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대로 용도에 따라 자기 근본에다 입력시켜야
여러분이
실험하고
체험하면서
당당하게
생활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라
(지난 호에 이어서)
내가 잠자코 있는 동안에 생각을 좀 해보세요, 어떤가? 자동적으로 그렇게 돼 있다는 거요. 그래서 심봉이라는 것은 그대로, 누진(漏盡)이 레이더망이라면 레이더망을 받친 심봉은 그 오신통과 레이더망과 같이 전부 굴려도 이거는 움쭉도 안 하고 있는 겁니다. 이거는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이시고) 하늘을 받쳐, 천지를 받친 바로 평발로써 받친 뭐라고 그럴까, 불기둥이라고 그럴까? 불은 하나지 둘이 아니니까. 물도 하나듯이 말이에요. 물은 흘러가는 것, 흘러 도는 걸 말하고 불은 움죽거리지 않는 걸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리는 돌고 돌아 불기둥은 하늘을 받치고 움쭉도 안 한다. 변화가 없고 그대로 밝아 있다, 그대로 넉넉하고. 그러니 거기에 붙어서 돌아가도, 움쭉을 안 해도 항상 이렇게 돌아요. 우리 마음이 넉넉하면 심봉이 돌아가는 것이 녹이 안 슬고 착착 돌아갑니다. 기름이 주어지니까. 넉넉한 마음은 기름을 주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심봉에 기름을 주는 거와 같아요. 그리고 넉넉지 못한 사람, 소견으로 마음을 쓰는 사람은 이게 자꾸 돌리질 못하기 때문에 녹이 슬죠. 그리고 뻑뻑해. 잘 돌아가질 않아요. 그와 같은 겁니다.
여러분도 기계를 잘 아시죠? 만약에 차를 끌고 다니는 데도 바퀴가 영 굴러가지 않아서 그냥 두면 그 중심인 심봉이 잘 안 굴러가게 되죠. 양면으로 딱! 조여놓고선 이게 그냥 돌아가도 이 중심 심봉은 통 움죽거리지 않고 바깥에 있는 것들만 돌아가죠. 바깥에 붙어있는 그 다섯 가지의 수레바퀴가 즉, 불바퀴가 돌아가는 거예요. 이것을 물바퀴라고 해도 좋고 불바퀴라고 해도 좋고 보통 그런 수레바퀴라고 해도 좋죠. 그렇게 돌아가는 이 자체, 바로 그것을 바깥에 서서 돌릴 수만 있다면 말이에요. 여러분이 그렇게 돌릴 수 있게끔 해드리려니까 오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거기다 (가슴을 짚어 보이시고) 입력을 시켜라 그런 겁니다. ‘거기다 놔라.’ 그러니까 또 놓는 걸 몰라서 도대체 어떻게 놔야 되느냐는 거예요. 왜 그러면 컴퓨터에다가 입력을 시키느냐 이거에요, 네? 나중에 써먹으려고 입력을 번호대로 시켜놓고, 또 모두 입력을 시켜놔야만이 그놈의 게 전부 일사천리로 해나갈 수 있어요. 우리도 지금 하고 있죠, 그렇게 자동적으로요.
그런데 그 기계가 그렇게 비싸다고 합디다. 허허허.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도 비싼 거예요. 그보다 더 비싼 겁니다. 얼마나 소중한 겁니까?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당신이고 여러분입니다.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자기 가정 속에서는 대들보예요. 그리고 자기 2세고요. 그러니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 테두리가. 하다못해 제비 새끼들도 테두리가 있고 둥지가 있는데 사람들이 집이 없어서야 되겠으며 또 집 속에 식구들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중하다 이겁니다. 모두가 소중하지 않은 게 없어요.
