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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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밥은 인연
밥상으로 ‘해후’하다

무량화할매와 눈이 맞은 건 경주 성건동 어느 허름한 골목에서다. 꽃분홍 스웨터를 걸친 할매는 골목어귀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방 구하노? 내가 보여주꾸마?”
다소 거친듯하면서도 또랑또랑한 할매의 사투리가 춘삼월의 봄볕처럼 서울 촌객의 마음에 따사롭게 흘러들었다. 한마디를 던지고는 빤히 바라보는 할매의 눈이 말없이 껌뻑이며 천진스럽게 재촉 한다.
사정이 생겨 당분간 경주와 서울을 오가는 ‘이중생활’을 하게 됐다. 한적하면서도 공기 좋은 동네에 방을 얻을 계획에 이 골목 저 골목을 서성이다 만난 무량화할매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지나가는 겨울과 하루가 다르게 성큼 다가온 봄의 기운이 아쉬움과 설렘으로 어우러져 평화로운 작은 동네의 골목골목을 누빈다. 진달래 고운 빛 스웨터 위로 샤방한 머플러를 나풀거리며 할매도 골목골목 잘도 누빈다. 우선 할매는 당신이 사는 집에 딸린 방부터 보여주고는 반응을 살핀다.
“다른 데도 보여주꾸마?”
이번에는 뚝방 근처에 위치한 큰 아들네가 세놓았다는 방을 보여준다. 그래도 영 시원찮은 표정이자,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옆집 아줌마네와 뒷집 아저씨네 방까지 보여준다. 미장원 앞 평상에 모여앉아 수다삼매경에 빠져있는 아줌마들한테 다가가 “어디 괜찮은 방 없노?”라며 공고도 해본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지는데, 할매의 다리사정은 생각지도 않은 까다로운 객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군데만 더 가보자며 동네의 끝을 가로지른다. 둘째 아들네가 세놓은 원룸이란다. 베란다 너머로 펼쳐진 남산과 비스듬하게나마 바라보이는 형상강의 정경이 마음에 들어 그 방으로 낙찰을 보았다. 여간 까다롭지 않은 취향을 기어코 만족시킨 할매는 흐뭇한 마음에 ‘남산의 정기를 받는 방’이라며 소개까지 곁들인다.
“야야, 우리 집에 들러 저녁 좀 묵구가라. 그냥 가면 배고파서 안된데이.”
“아녜요. 차 시간이 바빠 빨리 가야해요.”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결국은 음료수만 마시고가는 걸로 합의를 보고 할매의 집을 들렀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부엌으로 향한 할매는 베지밀을 한 병 꺼내와 건네더니, 거실 벽면에 걸린 사진들을 구경하던 내게 사진 속 가족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다가 다시 안달이 났다.
“그럴게 아니라 쪼매만 기다려라. 서숙밥을 지어놓은 게 있은께 한술 뜨고 가라. 서울까지 가려면 배고파서 안된데이.”
할매의 발걸음이 채 말릴 겨를도 없이 부엌으로 달음질치고, 잠시 후 들깨가루가 듬뿍 얹어진 콩나물국에 짭조름한 멸치조림과 무장아찌, 동치미, 김치 등이 소담하게 차려진 밥상을 차려 내온다.
“이거는 콩나물국에 무 좀 섞어 넣고 끓인기다. 먹어보래이. 여그 김치는 무공해다. 동치미도 그렇고 무장아찌도 그렇고 할배가 기른 거로 만든 거다. 요것도 먹어봐라. 시래기랑 명태랑 넣고 쫄인긴데.”
할매의 상세한 안내에 따라 이 찬 저 찬그릇을 옮겨 다니며 젓가락질을 하느라 바쁘다. 무엇보다 시래기와 명태를 넣고 졸였다는 찬이 일품이다.
“시래기에 된장 쪼매 하고 마늘 넣고 무쳐서 냄비 밑에 깔고, 위에 명태 얹어가지고 요래요래 양념장 흩어 넣고 쫄인기다. 원래는 시래기와 고등어가 궁합이 맞는 건데, 고등어가 없어가 명태로 맞췄다. 괘안노? 맛은 없어도 나는 조미료라 카든가 그런 거 안쓴데이. 고마 많이 묵어라.”
밥술 위로 푸지게 걸친 시래기 가닥에 할매의 살가운 수다와 정까지 듬뿍 얹어져 배속이 따끈하게 불러온다.
할매가 산에서 손수 재취해 끓였다는 악초물로 입가심까지 하고나니, 그제야 객을 보내는 마음이 편히 놓이는지 할매는 “이래가 밥을 먹고 가야 속이 따습고 덜 춥데이”라며 집 앞 네거리까지 배웅한다. “오야 오야 조심히 가거레이” 손을 흔들어 보이는 할매를 뒤로 한 택시는 봄밤의 형상강을 따라 달린다. 그 언제인가 함께했을 또 다른 인연과의 해후로 경주의 낯선 마을은 그렇게 다시 고향이 됐다.
자유기고가, blog.naver.com/owisdom
200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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