爾時上不見佛果可求 下不見衆生可度 是名從假入空觀 亦名二諦觀 亦名慧眼 亦名一切智
이때에 위로는 구할 만한 불과(佛果)가 보이지 않고 아래로는 제도할 만한 중생이 보이지 않는다. 이를 종가입공관(從假入空觀)이라고 한다. 또는 이제관(二諦觀) 혜안(慧眼) 일체지(一切智)라고도 한다.
대체로 사마타공관(空觀)을 수행하려면 마땅히 마음의 고요한 자체를 의지해서 해야만 한다. 고요한 자체는 망념으로 요동하지 않는 본원자성을 말한다. 이는 삼공여래장(三空如來藏)가운데 번뇌가 끝까지 공적한 공여래장에 속한다.
이를 두고 옛사람은 “신령한 광채 홀로 드러나 육근과 육진을 아득히 벗어났다”라고 말하였다.
이 경지에선 명료하게 보려 해도 끝내 한 물건도 없어 그 가운데는 인아 시비 피차의 차별적인 모습이라고는 끝내 없다.
우리의 목전에 나타난 분명한 일념은 차별상이 본래 없다는 것을 명료하게 통달한다면 한 생각 망념이 일어난 자리가 바로 망념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를 임시적인 명칭으로 일념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관찰할 대상경계로 삼는다.
또 이 무념으로서의 일념을 관찰하는 것이 관찰하는 주관적인 지혜가 되는데, 전념이 사라지고 후념이 아직 일어나지 않을 때 그 중간에 오롯한 일념이 관찰하는 주관적 지혜가 되어 우리의 본성은 본래 무념의 경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에 관찰할 대상으로서의 경계와 관찰할 주관으로서의 지혜가 한결같이 하나의 평등한 이치로 여여하게 되는데 그곳에 무슨 차별적인 망념이 일어나겠는가.
여기에선 부처라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또 사구(四句)를 떠나고 백비(百非)마저 단절되어 언어의 길이 끊기고 분별심이 활동하는 처소마저 소멸한다[言語道斷 心行處滅]. 따라서 이때엔 위로는 성취할 만한 불도가 보이지 않고 아래로는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견해마저도 일어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세계라고 해서 취할 것도 없고 마군의 경계라고 해도 따로 버릴 것도 없다.
명료하게 알아야 할 것은 진여법계엔 중생이다 부처다 하는 헛된 명칭이 단절되고 평등한 성품가운데는 자타의 차별 형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두고 옛날 큰 스님은 “평등한 진여법계엔 중생도 없고 부처까지도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 가운데선 한 티끌만큼도 번뇌에 오염되지 않아서 중생 모습만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부처역시 따로 얻지 못하여 완전하게 모든 차별을 쓸어버린다.
이 문제는 능엄경에서 “하나가 부정되면 일체가 동시에 부정되어 십법계가 일시에 부정된다”라고 했던 경우와 같다.
그 자리는 일체 망념으로 분별하는 모습을 떠났다. 이를 두고 속제의 거짓으로부터 진제의 진공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종가입공관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속제 생사의 거짓으로부터 열반진공인 진제의 이치로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이다.
가령 깨달음이 이 같은 진공의 이치에 이를 때엔 속제의 차별이 진제에서는 원래 차별이 없음을 명료하게 통달하게 된다.
진제 진공의 이치에서 속제의 차별이 일어나는 것을 비유한다면 마치 항하사 모래수와 같은 삼천대천세계가 거대한 바다에서 일어난 물거품과도 같고, 또 일체 세간의 범부와 출세간의 성인이 번갯불이 잠깐 스치듯 한 찰나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과도 같은데, 여기에 무슨 피차와 인아와 시비를 담론할 것이 있겠는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말세중생은 번뇌가 지중하여 지관을 수행하여 정혜를 성취하고 싶어 하지만 그 일이 매우 쉽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진실한 마음으로 한 평생 동안 한 구절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이것이 바로 종가입공관이 된다.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염불하여 한 마음도 혼란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면 염불이 있는 곳으로부터 염불하는 마음마저 없는 경지에 이르고 망상이 일어난 곳에서부터 망상이 없는 데로 깨달아 들어가 염불하는 마음과 염불의 대상인 아미타부처님까지 둘 다 잊어버린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 경지를 생각이 텅 빈 진실한 마음이라고 하는데, 이를 두고 종가입공관을 닦음이라고 하며 이제관이라고도 한다.
진제 쪽에서 관찰하면 현상계의 모든 차별법이 끊어지고, 속제의 편에서 관찰하면 일체 만법이 차별적으로 질서정연하게 건립된다. 수행자가 일체제법은 허망한 망상 분별의 인연으로 일어나 진실이 아닌 헛된 법이기 때문에 그것은 공이라고 관찰한다면 진공관(眞空觀)이 된다.
망상분별로 일어난 인연법은 실재가 아니어서 본래 없는 공이라고는 하지만 그 평등한 공에서 인연을 따라서 삼라만상의 차별이 건립되는 것이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을 속제관(俗諦觀)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두고 경전에서는 “진제는 한결같은 성품이 본래 진실한 이치임을 드러낸다”라고 하였다.
이를 두고 “실제이지에 있어선 한 티끌도 받아들이지 않아 시와 비가 쌍으로 끊어지고 주관과 객관을 동시에 잊으며 만법 그 자체가 진여라고 가리키며 삼승을 회합하여 일불승으로 귀결시킨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진제라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속제란 한결같은 진제성공의 성품이 인연을 따라서 일어난 일을 말한다. 이는 ‘불사문중(佛事門中)에선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라고 한 경우에 해당된다.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신하에겐 충성을 권하고, 자식에겐 효도를 권하고, 나라엔 올바른 정치를 권하고, 한 집안엔 화목을 권하고, 선업은 천당의 즐거운 과보를 받는다는 것을 보이고, 악업은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나타낸 것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그러므로 속제라고 말하며 또는 혜안이라고도 하고 일체지라고도 한다.
범부의 육안은 견혹과 사혹에 가리어 보고 듣는 일체법 모두가 실재 있다고 여기지만 가령 진공의 이치를 체득한다면 일체법 모두가 차별상이 없다고 관찰한다. 그것은 혜안으로 차별법 모두는 현재 있는 그 상태에서 진공의 이치임을 명료하게 알기 때문이다.
일체 내외법의 명칭을 명료하게 알기 때문에 ‘일체지’라고 한다. 일체지와 이제관과 혜안이 모두 종가입공관의 다른 명칭일 뿐인 것을 알아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외형적인 명칭만 다를 뿐 근본자체는 한결같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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