그러니 그렇게 입력을 들어오는 대로 용도대로 잘된 건 감사하게 입력을 해놓고 또 안 되는 거는 ‘안 되는 것도 거기서 한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거기서 하는 거 아니야? 거기서 해봐!’ 하고 거기다 입력을 해놓으면 그대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이 실험하고 체험하면서 당당하게 생활을 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라는 거지 항상 남한테 빌어서 먹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조금 답답할 때는요, 음성이 커지고 그러거든요. 아무리 작게 하려 해도요, 답답할 때는 그렇거든요. 그건 왜냐? 내가 말을 해서 여러분한테 입력만 된다면 그래도 어딘가 언젠가는 그게 나옵니다. 그런데 이 음파가 여러분한테 가가지고 음파가 되돌아오는 수가 많거든요. 그걸 느끼거든요. 그러면 목소리가 커져요. 허허허 참! 그러곤 답답한 겁니다. 사람이 공을 던졌으면 탁 받아서 되던져야 또 탁 받을 텐데, 공을 던져도 그냥그냥 어디 가서 푹 박히고 푹 박히고 이런다면 뭐 어쩔 수가 없는 거 아닙니까?
세상에 마음이 둘입니까, 셋입니까? 하나도 없는 것이 너무도 천차만별로 돌아가면서 마음을 쓰기 때문에 하나도 없다는 거며 공했다는 거며, 움죽거리는 것도 그렇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게 다 그래요. 보는 것도 그렇고. 그러니 ‘공했다’라고 예전에 부처님들이 말씀 안 하셨겠습니까? 그러니 없다는 사람도 있고, 비었다는 사람도 있고, 공했다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 이름은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뜻에 속해요.
여러분한테 이렇게 자세히 얘기해드려도 참…. 그러면 그 다섯 가지가 붙어 돌아가는데 레이더망이 제일 위에 붙죠. 누구든지 주장자를 가지면 거기다가 용머리를 갖다가 떠억 붙여서 주장자를 만들죠? 그게 무슨 뜻이냐? 내 주장자 하나로 인해서, 이 주장자를 깊은 물로 비유한다면 용이 들고 나고 들고 나고 춤을 추더라 하는 거죠. 그러니 이 레이더망이 바깥에서 오는 거 안에서 일어나는 거를 전부 보고를 해 들이면 안의 컴퓨터에 입력이 돼가지고 그냥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생각을 잘 해야만이 대뇌로 해서 저 컴퓨터에 입력이 되지 않겠습니까? 좋게 입력을 하시라 이겁니다. 왜냐? 꿈을 꾸고도 이것은 ‘아이구! 꿈이 언짢아. 언짢으니까 이거 무슨 탈이 또 날 거야. 이거 이거 어떡하면 좋은가?’ 아이, 요렇게 생각을 하니 고게 고렇게 입력이 돼가지곤 좋게 안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참, 웃으면서 입력을 할 텐데도 불구하고, 하늘이 무너진대도 ‘아이구, 네가 있다면 하늘이 무너진들 어떻고 땅이 무너진들 어떠랴.’ 하고, 나 이 자체가 죽고 살고 하는 것을 다 버리라는 게 아니라 그냥 놔버려요! 그냥, 생각이 없어요. 지금 금방 죽는대도 생사를 다 놔버려요.
보살은 생사를 버리지 않죠. 그런데 중생들은 생사에 끄달리거든. 좋아하고. 죽고 사는 거 아주 그냥 그거에 얽매이죠. 그래서 마구니나 외도들은 소견을 좋아하지만 보살은 소견에 흔들리질 않아요. 또 죽고 사는 것도 ‘내가 이거 죽지 말아야지!’ 하면 벌써 버려. 그냥 죽는 것도 좋아하고. 죽어야지, 죽지 말아야지 하는 거를 둘 다 놓으란 말이에요. 나중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까짓 거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요? 그러니까 보살은 버리지 않는다 이거죠. 양면을 다 버리지 않는 거죠. 놔버리니까.
