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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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證果 ④
일체법은 허깨비처럼 실체가 없다

當知若見無爲入正位者 其人終不能發三菩提心 此卽定力多故 不見佛性
가령 수행자가 세속으로부터 진제로 깨달아 들어가는 공관을 닦아 무위법을 보고 깨달음의 올바른 이치에 들어갔다고 여기면서 이를 구경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끝내 세 가지의 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한다.
삼보리심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말한다. 이를 번역하면 위없이 진실하고 평등하고 올바른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것을 분류할 수 없는데도 굳이 분류한다면 세 종류의 보리가 있는데, 이는 세 종류 근기와 성품을 대치하는 것을 말한다.
첫 번째는 진성보리(眞性菩提)이다. 진은 거짓이 아니라는 의미이고, 성은 변개(變改)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거짓도 아니고 변개하지 않는 것을 진성이라고 한다. 이러한 진성을 도라고 여기기 때문에 진성보리라고 말한다. 이는 여래께서 깨달은 불과보리(佛果菩提)이다.
이 문제를 경전에서는 “어떤 사람이 보리심을 일으키고 나서 다시 모든 중생에게 보리심을 일으켜 대승법의 의미를 배우라고 한다면 이는 자신이 해탈하고 나서 역시 중생까지도 해탈하게 하는 것이 된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바로 진성보리의 의미에 해당된다.
두 번째는 실지보리(實智菩提)이다. 실지는 자기 본성을 관조하는 지혜가 이치에 걸맞아 허망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실지를 도로 삼기 때문에 실지보리라고 한다. 이는 연각이 일으키는 보리심이므로 연각보리(緣覺菩提)라고도 한다.
이 문제를 경전에서는 “수행인이 홀로 연각행을 닦으면서 보리심을 일으켰으나 중생들에게는 보리심을 일으켜 대승경전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고 교화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수행을 하기 때문에 자기만 해탈을 얻게 된다.
세 번째는 방편보리(方便菩提)이다. 방편은 훌륭한 솜씨로 중생의 근기에 호응하여 교화의 작용이 자유자재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방편으로서 도를 삼기 때문에 방편보리라고 한다. 이는 대승보살이 수행하는 것이다.
진성보리는 중도를 설명하고, 실지보리는 공을 설명하고, 방편보리는 속제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를 세 가지를 보리심이라고 말한다.
수행자가 속제로부터 진제의 공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은 실지보리의 작은 분야에 불과한데, 이는 지혜는 부족하고 선정삼매 쪽의 힘이 많기 때문에 불성을 보지 못한다. 이로 인해 성문승은 한결같이 공적한 경지에 빠져 진실한 성공이 바로 오묘한 속제의 유[眞空妙有]인 것을 밝히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유와 공이 둘이 아닌 하나의 중도의 이치임을 모른다는 의미이다.
그 때문에 여래의 위없는 보리열반인 중도불성에 있어서 위배하지 않는 가운데 위배하게 된다. 그러므로 불성을 보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若菩薩爲一切衆生 成就一切佛法 不應取著無爲而自寂滅 爾時應修從空入假觀 則當諦觀心性雖空 緣對之時 亦能出生一切諸法 猶如幻化 雖無定實 亦有見聞覺知等相差別不同
소승인은 편공을 증득하여 이를 구경각으로 여기므로 공관에서 가관으로 나와[從空出假] 중생을 교화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보살은 소승과는 달리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공부가 있어 자리이타의 덕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최초 발심할 때 사제(四諦)의 이치를 따라 사홍서원을 일으켜 자리이타를 행하면서 모든 법은 허깨비 변화와 같다는 것을 명료하게 알아 허깨비 법으로 허깨비 법을 자연스럽게 일으킨다. 즉 일체중생이 일체불법을 성취하게 한다는 뜻이다. 여래의 법은 십력(十力) 사무외(四無畏)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등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보살도 이와 같은 여래의 법을 성취하게 하려고 모든 법은 허깨비와 같다는 것을 명료하게 알아 허깨비와 같은 불사를 일으켜 허깨비와 같은 중생을 제도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래는 무위법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연히 무위법에서 적멸하다. 그 때에 공관을 닦아 가관으로 나와 무위법도 허깨비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무위의 상태를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작위하지 않음이 없으며 적멸이 허깨비와 같다는 것을 통달하기 때문에 적멸이 유위법 밖에서 따로 실재하지 않은 적멸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이치를 명료하게 통달한다. 그러므로 광대한 마음을 일으켜 모든 중생을 제도하면서 내가 지금 발심한 것은 인간 천상의 과보와 성문 연각과 대승초기 방편보살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최상승을 의지하고 보리심을 일으켜 법계중생과 일시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여 모든 것이 허깨비와 같다는 것을 명료하게 통달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살의 발심을 종공출가관이라고 한다.
‘제(諦)’는 진실을 살펴 허망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관(觀)’은 관찰의 의미이다. 이는 자기 마음 본성을 진실하게 관찰하여 내 마음은 방향도 없고 한계도 없어 끝내 그 실체를 얻지 못하지만 인연의 경계를 만날 때엔 일체 제법을 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로는 성문 연각 보살 부처님과 아래로는 육도범부인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 모든 법이 이 마음을 의지해서 있다.
이러한 모든 법은 있다 해도 그 자체의 성질은 공적하며 있다 해도 실재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일체제법은 단정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없지만 실재 있지 않으면서 인연을 따라 허깨비로 있으므로 역시 견문각지 등의 모습이 차별이 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일어나지 않는 무생을 설한다 해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고 차별상이 없다 해도 차별상이 없지 않음을 말한다.
모든 세간법은 번갯불이나 그림자처럼 여겨야 한다. 이는 금강경에서 말한 “모든 법은 꿈과 허깨비와 물거품과 그림자와 이슬과 번갯불과 같다”라고 한 것에 해당된다.
능엄경에서는 “허공은 본래 모든 차별상이 없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모든 차별상이 발현한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허공은 자기의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자기의 마음은 인연을 따르는 작용이 있다. 단지 세상 사람들이 허깨비 변화와 같은 모든 인연법을 실재 있다고 여기는 것은 마치 마술사가 수건으로 토끼나 말을 허깨비로 만들었을 때 그것을 진짜로 여기는 것과도 같다.
대승지관(大乘止觀)에서도 “관으로는 제법이 본래 일어나지도 않았고 지금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해도 우리의 마음이 분별인연을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허망한 세간의 작용이 없지 않다. 이것은 마치 꿈과 같아 실재 있지 않는 것이 허깨비로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치를 관찰하는 것을 관 수행이다”라고 하였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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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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