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떠난 곳에서 부처를 구하는 것 불가능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성불의 기회 잡아야
[원문]
세존좌도량(世尊坐道場)
청정대광명(淸淨大光明)
비여천일출(比如千日出)
조요대천계(照耀大千界)
-대흥사 천불전
[번역]
세존께서는 도량에 앉아 계시고
청정한 대 광명을 놓으시네.
비교하건대 마치 천개의 해가 뜨는 것 같이
대천세계를 밝게 비추시네.
[선해(禪解)]
지난 주 KBS ‘일요스페셜’에 백담사 무금선원 스님들의 무문관(無門關) 수행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됐다. 금기시돼왔던 스님들의 수행처가 이례적으로 일반인들에게 소개된 것이다.
스님들의 수행현장과 치열한 구도의 이야기를 그것도 시청률이 가장 높은 일요일 저녁에 방영한 것은 파격적인 선례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승가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래서인지 씁쓰레한 생각이 오래 남는다. 수행의 본분은 오직 자신의 마음을 닦기 위한 과정인데 이를 다른 이들에게 노출한다는 건 아무래도 불가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무문관이란 일정한 기한을 정해 문을 닫아걸고 수행하는 선방을 말하는데, 불자들과 일반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수행처이다. TV에서는 3개월에 걸친 스님들의 동안거를 코디로 잡고 마지막 안거를 끝낸 시점에서 문에 잠긴 열쇠를 풀어주는 것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주시해야 할 사항은 바로 방문을 걸어 잠근 열쇠에 있다. 무문관이란 엄밀하게 말하면 <문 없는 문>이다. 그런데 왜 문 없는 문에 열쇠를 잠그는 것일까? 스님들이 수행 중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낼 수 없어 혹시 문을 박차고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종의 강압적인 통제를 위해 열쇠고리를 만든 것은 아닐까하고 일반인들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통과의식으로 그만큼 불가의 수행은 철저한 통제와 근기(根基)를 가져야만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이 무문관 수행을 하면서 만나고 접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방이 막혀 있는 벽뿐이다. 이를 두고 벽관(壁觀)이라고 하는데 ‘참다운 마음을 관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럼, ‘참다운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 바로 ‘번뇌와 망념이 없는 청정한 마음’이라 할 수 있는데 곧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무문관 수행은 ‘먼지와 티끌 없이 마음을 비우고 오직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철저하게 가두어야 하지만 정신은 반드시 자유자재해야 한다.
이날 일요스페셜은 ‘불교의 세계’를 일반인들에게 보다 차원 높게 보여줬다는 점에서는 환영하지만, 무문관 수행의 본질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 자칫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요즘 남국선원, 무금선원, 조계암, 무일선원 등의 무문관이 생긴 것도 좋은 일이라 할 수 있다.
대흥사는 한국불교를 이야기함에 있어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천년고찰이다.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곳은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으로서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 대사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됐고, 오늘날 한국불교의 종갓집도량으로 불리고 있다.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대종사(大宗師)와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됐다. 당시 암울했던 조선시대의 불교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존재는 한국불교를 오늘에까지 있게 한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국불교의 위대한 성지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곳이다. 무문관 수행의 핵심처라고 할 수 있다. 대흥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중요한 국보급 문화재가 상당수 존재한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과 더불어 천불전은 전남유형문화재로 알려져 있다.
한국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을 간직 하고 있는 이곳은 지금도 성불(成佛)과 중생구제의 서원을 간직한 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는 청정수행도량이다.
천불전에 있는 주련 ‘세존좌도량 청정대광명: 세존께서는 도량에 앉아 계시고 /청정한 대광명을 놓으시네’는 부처님의 존재의 거룩함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은 시방 삼천대천세계 그 어디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항상 청정한 대광명을 빛내고 있으며 마치 ‘비여천일출 조요대천계: 천개의 해가 뜨는 것 같이/ 대천세계를 밝게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금언(金言)이라 하겠다.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마치 물과 얼음과 같다. 물을 떠난 얼음이 없고 얼음을 떠난 물이 없듯이 중생에게서 부처를 구해야지 다른 데서 부처를 찾아봐야 없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속에서는 항상 부처님이 존재하고 있다. 다만 이를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즉, 자신이 부처임을 자각하고 부처로 살면 부처이고 이것을 모르고 중생인 줄 알고 중생으로 살면 영원히 중생에서 벗어 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한 생각 바꾸어 부처님이 전해주고자 하는 그 마음을 바로 전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불전의 주련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경구(警句)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매우 똑똑하다고 믿고 있다. 돌이켜 보면 한갓 지식껍데기에 집착하고 있다. 바로 자신이 부처임을 모르는, 존재의 실상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깨치기 위해 수행하는 곳이 바로 무문관이라 할 수 있는데 말하자면,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이며, 들판에 피어 있는 풀꽃과 나무가 둘이 아닌 하나이며 저 하늘의 별과 달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치는 곳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부처님을 바로 볼 수 있고 만날 수가 있다.
이를 진실로 깨달을 때 마치 ‘천개의 해와 천개의 달이 비추는 것 같은 부처님의 대지혜의 광명’을 우리는 받을 수가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청정하고 참다운 마음’을 찾기 위한 치열한 수행이다.
■ 조계종 원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