여기에서 또 인과에 대해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고걸 어떻게 해야 더 자세히 얘기해드리죠? 그것은 입력하는 것만 잘하시면 돼요. ‘내가 이다음에 죽더라도 아프지 않고 죽게 하는 것도 너밖엔 없다.’ 이러면 입력이 돼요. 여러분이 소신껏 맘대로 쓸 수 있는 것인데도 아, 이건 그냥 아주 절벽이야, 절벽! 그러곤 나한테 와서는 “집을 사야 할 텐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날짜를 어떡했으면 좋고?” 아, 이러고 물을 때는요, ‘야! 내가 이날까지 이럭하고 있었던 본의가 뭐 있나?’ 하는 생각이 나고 눈물이 주르르 흐른단 말입니다. 나를 좀 덜 울리려면 여러분이 좀더 그 철벽을 뚫으세요, 좀! 아주 그냥 간단하게 그렇게 입력하는 것이라는 걸 지금 얘기해드렸습니다. 오신통이 무슨 이럭하고, 지난번에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안 되겠어요. 그대로 그냥그냥 얘길 해드려야지.
지난번에도 얘기했죠? 자력이나 전력이나 통신력이 뒷받침을 하고 있다고. 무한량 뒷받침을 하고 있다고. 그래서 레이저 그, 광력에 대한 그것을 안에서 받아서 레이저 치료를 하고 이런다는 것도 있죠? 그런데 사람이 이 도리를 모르고는 그 자리를 찾아내기도 어렵거니와 속에 있는 것은 속에서 그거를 해야죠. 입력을 해서 이놈들을 시켜서 그냥 치료를 해야 되는 거죠. 안에도 지수화풍이 돼있어서 안에도 광력이 있고 전력이 있고 자력이 있지 않습니까, 외부에도 있고. 크고 작은 것도 없어요.
마음은 벽이 없어요. 지금 여기 앉으셨어도 천 리를 다녀오라고 해도 다녀올 수 있어요. 아니, 저 딴 혹성에 갔다 오래도 올 수 있어요. 그리고 또 그것만이 아니에요. 천체를 다 보고 오라고 그래도 보고 올 수 있어요. 그런 까닭에 안에서도 레이저의 도구가 있다는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안에서는 안에서 치료를 하고 바깥에서 할 것은 바깥에서 치료하고 그러는 거죠. 그리고 정신분열은 바로 그 지배인이 끌고 가게끔, 주인공이 끌고 가게끔 자꾸 입력을 넣어주는 거죠. 제 컴퓨터에 입력을 넣어주는 겁니다.
이렇게 자세히 가르쳐드리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날더러 어떤 분은, 경을 달달 외우신 분들은 부처님의 경 얘기는 안 하고, 똑같이 안 하고 이런 얘기 한다고 그러죠. 질서도 없고 체계도 없고 이렇다고. 그러나 본래 체계 없는 게 진리기 때문에 또 질서정연하게 체계가 돼 있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게 이렇게 변천해 돌아가니까 우리는 마음의 인등을 켜고 앞장서야지, 그러지 않으면 늦어요.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늦는다는 거를. 버스 지나간 뒤에 버스 타려고 아무리 기다리고 섰어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똥 누고 싶으면 똥 누고 목마르면 물 먹어라 이겁니다. 그냥 오는 대로 거기 입력만 해 넣어라 이거예요. 그러고는 ‘관(觀)하라!’ 이런 거는 지켜봐라 이거거든요. 지켜봐라! 지켜보면 그것이 바깥으로, 입력됐던 거니까 바깥으로 탁, 팩스에서 나오듯이 탁 탁 나오거든요. 그런 게 실험과 체험이죠.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냥 이것은 아주 쉽게만 생각을 하는데 쉽게 생각하지 말고 지극한 믿음, 그리고 내 몸같이 생각하고,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말이에요, 또 효도하고 충성하고, 시간 지키고 약속 지키고, 술을 과음하지 말고, 너무 과음을 하면 정신을 잃어요. 그러면 남도 나도 좋아지지 않으니까 그건 해로운 일이라.
