만물이 다 그렇게 연결돼 있구나.’ 하고 아주 확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사실 제 아들녀석이 요즘 자꾸 반항을 해서 제 속이 많이 상했었는데 이제 확실히 다 하나로 연결된 그 자리에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님, 제가 바르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답? 네. 그런데 그 형광등을 보지 마시고 그 불 들어온 자체를 보세요, 불 들어온 그 자체. 그 선줄 하나에 그 전체가 비치지 않습니까? 그랬을 때는 거기 전체가 다 밝기 때문에 이 밑의 전체가 또 밝죠? 얼마나 좋습니까? 이거 정말 구질구질한 말 할 게 없이, 즉석에서 우리는 불고기를 해서 먹는 셈인데 즉석에서 배우지 못하면 요다음에도 무쇠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근본 자리는 부처님의 진리의 그 포괄된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은 금강석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런 걸 걱정을 하면 이건 소인배에 불과한 거예요. 이것은 소소한 거 가지고 이러다가는 오히려 큰 금강석을, 전체의 포괄된 금강석을 하나 줍지 못할 것이다 이겁니다.
이 세상에는 부처 아닌 게 없다 이랬습니다. 그런데 이 도리를 모르고는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개별적인 마음이라야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을 텐데 포괄적인 마음이기 때문에 도대체 헤아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 도리를 모르고는. 이거 하날 쥐지 못하고는 여기에 연결된 거를 도대체 모르니까. 이게 부처님의 이름이 부처가 아니다 이겁니다. 근본적인 전체에 포괄된 하나의 기둥이다 이거죠. 기둥인데 그 기둥도 자꾸, 여기 선줏대만 섰지 바람 부처도 있고 물 부처도 있고 다 있기 때문에 어떤 걸 부처라고 내세울 게 없거든요. 왜냐? 시시각각으로 이거는 배를 타고 갔을 때는 바람님이 필요하고 물님이 필요하죠. 땅으로 다닐 때는 땅 부처도 필요하고 사람 부처도 필요하고 짐승 부처도 필요하거든요.
그러니 이건 때에 따라서 그냥 연결해서 자꾸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걸 부처라고 내세울 수 없는 것이 부처다 이겁니다. 이게 생활에 우리가 그대로 연결되는 겁니다. 이생, 전생 아주 통틀어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도 다 연결이 돼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 해도 ‘왜 이래, 응? 이러면 안 되지 않겠어?’ 하면 바로 그 타의에서 괴롭히는 그 마음하고도 연결이 되기 때문에, 그 선줄이 다 닿기 때문에 ‘아이쿠, 이거 안 되겠구나.’ 하고서 서로가 마음을 융합해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함으로써 현상으로도 편안하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강력하게 칼로 쳐 버리는 게 아니라 바로 사랑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어야죠.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는데 나라고 세우지 않는다면 거기서 반항을 할 리가 없지 않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는 나라고 세우질 않는 것입니다.

삶의 무거운 짐 벗으려면…
운? 인생은 고해의 바다라고 하지 않나요? 요즘같이 이렇게 먹고살기도 버겁고 힘든 세상에 스님께서는 어찌 삶은 고가 아니라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 이 마음도리를 잘 모르지만 이제 관심을 가져 보려 합니다. 스님, 어떻게 하면 삶의 이 무거운 짐들을 벗을 수 있겠습니까?
