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게 다가와도 공심에다 놓는다면 무효 돼버려
모든것을 일체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자기 주인공에다 몰락 다 놔버린다면
모두가 잔잔히 쉬게 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착하게 살면 되는 거 아닌지요
운?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면서 죄 짓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 끼치지 않으면서 착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요? 꼭 이 마음 도리를 알아야 되나요?
답? 네. 여러분은 필연적으로 이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가정에 어떤 병고가 생긴다 하더라도, 얼른 쉽게 말씀드리자면 과거에서부터 가지고 온 업보가 녹아지지 않는다면, 내 이 의식들이 한마음으로 나의 마음과 더불어 같이 해 주지 않는다면 작용이 잘 되질 않습니다. 그래 그 과거의 의식이 나온다 하더라도 갖가지로 나오는 걸 나온 거기다가 다시 놓으면, 한데 모아서 합쳐서 놓으면 다시 놓는 거마다 한데 합쳐집니다. 왜 콩깍지도 익은 콩깍지 있죠? 익은 콩깍지를 탁 치면 콩알이 싹 빠지고 껍데기만 싹 남듯이 말입니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 때도 ‘아, 이만하면 가도 괜찮겠다’ 할 때에 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죽을 때 그렇게 많이 고생을 안 하고 얼른 그 무명을 벗을 텐데, 영혼은 자유스럽게 돌아가고 그럴 텐데 이 도리를 몰라서, 이 콩깍지가 익질 못해서 아주 파란 대로 그대로 있기 때문에 제각기 아우성을 친단 말입니다. 그러니 죽을 때 되면 이놈의 거를 강제로 벗겨 내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 속살이 붙어 가지고 말입니다. 그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 온통 똥을 싸고 오줌을 싸고 망령이 들고 이러질 않나, 또는 아파서 그냥 마냥 드러누워서 주위의 사람을 성가시게 하지 않나. 이거는 부모를 위하고 자식을 위하고 서로 이렇게 해 나가는데, 하루나 이틀, 한 달 석 달 이쯤 앓는 것은 하나서부터 열까지 아주 봉양을 잘합니다. 그러나 한 달 지나고 두 달 지나고 석 달만 지나 보십시오, 어떻게 되나? 그건 자식들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벌어먹고 살랴, 자식들 기르랴, 이러는 와중에 자식들은 속썩이랴, 부모는 누워서 앓고 있으랴 이런다면 이거는 필연적으로 도무지 이 속에서 불이 나서 이젠 잘하다가도 잘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식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데 드러눕는 부모는 자식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길렀는데 저놈의 자식이 저러느냐. 내가 저거를 먹지 않고 기르고 쓰지 않고 가르치고 이랬는데 저놈의 새끼가 저런다고 그러면서. 그러니 그 인과의 법은 점점 점점 원한이 자꾸자꾸 서리고 가슴에 못이 박혀서 또다시, 끼리끼리 또다시 모이게 되는 겁니다. 이거는 승천을 하려는데 그렇게 원한이 있고 그래 가지고야 승천을 할 수가 있나요? 길을 갈 수가 있어야지!
또 이런 소리가 있지 않습니까?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아, 뭐가 만날 뒤주에서 쌀만 푸러 가면 작작 작작 작작 하더랍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그 쌀 푸는 거 많이 풀까 봐, 옛날엔 먹을 게 주저로워서 말입니다. 그 많이 퍼서 헤프게 먹어서 집안 망할까 봐, 그게 머리에 사무쳐서 그냥 구렁이가 돼서 그 뒤주를 지키고 있는 겁니다, 부모가 말입니다. 작게 뜨라는 거죠, 작게 뜨라는 거. 그렇듯이 모든 것에 착을 두면 그 착에 의해서, 죽어도 벌써 그 의식이 그걸 꼭 끼고 돌아가니까 그렇게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오죽하면 배낭을 짊어지고 나온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 하루살이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능력이 있으면 하루살이로 살아도 늠름하지만 능력이 없으면 바둥거리게 되거든요. 그래서 창조력이나 능력을 기르라는 얘깁니다. 자기 능력을 자기가 기르지 않는다면 어떠한 문제가 닥칠 때 두렵고 또 그것을 커버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앞에 가서 아무리 해 달라고 빌어도 그것은 아니 됩니다. 왠 줄 아십니까? 여러분, 똥 누는데 대신 눠 주는 사람 보셨습니까, 대신 자 주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대신 먹어 주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대신 아파 주는 사람, 대신 죽어 주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심지어는 부처님이 계신다 하더라도 그건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해오는 얘기에 부처님 동생이 있었는데 “나도 부처님같이 깨치게 좀 해 주십시오.” 하고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얘, 상 들여오너라.” 겸상을 차려서 상을 들여오게 해 놓고 동생의 밥을 그냥 먹어 버렸어요. 그러고 “너, 배부르냐?” 하고 물었어요. “아, 오라버니가 잡숫고 제 배가 어떻게 해서 부릅니까?” 하고 대답을 했죠. “그거와 똑같다. 네가 하지 않는 일을 어찌 내가 너의 일을 해 줄 수 있겠느냐? 다른 거는 대신 해 줄 수 있을지언정 그것만은 대신 해줄 수가 없느니라.” 이러셨답니다.