살생하지 말라 하는 것도 난 살생하지 말라 하는 게 아니라 내 몸과 같이 생각하고 내 아픔같이 생각하면 살생을 그렇게 안 해요. 살생을 하더라도, 예를 들어서 부모나 자식이나 어떤 사람이든지 ‘아유, 닭을 한 마리 사다 드려야 할 텐데….’ 이럴 때 살생이 간접적으로 된다고 합시다. 그럴 때 주인공에다 탁! 맡기세요, 둘 아니게. 그러면 그것이 살생이다 할지라도 그건 살생이 아니에요. 그 몸과 모습만 쳐서 약으로 썼을 뿐이지, 그 의식은 내 주인공에 입력을 해놨기 때문이죠. 내 주인공의 컴퓨터에 내 마음과 둘이 아니라는 입력을 해놨기 때문에 벌써 사람으로 요리가 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무명만 쳤을 뿐이지, 무명만 벗겨준 거지 살생을 한 게 아니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그냥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죽이고 먹고 그러지 말고요. 상황에 따라서 말입니다. 모든 게 상황에 따라서지 무조건 그럭한다고 해서 다 살생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계획적으로 그렇게 하면 더 나쁘고요.
옛날에 어느 스님이 지렁이를 수십 마리 끓여다가는, 자기 은사가 그냥 헛헛증이 나가지고는 영 일어나지 못하고 그러시니까, 산에서야 뭐 먹는 게 있습니까? 예전에야 더했죠. 그런데 그 제자 스님이 ‘살생하지 말라!’ 이러는 것도 무릅쓰고 ‘내가 살생을 해서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벌레가 되든지 아무걸로나 만들어도 좋다. 우리 스님을 일어나게 해야겠다.’ 그러고는 호미를 들고 가서 그냥 진창을 파서 지렁이를 많이 잡아가지고는 그걸 소금을 넣고 깨끗이 씻어가지고 고아서 베보자기에 꽉 짜서는 매일 두어 대접씩 먹였단 말입니다. 그랬더니만 그냥 살이 뽀얗게 찌고 아, 일어났거든요. 그래 은사 스님이 “얘야! 네가 그거 만날 약이라고 주는 그 국물, 참 맛있더라. 그거, 어디서 났니?” 그러거든요. 그래서 “나무인데 저 깊은 산에서 사는 나무에서 나오는 순을 갖다가 고아서 지금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휴! 그런 나무도 있었느냐?” 그러시거든요. 그랬는데 그렇게 봉양을 하고 그랬지만 그 지렁이는 전부 그 스님 덕에, 다 지렁이라는 모습을 벗었더래요. 이 얘기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또 무능한 것이 착하기만 하다고 해서 그게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너무 무능한 것도 안 되죠. 그래서 지난번에 내가 괴롭지 않으려고 남을 도와주기도 하고, 내가 괴롭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는 내가 괴롭지 않기 위해서 그런다.’ 이 소리를 했습니다. 그걸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입력을 해놓으면 바깥으로 나오는 이유가 어딨느냐? 안의 몸뚱이 속의 그 의식들이요, 전부 하나로 뭉쳐집니다, 마음이. 컴퓨터에 입력이 되면 입력이 되는 대로 따라주는 겁니다. 다, 그냥! 바깥에서도 안에서도.
옛날에, 어떤 사람이 외아들을 둬가지고 아주 애지중지 길렀습니다. 그런데 아, 장가를 들여놓으니까 얼마 안 가서 부모들 모르게 그냥 땅도 뒷구멍으로 다 팔아가지곤 시골집 뭐 몇 알갱이나 나가겠습니까, 아무리 좋아도. 시골집 하나 남겨놓고 홀딱 가지곤 그냥 둘이 튀었어요. 시부모 잔소리도 듣기 싫고 농사짓는 것도 귀찮고 그러니까 꼬셨겠죠. 그래가지곤 둘이 훌쩍 딴 나라로 그 돈을 가지고 갔어요.
