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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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證果 ⑤
걸림없는 변재로 인연따라 교화해야

인연따라 본성깨달으면 거짓도 진실도 없어
세상살이 하는 재가인은 방편수연지가 적합

行者如是觀時 雖知一切諸法畢竟空寂 能於空中修種種行 如空中種樹 亦能分別衆生諸根 性欲無量故 則說法無量 若能成就無辯才 則能利益六道衆生 是名方便隨緣止 乃是從空入假觀 亦名平等觀 亦名法眼 亦名道種智 住此觀中 智慧力多故 雖見佛性而不明了 菩薩雖復成就此二種觀 是名方便觀門 非正觀也
수행자가 진제 공(空)에서 속제 가(假)로 나오는 관법인 종공입가관(從空入假觀)을 성취했을 때 안으로는 몸과 마음이, 밖으로는 세계와 유정과 무정이 필경 공적하다. 그러나 이 공적한 가운데서 갖가지 허깨비와 같은 수행문을 닦아 도량을 건립하고 불사를 일으키는 것이 마치 물에서 노니는 물고기의 흔적과 같고 허공을 나는 새의 자취와 같아 한번 지나면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그 흔적에 집착하지 말아야만 한다.
이는 허깨비와 같은 약으로 허깨비와 같은 병을 다스리며 허깨비와 같은 경전을 강의하고 허깨비와 같은 설법을 하여 한량없는 법으로서 중생을 제도하지만 제도하는 주체도 제도를 받는 대상도 허깨비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많은 경전에서는 “가령 모든 보살이 청정한 원각을 깨닫고 청정한 깨달음의 마음으로서 심성과 육근과 육진이 모두 허깨비의 변화라는 것을 알고 모든 허깨비 법문을 일으켜 허깨비를 제거하여 허깨비를 변화시켜서 허깨비와 같은 중생을 제도한다면 허깨비와 같은 법문을 일으키기 때문에 바로 내적으로는 대비심이 일어나 일체보살이 이로부터 수행을 일으켜 점진적으로 수행이 증가한다” 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진제 공을 따라서 속제 가로 나와 허깨비와 같은 법문을 닦는 종공입가관이 된다.
보살이 도종지(道種智)가 발현한 뒤에는 바로 걸림 없는 변재를 일으키게 된다. 걸림 없는 변재는 네 종류가 있는데, 이를 사무애지(四無碍智)라고 한다.
첫 번째로는 의무애변(義無碍辯)인데, 이는 일체 의리를 명료하게 통달하여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법무애변(法無碍辯)인데, 이는 일체 법상의 명자를 통달하여 걸림 없이 분별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사무애변(辭無碍辯)인데, 이는 모든 법의 명자와 의리로 일체 중생을 수습하여 지역 따라 다른 방언으로서 연설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자 자기의 언어로 이해하여 변설이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낙설무애변(樂說無碍辯)인데, 이는 일체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그들이 즐겨듣는 법문으로 설법을 하여 설법이 원융하고 걸림이 없어 하루 종일 설법을 한다 해도 피로한 마음이나 권태심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변재가 있어야만 육도세계의 일체중생을 이익되게 하면서 허깨비와 같은 걸림 없는 변재로 인연 따라서 방편으로 교화하는 것에 대해 명료하게 통달하게 된다. 이를 두고 방편수연지(方便隨緣止)라고 한다.
비록 방편의 인연으로 갖가지 일을 일으키나 얻을 만할 실제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한다해도 망념을 그치지 않는 상태에서 저절로 그치게 된다. 그 예로 ‘종경록’을 저술한 영명 연수선사는 매일같이 백 여덟 가지 일을 정해놓고 그 중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실천하였는데, 만일 일반인이라면 백 여덟 가지 일을 실천하느라고 허겁지겁하면서 매우 괴로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사는 그 많은 일을 매일 실천에 옮기면서 전혀 일이 없는 듯이 해냈다. 이것은 대사의 마음에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을 명료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쁜 가운데서 바쁜 마음이 없었으며, 괴로운 일 가운데서도 괴로움이 없었던 것은 그 모든 일들이 허깨비와 같지 않음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방편수연지의 공로이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이 방편수연지이야 말로 우리들에게 가장 적절한 수행이라는 점이다.
그 예를 들면 밥을 먹을 땐 밥을 먹는 마음을 돌이켜 관찰하고, 차를 마실 땐 차를 마시는 마음을 돌이켜 관찰하며, 침을 뱉고 팔을 흔들고 손님을 맞이하고 전송할 때 등 어느 처소 어느 시간이 됐든 돌이켜 관찰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자연히 망념으로 흐르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두 마음이 없고 마음에는 두 가지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옛 큰스님은 “인연 따라 본성을 깨달으면 그곳에는 거짓도 없고 진실도 없다”라고 말했으며 “걸어가도 선이고 앉아도 선이다”라고 했으며 또 “걸어도 아미타염불이고 앉아도 아미타염불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모두는 방편수연지의 작용에 해당된다.
가령 염불결사를 한 재가거사들은 세상살이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방편수연지를 수행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세상살이를 할 때 모든 처소에서 이 공부를 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제 공으로부터 속제 가로 들어가는 관법이며 이를 평등관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열반의 공에서 생사의 가로 들어가므로 공을 관하여도 원래 공일 뿐 만 아니라 공이면서도 공이 아니어서 공과 가를 병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등관(平等觀)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공에 치우치지도 않고 유에 치우치지도 않아 공의 처소가 원래 유이고 유의 처소가 원래 공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공과 유가 두 모습이 아니며 진제와 속제가 평등하다고 한다. 이 평등관을 법안(法眼) 또는 도종지라고도 한다.
법안으로는 속제만을 관찰하는데, 도종지는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면서 일체의 도로서 중생의 선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도’는 도를 닦는다는 뜻이고 ‘종’은 종자의 의미인데, 이것이 도를 수행하는 종자이다.
우리가 과거 전생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참선을 하거나 염불을 하면서 각자 종자의 차이가 난다. 보살은 십법계의 차별적인 도의 종자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환하게 알고 있다. 따라서 도종지라고 부른다. 이를 요약해서 말하면 중생의 근기를 관찰하여 거기에 알맞은 가르침을 베풀어 병에 따라 약을 투여한다는 의미이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려면 반드시 도종지가 있어야 만이 법안이 원명하며 그렇지 않으면 중생을 제도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하지만 도종지는 쉽사리 깨닫지 못한다. 지금 말법시대에서 법을 펴고 중생을 이롭게 하려 한다면 늙을 때까지 염불을 진실하게 하여 한 구절 아미타명호를 부를 경우 그 자리에서 아상 인생 중생상 수자상 등 사상이 없어져 안으로는 신심과 밖으로는 세계에 대한 집착을 잊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공부이다. 또 소리소리 부처님명호를 부를 때마다 부처님 상호가 더욱 분명해지는데 이것은 ‘관’수행이다.
염불을 부르는 자와 부르는 대상인 부처님 등 이 둘을 쌍으로 잃는 경지에 이르러 자타가 둘이 아닐 땐 이 경지에서 마음을 되돌려 허깨비와 같은 염불공부로 허깨비와 같은 중생을 교화하게 된다. 집착이든 병이든 논할 것 없이 단지 ‘아미타’라는 약으로서 중생을 다스려 중생들이 각자 허깨비와 같은 그림자모습을 소멸하고 임종시에 허깨비와 같은 극락에 왕생하게 해야만 한다. 이와 같다면 그 이익이 절묘한데 그 경지를 어떻게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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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