이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갈 건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만 알면 성불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 이 세상에 어떠한 거를 다 제쳐 놓고라도 이 도리는 꼭 배워야 할 도리입니다.
다른 영혼들에게 자기 정신이 먹혀버려
운?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다른 영혼들에 의해서 자기 정신이 완전히 먹혀 버린 그런 사람들을 퇴마사들이 치료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10명도 넘는 영혼들이 들어와 있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뱀의 영혼이 들어와서 뱀의 행동을 하기도 하고 그러는 모습을 보면 너무도 끔찍하고 무섭습니다. 스님, 어떤 인연으로 그런 영혼들이 접신을 하게 되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답? 요즘에는 영계성에 휘달리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그런데 그것이 어디서 오느냐 하면, 길에 오다 가다가도 영계성이 나한테 유전이 될 수가 있고요, 이 속에서 의식들이 나한테 그렇게 하는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전자에 지은 악업 선업으로 받은 것이 있어서 그것이 입력이 된 것이 솔솔 풀려나오는가 하면 바깥에서 오고 가면서 영계성이 나한테 부딪히는 때도 있다는 겁니다. 영계성이라든가 세균성 또는 유전성, 업보성 이런 것들이, 윤회성은 대대로 물려 가면서 돌아오지만 영계성이나 세균성 이 자체는 때에 따라서 길에 오다 가다가도 딱 걸리는 수가 많습니다. 심하면 뭐 때려부수기도 하고, 밥 먹지 말라고 그래서 밥도 안 먹고, 나가라 그래서 나가고, 방에서 문 걸어 잠그고 있으라 그러면 그러고 있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도 많죠.
가만히 보면 이 신경이 급박해지면 그런 게 일어나기 쉬워요. 뭐 생활 속에서 가정환경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든가 회사가 망했다든가 도무지 내 능력으로 따라갈 수 없는 일이 생겼다든가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가만히 보면 여간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만 그거를 다 물리치고 녹이고 나갈 수 있느냐? 즉 말하자면 그 여러 가지로 용도에 따라서 오는 대로 거기에 맡겨 놓고 거기서밖에는 해결을 못한다 하고선 거기다 딱! 맡겨 놓고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 모두 나오는 것을 이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주인한테다, 얼른 쉽게 말해서 자기 주인공에다 다 맡겨야 한단 말입니다. ‘너만이 해결할 수 있다.’ 그래야, 그게 영계성이 된다 하더라도 거기다가 모두 맡기면 이 체가 없으니까 둘이 아니게 되죠. 둘이 아니게 입력이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항상 이 마음의 주인 이 자체, 정말이지 나를 수억겁을 끌고 다닌 믿음직한 나부터 믿어서 나 영혼 자체가, 바로 이 의식적인 모든 영혼들이 한데 합친, 하늘을 받칠 수 있는 기둥이 돼 있기 때문에 그 모두를 전부 주인공에다 진짜로 맡겨 놔 버리세요. 그러면 무서울 게 하나도 없어요. 이해가 가십니까?
안 좋은 기가 느껴지는데…
운? 최근에 무슨 일로 저와 아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요, 사실 그 사람이 저한테 계속 안 좋은 기를 보내는 게 느껴져요. 근데 화가 나는 건 제가 그런 파장에 영향을 받아 내 기를 뺏긴다는 거예요. 그런 파장을 없애려면 어떡해야 하나요, 스님?
답? 그거는 모두 사람의 사량이에요. 사량에서 생기는 마음이에요. 그건 자기가 생각에 그렇게 올 거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렇게 할 거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러기 때문에 그대로 그게 반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체가 없는 내 마음은 이 허공과 같다고 했습니다.