갔는데 부모는 어떻게 됐느냐? 부모는 살면서 이때나 들어올까, 저때나 들어올까 하고 기다리면서 그 땅을 다 팔아가지고 집 하나만 남겼어도 부모는 생각이 이랬어요. 처음에는 괘씸하다가 나중에는 보고 싶었다가 나중에는 ‘이것이 어떻게 살고 있나? 이게 돈을 가지고 있어도 그거 몇 푼 금방 쓰고 돈 다 없어지면 이것들이 어떻게 사나? 죽었나 살았나?’ 이게 항상 걱정이죠. 돈 가져간 미움은 하나도 없어지고, 이것이 그저 잘 살고 어디 가서라도, 우리는 안 찾아보더라도 그저 이것들이 속썩지 말고 병들지 말고 그저 굶지 말고 잘 살았으면 하고 항상 기도를 해요. 그러다가 이제는 그 집도 팔아가지고선 그냥 절로 들어갔어요. 절에 들어가서 한 분은 공양주는 힘에 부쳐서 못하지만 반찬 만드는 채공 노릇을 했고 하나는 부목, 나무는 해오지 못하나 불 때고 나무 패고 이러는 부목 일을 맡아가지고선 했어요, 부부가.
그렇게 하다가 그만 그 절에서 죽었어요. 죽어서 그 이웃에 다시 태어나서 그 절의 스님이 됐어요. 부부가 다 스님이 돼버렸단 말이에요. 그래서 미끈한 비구승으로 어엿하게 이렇게, 그러니까 두 부부가 다 비구로다 태어나서 이제 절에서 있는데, 어느 날 하루는요, 아, 그 밑에 있는 사제 스님이 나갔다 들어오더니만 하는 얘기가요, 길가에 있는 움막을 들여다보니까, 하나는 포대를 두르고 있고 하나는 옷은 입었는데 영감 마누라가 다 늙어가면서 아주 병이 심하고 그랬더라는 얘기죠.
그런데 그 얘기를, 참 불쌍하더라고 사형 스님한테 했어요. 그래 젊은 스님이 있다 하는 말이, 인제 남편은 사형이 되고 부인은 사제가 됐어요. 그 사형이 있다 하는 소리가 “그러면 네가 갔다 오너라. 네가 나가서 그 바지저고리를 시주하라고 그래라.” 허허허. 아, 글쎄 바지저고리도 바지저고리 나름이지 글쎄, 이가 서 말은 들었을 테고 그냥 헤진 거는 말도 못하고, 더러운 것도 말도 못하는데 아니, 그것을 글쎄 시주하라고 그렇게 내보냈단 말입니다. 그 스님은 불쌍한 마음에,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랬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마침 자기 은사 스님이 오셨어요. 그래서 그런 사실 얘기를 다 하니까 껄껄 웃으면서 “그래도 그 천륜은 어디 가지 않는구나. 네 자식들이니라, 과거에. 그것이 하나는 며느리고 하나는 네 자식이었던 사람이니라.”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기가 막혀서 스님 앞에 푹 엎드러져서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제가 그렇게 과거에도 빌었고 현실에도 빌고 있는데 자식이 그렇게,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까?” 하고 반문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은사 스님 말씀이 “부모는 부모대로 자기가 지은 건 자기대로 받고, 이쪽은 이쪽대로지 어디 그게 똑같으냐?” 이겁니다. “아무리 줘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릇에 담기지가 않느니라. 그릇에 욕심과 삼독이 꽉 찼는데 어떻게 네가 주는 그 기도와 베푸는 자비를 받아들일 수가 있느냐?” 하시니까 거기에서 그만 그 형 스님은 인제 동생이 올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랬는데 시주를 하라니깐요, 이 옷 한 벌 있는 거를 마저 시주를 해달라느냐고 “아이, 옷 한 벌 있는 거 달라는 스님 난 처음 보겠네.” 이러면서 야단법석이거든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냥 호통을 치고 시주하라고 하니까 아, 그걸 두르고 말입니다. 하나가 밥 얻으러 나갈 때는 그 옷을 입고 나가고, 하나가 인제 거기 있을 때는 그 포대를 두르고 쓰고 있고. 아, 이랬는데, 나가서 밥도 못 얻어먹으라고 글쎄 그 옷 한 벌을 있는 걸 마저 달라면 어떡하느냐는 거죠. 지금 밥도 얻어먹으러 나가야 할 텐데 그 옷 없으면 어떻게 나가느냐는 거죠. 그래도 시주하라고 득달같이 그냥 그 거적문을 들고는 야단을 하니까 할 수 없이 “그러면 잠깐만 기다리라.” 그러고는 포대를 반으로 잘라서 새끼로 매어 두르고는 그 옷을 갖다가 “여기 있소!” 그러고 바깥으로 내던지거든요.