답? 여러분은 여러분의 근본이라는 그 자체가, 자기 자성이 바로, 자기 주처가 자기한테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상대가 있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로 세상이 벌어지는 거를 알아야 합니다. 이 몸속의 생명들이 전부, 여러분이 움죽거리는 것도 다 거기서 작용을 해 주기 때문에 움죽거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진실하고 거짓이 없고 질서정연합니다. 내가 해야 내가 갖고,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행복한 거지 남이 행복한 걸 갖다 주거나 뺏어가거나 이런 거 없습니다. 여러분, 대신 배부르게 밥 먹어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대신 똥 눠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대신 또 잠을 자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파 주고 죽어 주고 깨달아 주고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결국은 여러분이 홀로 와서 홀로 해야만 할 문제는 해야 한다 이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길에서 길을 찾는다는 격도 있지요. 길은 육이 다니는 길이고 마음이 다니는 길은, 길 아닌 길이거든요.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고. 여러분이 여기 오실 때도 한 발짝 한 발짝 떼어 놓고 오셨지요? 그런데 어디로 갔습니까? 그 발자국 떼어 놓은 것이 말입니다. 짊어지고 오시진 않았을 텐데. 한 발짝 한 발짝 딛고 왔는데 그 발자국 떼어 놓은 것은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졌다 이겁니다. 우리가 살림하는 데, 모두 생활하는 데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삶은 고가 없다!’ 여러분의 생각이 모자라서 팔자 운명이라든가 고가 있는 거지, 여러분의 생각이 그렇게 현명하다면 고는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어떠한 거를 나라고 세울 게 없고, 내가 했다고 할 게 없고, 내 몸이 있다고 할 게 없고, 모두가 첨보해서 더불어 같이 돌아가는데 어떻게 내가, 이 물 한 그릇을 먹었을 때도 내가 먹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들이 더불어 같이 먹었는데. 그러니까 모두 여러분은 없는 것입니다. 없기 때문에 함이 없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차원을 좀더 삶의 차원과 인생의 차원, 또는 우주 삼라만상의 차원, 모든 거를 결부시켜서 차곡차곡 한 번 한 번 생각해 보신다면 그게 지혜로워지고 바다와 같아져요. 그럼으로써 어떠한 여건도 고가 될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신이 있어서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의 자성신 즉, 주처, 자기 주처가 있기 때문에, 얼른 쉽게 말해서 자기 뿌리가 있기 때문에 싹이 있는 것이지 그 싹이 딴 이름과 형상을 믿고 기도를 하면서 ‘에너지를 주시오.’ 하고 앨 써 보더라도 에너지가 그리로 안 가요. 자기 뿌리에서만이 에너지가 올라오지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배를 타고 허허바다를 건너가는데 선장은 본체만체하고 자기네들끼리 배를 타고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배가 그냥 뒤집히겠지요. 그럴 때 뭐라고 합니까? ‘부처님!’ 하는 사람도 있겠고, ‘주여!’ 하는 사람도 있겠고, 별 신의 이름을 다 불러 대고 야단법석들을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아니죠. 모든 마음은 선장한테다 맡겨 놓고 이렇게 좌왕우왕하지 않고 한군데 한마음으로 맡겨 놓는다면 가는 데까지는 무난히 배가 뒤집히지 않고 갈 수 있어요. 그렇듯이 우리는 항상 그저 의식에서 나오는 거, 이 여러분이 잘못 생각하면 유전성이나 영계성, 업보성, 인과성, 세균성 이런 것이 툭툭 튀어나오는 원인이 어딨는가? 여러분이 진짜로 그렇게 내 싹이 내 뿌리를 믿고 의지하면서 ‘너만이 싹을 푸르게 살게 할 수 있어.’ 하고 관할 때에 그것이 관하는 대로 대뇌로 통신이 돼 가지고 대뇌에서 사대로 통신이 된단 말입니다.
이 마음의 빠른 이치란, 통신처라는 건 빛보다도 더 우수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대로 통신이 되면 즉시 어디로 가느냐? 정수로 올라갑니다. 정수로 해서, 정수는 뭘 뜻하느냐? 자동적인 컴퓨터와 같은 겁니다. 거기에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의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나가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돼서 현실로 나오는 것입니다. 절대로 거짓이 아닙니다, 이거는. 심성의학이라고 해도 되고, 심성과학이라고도 해도 되고, 심성 천체물리학이라고 해도 됩니다. 우리가 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긴 하지만 진리를 참구하고 진리를 연구하고 진리를 배워서 우리가 갖추어 가지고 여여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예가 있지요. 예전에 육조 스님은 “내가 불성이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불성이 있기 때문에 여여한 줄 어찌 알았으리까. 또는 불성이 있는 까닭에 갖추어 가지고 있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불성이 있는 까닭에 만법을 들이고 낼 줄 어찌 알았으리까. 불성이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있고 우리를 이끌어 가기 때문에 자유자재하는 줄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셨죠.