즉 말하자면 그쪽의 마음내는 것도 영이고, 내 마음 가진 것도 영이에요. 영에다 영을 넣으면 몇이 되나요? 수많은 영을 영에다 집어넣어도 하나도 없어요. 그게 없애는 방법이에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어떠한 말을 했든지 어떠한 에너지를 빼가든지, 정신력을 뺏어 가든지 그 근본은 절대 못 뺏어가요. 왜냐하면 내 마음이 자기의 주처가 완전히 섰다면 절대로 뺏어 가고 뺏어 올 수도 없는 거죠.
그러니 아무리 상대가 잔뜩 화가 나서 “네 이놈! 너 어디 두고 보자.” 하고서 달려든다 해도 “얘! 그러지 말고 추운데 들어가자.” 하고선 들어가서 “만나서 얘기하려고 그랬어. 일단 뭐라도 먹고 얘기하자” 하고 아주 좋게, 나와 둘이 아니게 이렇게 정말 진정한 친구로서 대해줘 보세요. 그러면 악으로, 인연에 따라서 업보로 인해서 나한테 닥치더라도 모든 것이 나하고 둘이 아니게 ‘그것도 내 주인공이야.’ 한다면 그 악으로 달려들었던 것도 선으로 그냥 해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녹아 버리게 마련이거든요.
마음이 이런 물질이라면 안 되겠지만 물질이 아니고 형상이 없는 거거든요. 그러니 아무리 어떠한 게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 형상이 없는 나한테, 모든 거를 공에다가 즉, 공심에다가 모든 거를 놓고 ‘너만이 그렇게 안 하게 할 수 있어. 그 사람도 그렇게 안 하게 할 수 있어.’ 한다면 그게 그대로 무효가 돼 버린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공부 재료로 삼아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체유심조라는데…
운? 스님, 언제나 자상하게 저희들을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궁금한 점은요, 일체유심조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일체가 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란 말인가요? 근데 왜 우리는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할까요?
답? 그렇죠. 마음을 떠나서는 절대 이거는 허용이 안 되는 거니깐요. 이 마음으로 인해서 보는 것도 동시에 보고 듣고 말하고 몸을 움죽거리고 이러죠. 근데 그 마음이 말입니다, 자유스럽게 살라고 그 많은 말들을, 그 많은 생각들을 다 자유롭게 줬는데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생각지 못하고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고 자유롭게 살지 못해요. 마음 빼놓고 뭐가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중세계라고 하는데, 상세계, 중세계, 하세계 이렇게 삼 세계가 같이 돌아가고 있죠. 마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차원이 높아지고 차원이 얕아지고 차원이 아주 저 아래로 떨어지고 그럽니다. 그렇게 해서 모습도 그 차원에 따라 나오죠, 그대로! 될 수 있으면 여러분도 각자 자유권을 얻기 위해서, 누가 그거를 말해 주기 이전에 모두 알고 있어야 되겠죠. 누가 대신 잠을 자 주고, 누가 대신 먹어 주고, 누가 대신 똥을 눠 주고, 누가 아파 주고, 누가 죽어 주고, 누가 깨닫게 해 주느냐는 얘기예요. 자기만이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자기 정수의 자동적인 컴퓨터에 자기 차원에 따라서 입력이 되는 거니깐요.
우리가 살면서 항상 ‘내가 산다. 내가 했다. 내가 만들었다. 내가 먹었다.’ 이렇게 말씀들 하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내 몸뚱이 속에도 생명체들이 잔뜩 들어 있는데 어떻게 물을 먹었는데 내가 혼자 먹었다고 할 수 있겠어요? 더불어 같이 먹었죠. 그래서 이거를 먹으면 주는 거죠. 그런데 그 생명체들은 나에게 또 작용을 해 줘요. 그러니까 항상 더불어 에누리가 없어요. ‘내가 주면 받는다.’ 이런 거죠.
그래서 항상 생각을 건전하게, 즉 말하자면 둥글게, 좀 밝게 이렇게 생각을 하면 그대로 입력이 된 거니까 현실로 나오는 거예요. ‘난 이거 할 수 없다. 나는 이거는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요거는 할 수 있는데 요거는 할 수 없다.’ 이런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하게 돼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못하죠. 여러분한테 자유스럽게, 마음도 말도 생각도 자유스럽게 줬는데도, 인간으로서 자유스럽게 쓰라고 했는데도 자유스럽게 쓸 수가 없죠.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뭐 이러느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움죽거리는 건 한계가 있는 거고요, 내 이 정신계의 보이지 않는 자기는 무한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주인공에 ‘진짜 너만이 이 몸을 푸르게 살게 할 수 있다. 너만이 이끌어줄 수도 있고, 너만이 해결사가 돼줄 수도 있다.’ 하고 진실하게 믿는 마음으로 맡기고 자유롭게 사세요. 자기 이 몸이 싹이라면 오직 자기 뿌리만이 할 수 있는 거니깐요.