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그 말도 못하는 옷이거든요. 그래서 새끼오락지에다가 꿰어가지고선 들고 갔어요. 가다 보니깐 그냥 바깥으로 이가 수없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이걸 들고요, 이도 그거 살생이라 그러니깐 죽일 수도 없고, 그래서 들고는 갔어요. 가니까 아이, 뭐라고 그러냐 하면 은사 스님이요, “얘야! 너 이걸 어떻게 해야 되겠냐?” 하니까 제자가 있다 하는 말이, 그러니깐 그 아버지였던 사람이 하는 소리가 “웃도리는, 뜯어서 솜 빼고 깨끗이 빨아서, 양잿물 넣고 삶아서 아주 몇 번씩 헹궈서 말갛게 해서는 웃도리는 법당을 닦고, 아랫도리는 저 요사채를 닦아라.” 이렇게 사제한테 명을 내렸어요.
그래서 그것을 삶아가지고 그냥 옥사슬 같이 빨아가지고는 노냥 둘이서, 그 아버지는 위 법당을, 그러니까 과거 아버지는 법당을 치우고 아랫도리는 어머니가 치우는 겁니다. 그것이 다 헤지도록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걸 닦으니까 그게 온전합니까? 요만큼 남거든. 요만큼 남아도 그냥 고걸 꼬옥 짜가지고는 항상 고걸로만 닦아요. 닦다가 보니까 나중에는 부실부실하게 해서 요만큼 밖에 안 남거든. 그래 요것을 태워서 말입니다, 자기가 가루를 만들어서 물에다 타서 그냥 먹어버렸어요, 하나도 안 남기고. 이 정성이란 말도 못 하는 겁니다. 그러니 과거의 어머니 아버지였을 때도 그랬고, 현재에 태어나서 비구로서 형제가 된, 사형 사제가 된 그 판국에서도 그것을 그렇게 했다 이겁니다.
그럭하고 나서 그 두 노친네는 그래 밥도 못 얻어먹으러 가고 있는데 아, 동네에서 말입니다, 저 건너, 지금처럼 이렇게 촘촘히 있지 않죠. 저 건너 동네에서 노인네들이 모여서 바둑을 두고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난 거죠. 거지 생각이 난 거예요. 그 두 부부 거지가 요새는 밥을 얻으러 오지 않는다 이거예요. 그렇게 생각이 난 거예요. 그러니까 서로 얘기가 벌어진 거죠. “야! 그럼 노인네가 죽었나봐. 밥을 얻으러 오지 않잖아?” 이런 자비스런 마음이 생긴 겁니다. 동네에서 한 번도 그런 자비스런 생각이 안 들어갔는데 아, 그런 생각이 들어가가지고는 그 동네 노인네들과 젊은이들이 그 움막으로 간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뒤집어쓰고서는 달달 떨면서 그냥 병이 든 채로 죽어가고 있거든요.
지금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시죠? 허허허. 그래서 동네서 그냥 전부 나서서 어느 집 바깥채에다가 그 두 내외를 들게 하고는 뜨뜻하게 불 때고 깨끗이 목욕시키고 깨끗이 입히고, 그래가지곤 노인네들끼리 봉양을 하고 전부 젊은 사람들이, 자식이 없는 노인네들을 어떻게 이렇게 두느냐 그러면서 잘 봉양을 하거든요. 그래서 잘 먹고, 이제 살도 붙고, 옷도 좋은 것 입고, 목욕도 항상 하고 그러니까는 병도 낫고, 그렇게 그냥 잘 살죠. 그 동네 사람들이 집도 살펴주고 또 어느 자식 많은 집에서 항상 돌아가면서 보살피거든요.