여러분이 사시면서 인간이 그냥 먹고만 살면 그냥 제일인 줄 알지 마시고, 누가 굶으라는 거 아니잖아요? 돈을 벌지 말라는 것도 아니죠. 어떤 거를 하더라도 그건 자기 게 아니에요. 더불어 같이 사는 한 개체에, 즉 말하자면 속해 있는 거지요. 그래서 자기 거라고 생각이 안 된다면 이 세상의 인간뿐만 아니라 미생물에서부터 천차만별의 생명들, 인간까지 살아나가는 그 원리를 다 알게 됨으로서 모든 생명을 내 생명같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모습같이 생각하고,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말입니다. 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함으로서 ‘이 세상은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마저도 없이 그냥 여여하게 돌아가는구나, 초월해서.’ 하고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알게 된다면, 자기 뿌리가 자기 불성이라는 거, 주인공이라고도 하고 자아부처라고도 합니다. 그런다면 아파도 ‘오직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어.’ 하면 의사가 돼 줍니다. 또 ‘너만이 이 가난한 거를 좀더 이끌어 줄 수 있지 않아?’ 하면 관세음보살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게 보디가드도 돼 줄 수 있고 이끌어 주는 길잡이도 돼 줄 수 있고 해결사도 돼 줄 수 있고, 모든 게 돼 줄 수 있는 거는 바로 자기 원자에서 입자가 나와서 다 조절해 주듯이 그렇게 자기 주인공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주인공, 내 불성은 다 팽개치고 그저 기도를 하면서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오직 달라고 한다면 그거는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기 신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자기 자성신이 없다면 자기 몸뚱이는 나오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송장이 되는 겁니다. 자기 영혼의 근본이 빠지면 어떻게 사람이 살 수가 있겠습니까? 번연히 그렇게 알면서도, 왜 그 싹은 진실된 자기 뿌리를 의지해서 진짜 푸르게 살 수 있는 건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못합니까? “진짜 네 주인공을 네가 믿고 정말 네 나무는 네 뿌리를 믿어야만이 살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요, 이름만 ‘주인공! 주인공!’ 부르지 진짜로 믿지를 않아요. 자기를 자기가 믿지 않는다면 누굴 믿어요? 이 세상에 누가 대신 살아 준다고 믿습니까? 자기 자성 이 자체가 바로 영원한 자기의 생명의 근본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인생은 고라고 무겁게 짊어지지 마시고 일체를 영원한 자기의 근본 자리에 맡겨 놓고 나는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불교는 무로 시작해서 무로 끝난다는데…
운? 제가 아는 어느 기독교인이 불교는 무조건 무로 시작해서 무로 끝나는 종교가 아니냐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도 아는 게 없어서 어떻게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스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답? 그건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무가 왜 무라고 그랬느냐. 물감이라는 것은 하난데 색은 여러 가지죠. 그러니까 물감이라는 하나를 가지고 이 색도 쓰고 저 색도 쓰고 이 색도 쓰듯이 우리도 어머니를 만날 때, 동생을 만날 때, 형님을 만날 때, 친구를 만날 때 각각 이렇게 마음을 자연스럽게 쓰죠.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그걸 어떤 마음으로 쓸 때 나라고 할 수 없으니까, 돌아가면서 쓰니까 무(無)라고 했던 겁니다. 즉 평등공(平等空)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쓰는 거 이렇게 쓰는 거 여러 가지가 고정됨이 없이 쓰니까 이걸 평등하다 해서 평등공인 것입니다. 그러니 있다 없다고 할 때의 없을 무가 아니에요. 너무 꽉 차 있기 때문에 이것도 됐다 이것도 됐다 이것도 됐다 이것도 됐다 하니깐 이건 평등공이다 이겁니다. 그러니 꽉 찬 공(空)이기 때문에 ‘무(無)’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무(無) 하나에서 수만 가지가 거기서 소생되는 겁니다. 나고 죽고 나고, 생사가 여기에서 나오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걸 종합해서 주인공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전체 진리가 ‘너가 있으니까 주인이 되고 너가 있으니까 바로 공이다. 그러니 거기에다가 몰락 놔 버려라. 네가 하는 거조차 놔 버려라.’ 이렇게 하는 게 뭐냐 하면 본래는 내가 빈 공에서 왔기 때문에, 온 것도 없기 때문에, 나조차도 공이란 말입니다. 나조차도 공인데, 공에다가 넣을 거는 또 어딨으며 뺄 거는 어딨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하는 것이 전부 공했는데 공에다 또 넣으라니 이건 어폐가 있는 말이지마는, 모두 그렇게 공해서 돌아가고 여여하게 살면서도 그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빈 껍데기로만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무로 끝난다고 할 수가 있나요? 자기가 엄연히 살아서 움죽거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바르게 알아야죠.
200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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