내 탓으로 돌려지지 않아
운? 스님,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막상 극한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내 탓으로 돌려지질 않습니다. 모든 게 상대 탓인 것만 같고 저는 억울하게 당하는 것 같기만 하거든요. 그래서 자꾸만 상대를 미워하면서 스스로 힘들어하게 됩니다. 생각으로는 이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은 따로 놀게 됩니다. 저의 공부가 부족한 탓이니 저를 한번 꾸짖어 주십시오.
답? 우리 마음에서, 들이고 내는 그 작용을 내 마음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죠? 알고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면, 알고 짓고 모르고 지은 억겁 전년서부터 지어 내려온 그 얽히고설킨 사연을 남의 걸로만 돌린다면 괴로움이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모든 점에 있어서. 그러면 그것이 바로 끄달림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고 뺏고 하는 그 모든 부딪침에 의한 것을 내가 내 탓이라고 돌렸을 때, 모든 것을 나의 탓으로 돌렸을 때, 알고 짓고 모르고 지은 것이 바로 내 탓이로구나 하고 나의 주처에 한생각 돌렸을 때, 바로 그 괴로움도, 외로움도, 고독함도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는 마음을 쉬게 됩니다. 남이 나를 때렸다, 나를 성가시게 한다, 나를 도둑으로 몬다, 나를 증오한다, 나를 원망한다 이런 것들을,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것을 일체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자기 주인공에다 몰락 다 놔 버린다면 모두가 잔잔히 쉬게 되고 나는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끊어지지 않고 미움에서 미움으로서 얽힌다 해도, 끊어지지 않고 나를 증오하고 미워한다 해도 나에게 돌리고서 그것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역시 그 미움은 돌아오지 않기에 더러운 물방울 하나 묻을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항상 그르고 옳음에 있어서, 나쁘고 좋음에 있어서 이것을 항상 따지고 돌아간단 말입니다. 나쁘고 좋다, 또는 이건 나쁘니까 안 먹고 이건 좋으니까 먹고 이런 것을 따지고 여러 가지 문제를, 크고 작다 이런 거를 논의하고 따진다면 결국은 어떠한 조그마한 부딪힘에도 나는 쓰러지게 돼 있다 이겁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내가 나쁘고 좋은 걸 몰락 놔 버렸을 때, 나쁘다 좋다 둘이 아닌 그 중심이 완벽하게 섰을 때는 어떠한 끄달림에도 쓰러지지 않게 돼 있죠. 어떠한 바람에도, 어떠한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마음 주처에다가 다 몰락 놔 버리세요. 그런다면 그 사량의 분별과 더불어 산란함은 다 사라지고 참 조용하게 자기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애들을 바르게 키우고 싶어요
운? 저는 초등학교 다니는 딸아이 둘을 키우고 있습니다. 근데 걔네들이 너무나 음식을 너무 함부로 버리는 거예요. 맞벌이 한다고 제가 너무 애들한테 소홀했나 봅니다. 애들을 바르게 키우고 싶은데 어떻게 이끌어 줘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 여러분이 앞으로 자손들을 위해서 가정에서 밥을 먹게 돼도 항상 감사하며 밥을 먹게 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부모가 그렇게 애를 쓰고 피땀을 흘려서 벌어다가 이렇게 밥을 먹는구나 하는 생각을 나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애들이 속으로 ‘아버지, 엄마! 감사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게 조그마할 때부터 그런 걸 길러 주십시오. 그런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애들은 나가서 일을 저지를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진리와 모든 자비, 사랑을 말해 줘도 모릅니다.
그러니 항상 이 뜻을 간단하게 “너의 주인공은 너를 끌고 다니고 너를 도와준다. 딴 사람은 너를 도와줄 수 없다. 아무리 엄마 아빠가 그렇게 너를 위하지만 네가 저기 나갔을 때, 바깥에 나갔을 때는 엄마 아빠가 너를 도와줄 수 없다. 그러니까 너를 돕고 다니는 거는 네 주인공밖에는, 너 자신의 주인공밖에는 네 몸뚱이를 보호해 줄 수가 없느니라.” 이렇게 일러 주세요, 무슨 일을 당하지 않도록.