이 노인네들이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자기 예전 생각이 나는 겁니다. 자기네가 부모를 버리고 도주한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옷 시주한 절에 찾아간 겁니다. 그 두 노인네가 찾아가서 스님네한테 이렇게 말을 했죠. “스님한테 옷 한 벌 있는 거를 입은 거를 벗어서 시주하고부터 이렇게 동네에서 저희를 도와줘서 호강을 하고 있고 잘 먹고 잘 입고 뜨뜻한 데서 잘 지내고 있는데 이러다 보니깐 저희 부모 생각이 납니다.” 인제 그때서야, 그때서야 생각한 겁니다. “제가 젊었을 때에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땅을 팔아가지고 도주를 했는데 저희 어머니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그것조차도 모르고, 이런 불효가 어딨습니까? 제가 그랬기 때문에 인과응보를 받아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이랬는데 스님네들께서 이 옷 한 벌을 시주하라고 그래서 했더니 이렇게 저희는 지금 편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그 은사 스님이 얘기를 해요. “자네 아버지 어머니는 여기 계시네.” 그러거든요. 그러니깐 “아이구!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하고 “제가 이렇게 늙었는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계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까, “언제나 사람은 영원한 걸세.” 그러면서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은 없으나 그 어머니 아버지가 다시 환생을 해서 태어난 어머니 아버지가 바로 여기 당신네들 옷 시주 받아온 그 스님네들일세.” 그러고서는 이렇게 “그 스님네들 둘이서 하나는 어머니고 하나는 아버질세. 그 두 분이서 과거에도 자네들을 위해서 그렇게 했지만, 지금 현재에도 그거를 시주 받아다가 위 닦고 아래 닦고 해서 요만큼 남는 것까지도 태워서 자기네들이 먹었다네. 그러니 부모의 마음은 이렇다네.” 하고선 얘기를 하니까, 아, 거기서 그 스님네들한테 그냥 폭 고꾸라져서 그냥 손을 쥐고 벌벌벌벌 떨고 그 자리에서 그냥 가버렸어요. 너무 억장이 무너져서요. 그랬으니 글쎄 그 부모 손에 또 간 거야, 그냥. 그 어루만지면서 다 씻겨서 또 그렇게 해서는 승천했어요. 지옥으로 보내지 않고 자기가 다 떠안은 거죠. 의식은 자기한테다 넣고 그 무명만 치운 거죠. 그랬으니 자식들은 산 거죠, 또. 그래서 내가 하는 소립니다. 자기 마음 편안하기 위해서지 그 자식들을 위해서가 아니다는 얘기예요.
잘 들으셨죠? 참, 그렇다고 우리가 참선한다고 저녁에 오래 앉았을 필요는 없어요. 그저 일을 무심히 하시고 저녁에 한 30분 동안 앉아서, 여유를 가지고 앉아서 ‘주인공! 네가 있으니깐 바로 내가 생겼고 내가 생겼으니까 너를 생각하고 너한테다 모든 걸 다 맡기지 않느냐. 그리고 너만이 할 수 있지 않느냐. 너는 수억겁을 이렇게 거치면서 진화돼서 이렇게 창조가 됐으니까 너는 다 알지만 현실의 나는 모르고 있잖아. 내 현재 의식은 모르고 있으니 현재 의식도 너의 뜻을, 당신의 뜻을 알려다오.’ 이름은 임이라고 해도 좋고 너라고 해도 좋고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아요, 하여튼. 그러니까 ‘주인공의 뜻을 나한테 알려다오. 나한테 실험이 되게끔 알려다오.’ 이렇게 해서 어떠한 거든지 놓고 자기가 실험할 수 있는 그런 도전이 필요하겠죠. 저녁마다 꼭 30분씩 관한다! 이렇게 거기 컴퓨터에다 모든 것을 갖다가 입력을 시켜놓곤 자기가 바깥으로 나오는 거를 지켜보는 것이 관하는 겁니다. 기도를 하고 잘되게 해주시오, 못 되게 해주시오,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이걸로써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