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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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에 집착하면 소승에 떨어져
若住此觀 卽墮聲聞支佛地 故經云 諸聲聞衆等自歎言 我等若聞淨佛國土 敎化衆生 心不喜樂 所以者何 一切諸法 皆悉空寂 無生無滅 無大無小 無漏無爲 如是思惟 不生喜樂
여기서부터는 경전을 인용해서 집착의 잘못에 대해 증명하고 있다. 여래의 가르침은 중생의 근기에 맞게 교화하지 않음이 없으며 중생근기는 천차만별로 차이가 난다. 그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 역시 한량없는 차별이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 해도 그 귀결점을 끝까지 추구해본다면 근본이치는 하나일 뿐이다. 이를 두고 “방편은 많은 문이 있으나 근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둘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여래가 설법하신 일체 관 수행문은 성불하는 방편 아닌 것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이른바 우선 낚시라는 방편으로 고기를 끌어내서 끝내는 부처님의 지혜로 깨달아 들어가게 하는 것이지 방편으로서 구경각을 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공관에만 집착한다면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진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 사제법문의 설법음성을 듣고 도를 깨달은 자를 성문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부처님 음성교화를 듣고 사제법에 의지하여 진공의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범어의 ‘벽지가라(支迦羅)’는 번역하면 연각(緣覺) 또는 독각(獨覺)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출현한 세상을 만나 부처님께 인연설법을 듣고 십이인연을 관찰하여 진공의 이치를 깨달으면 연각이라고 한다.
독각은 부처님이 없는 세상에 출현하여 스승 없이 인연법을 스스로 깨달은 자를 말한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낙엽이 지며 초목은 태어나서 자라고 자라고 나면 다시 고목이 되는 것을 관찰하여 만법은 모두 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자기 마음을 깨닫기 때문에 독각이라고 한다.
독각도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인 십이인연을 관찰하므로 연각이라고 해도 되지만, 단지 부처님을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데서 근기의 영리하고 둔함이 있기 때문에 연각과 독각이라는 두 종류로 구분했다는 학설도 있다.
알아야 할 것은 연각과 독각을 논할 것 없이 공관은 불교에서는 초보적인 입문공부라는 점이다.
가령 여기에 집착으로 안주하여 대승불교로 전진하지 않으려 한다면 불법의 커다란 이익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종가입공관(從假入空觀), 즉 속제 유로부터 진제 공의 이치로 깨달아 들어가는 관문에만 안주한다면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진다”라고 하였다.
성문과 독각은 삼계내의 견혹과 사혹을 끝까지 끊고 생사의 울타리를 벗어났다. 이는 부처님이 성불하고 나서 아함경에서 말했던 “나의 삶은 이미 다했고 청정한 수행은 이미 수립됐고 하는 일은 이미 이루어 후생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辦 不受後有)”라고 한 경우에 해당된다.
이로부터 혜안으로서 삼계를 돌이켜보면 중생들은 태어나면 죽고 죽으면 다시 태어나면서 생사가 단절하지 않고 윤회가 반복된다. 이 때문에 삼계중생의 생사에 대해 깊은 염증을 느끼게 된다.
이들은 삼계를 마치 견고한 감옥처럼 여기고 생사를 원한 맺힌 집안을 보듯 하면서 진공열반의 이치만을 굳게 지키며 다시 세상에 출현하여 중생을 교화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지극히 소극적인 염세주의로서 삼매의 구덩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두고 여래께선 법화경에서 그들을 꾸짖기를 “너희들은 마치 다시는 생명이 발아하지 못할 섞은 종자와 같다”라고 하였다.
본문에서 말한 경전은 방등대승경전을 지적한 것이다.
여래의 제자인 마하가섭과 사리불 등은 소승 편공에 집착하여 위없는 무상정등정각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방등대승경전인 유마경에선 유마거사가 그들을 꾸짖고 온갖 수치스러운 일을 보여주면서 대승원교를 찬탄하고 소승을 배척하여 그들로 하여금 소승을 부끄럽게 여기고 대승을 흠모하게 하였다. 이에 관한 내용은 유마경에 자세하게 나온다.
이 때문에 마하가섭과 모든 제자들은 스스로 깊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선근종자를 영원히 끊고 대승에 있어서 이미 썩은 종자처럼 되었을까”라고 하였다.
일체 성문들이 불가사의한 대승해탈법문을 듣고 울부짖자 그 소리가 삼천대천세계에 진동하였으나 모든 보살들은 크게 기쁜 마음을 내면서 대승법을 공경하게 받아들였다.
반야부에선 공에 대한 집착을 도태시켰고 법화회상에 이르러서야 삼승방편교를 일불승으로 회귀시켰는데, 소승들은 그 때가서야 오묘한 법을 깨닫고 과거의 미혹을 슬퍼하였다.
그들은 탄식해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면서 중생을 교화한다는 말씀을 들었어도 마음에 즐거움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세존께서 과거에 방등회상과 반야회상에서 모든 대승보살을 위해 너희들은 미래에 부처가 되어 시방세계에 신통으로 유희하면서 불국토를 정화하여 중생을 제도할 것이라고 수기하였으나 저희들은 그 말씀을 듣고도 환희심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어 저희들은 삼계생사를 이미 벗어나 최고의 열반을 증득하였다고 여겼으며, 또 단지 공과 무상과 무착만을 생각하면서 부처님이 교화하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가운데 한 생각도 즐거운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자비원력도 일으키지 않고 오직 소극적으로 자리적인 측면에만 머물렀습니다. 모든 법은 진공의 이치라는 것을 증득했기 때문입니다.”
일체법은 모두가 공적하여 본래 일어난 일도 없고 소멸한 것도 없으며 크고 작은 것도 없으므로 무루이고 무위이다.
범부 중생은 이 같은 이치를 미혹하기 때문에 일체법엔 인아와 시비와 대소와 생멸이 있다고 여긴다. 이는 모두 망상분별을 따라서 일어난다. 가령 육근과 육진을 벗어난다면 그곳엔 끝내 한 물건도 없게 되는데, 이를 두고 무루라고 말한다.
공무루(空無漏)에 대해 말해본다면 반야심경 가운데 안이비설신의가 없다는 것은 내적으로 육근이 공적한 것이고, 색성향미촉법이 없다는 것은 외적으로 육진이 공하다는 것이며, 사제 십이인연이 없다는 것은 이승법계가 공하기 때문이며, 육바라밀이 없다는 것은 보살법계가 공한 것이고, 지혜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無智亦無得]는 것은 부처님법계가 공한 것이다. 이는 하나가 공하면 일체가 공이어서 십법계가 공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것을 공무루라고 말한다.
단지 이승은 공무루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공과 유가 둘이 아닌 중도의 이치에 있어서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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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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