그것이 나무로 친다면 뿌리를 도와주는 겁니다. 여러분이 가지를 아무리 붙들고, 잎새를 아무리 붙들고 싱싱하게 만든대도 그것은 아니 됩니다. 뿌리를 썩지 않게, 뿌리를 도와서 항상 싱싱하게 해 주면 바로 그 가지나 이파리가 얼마나 싱싱하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조금 조금 실험을 해 보세요. 그러면 벌써 느껴집니다. 아이들의 이 마음에서 감응이 오고, ‘아하!’ 하고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렇게 되려면, 아이들을 어쩌나 하고 있지만 말고 무엇보다 부모들이 먼저 마음으로 열심히 해서 그 마음이 진실되게 전해지게끔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항상 괴로웠어요
운? 스님, 저는 참 죄가 많은 사람입니다. 저 때문에 어머니도 속앓이 하다 돌아가셨고 매사에 불평이 많아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짓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항상 불편하고 괴로웠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서나마 큰스님 법문을 만나게 돼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근데 마음을 아주 나쁘게 쓰면 금생에도 괴롭지만 내생에도 괴로워진다는 말도 하던데 스님,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올바르게 살 수 있을까요. 그동안의 잘못된 삶을 참회하기 위해서 뭐든지 힘닿는 대로 해 보고 싶습니다.
답? 예를 들어 우리가 고속도로를 만들어 놓는다면 여기는 강원도다 여기는 철원이다 이런 것을 다 써 붙이게 돼 있죠? 그런데 고속도로를 만드는 데 문제가 있다 이겁니다. 그것은 무지하게 돈이 든단 말입니다. 그것을 비교해서 말하자면 무지한 나의 희생이 따르고 무지한 인내가 따르고, 믿음이 따르고 의단이 따르고, 의욕이 따르고 용단이 따르는 문제다 이겁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에 보면 무슨 좋은 일을 했다 이러고선 나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만큼 희생을 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이렇게 나왔다 하고 얘기하지, 그게 조그마한 일로 그냥 그렇게 길을 제대로 내지 않았는데도 그게 나오겠습니까. 그겁니다, 바로.
말없이 묵묵히 내가 고속도로를 지금 만들어 나가는 데 옷도 잘 입지 못하고 먹지도 잘 못하고 그냥 그 고속도로만 열심히 닦으며 지금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옆에 뭐가 필요합니까? 고속도로만 열심히 하고 나가고 ‘강원도다 철원이다. 줄을 친다. 무슨 어디 이거 해 놔야지. 깜박이 해 놔야지.’ 하는 거는 나중이에요. 이거는 고속도로만 해 놓게 되면 자기네들이 스스로서 벌써 이건 표시가 되고 이렇게 수신도 통하게 되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고속도로를 해 나가는 데는 그러한 역경이 아니라면 자기가 편안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이 주어지지 않죠. 그것을 어떻게 말했느냐 하면 ‘귀중한 자기의 보물을 맛볼 수 없다.’ 이겁니다, 비교해서 말하자면.
그런데 ‘너는 지금 세상에서 이러한 마음을 쓰면 살아서도 괴롭고 죽어서도 괴롭고 양쪽이 다 괴롭다.’ 이러는데 양쪽이 괴로울 것도 없는 거죠. 왜? 죽은 것도 없고 산 것도 없기 때문에 그 마음이 그 마음인데 어디 죽은 게 있고 산 게 있겠습니까? 이것은 벌써 두 가지로 나누기 때문에 공부하는 데는 지장이 있다 이겁니다.
지금 신작로를, 고속도로를 하고 나가는데, 두 길을 만들어 놓고 이 길은 나쁜 길이고 이 길은 좋은 길이다 이러면 이건 벌써 안 되는 겁니다. 나쁜 길이든 좋은 길이든, 이 좋은 길도 네가 한 거고 나쁜 길도 네가 한 거기 때문에 나쁜 길과 좋은 길을 싸잡아 쥐고 너는 지켜봐라. 어떤 게 좋은가를 너 스스로서 지켜봐라 이거거든요, 지금 나는. 그러면 내가 다시 이것이 나쁘다 좋다를 거머쥔 채 자기는 ‘아하, 이것을 운전하는 것은 바로 내가 하는 거로구나. 나침판이 바로 나로구나.’ 하고서 그 운전대를 자기가 거머쥐고 돌릴 수 있다 이겁니다.
그랬을 때에 자기는, 즉 말하자면 ‘내가 해 보니까 이렇게 하면 나쁘더라. 그러니 모든 걸 몰락 거머쥐고 모든 거는 여기에서 하는 거니까 내가 잘 돌리고 내가 그대로 여여하게 잘함으로써 그것이 내생이 따로 없고 현생이 따로 없고 부처가 따로 없고 중생이 따로 없더라.’ 이러고 알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해 보세요. 아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