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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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삶이란 무애이며 무정이니”
원효 대사 창건 죽림사, 천유 선사 표충사로 명명
‘원한 반복치 말라’ 금오 스님 경책 담긴 서한 번안

[원문]
세발향천복국류(洗鉢香泉覆菊流)
제시편석침운재(題詩片石侵雲在)
반오백운경부진(半塢白雲耕不盡)
일담명월작무흔(一潭明月釣無痕)
-표충사 죽림정사

[번역]
맑은 샘물에 바루 씻으니 국화꽃 흘러가고
돌 위에 시를 쓰니 구름 덮여 오네
반 이랑의 백운 갈아도 끝이 없고
연못속의 달그림자 흔적이 없네.

[선해(禪解)]
깊은 밤, 불면에 잠을 뒤적일 때가 가끔 있다. 이런 날이면 문득 선문(禪門)을 열어 차가운 밤공기를 가슴 가득 들어 마시고 다시 잠을 청(請)하지만 좀처럼 오지 않는다. 몸이 늙고 마음이 외려 늙어 가면 시절 없이 산승(山僧)에게도 외로움이 가득 밀려들어 오는 것 같다. 오십 성상(星霜)이란 결코 적지 않은 세월을 불가(佛家)에서 보냈었지만, 지난 세월들이 주마등같다. 나는 슬그머니 방모서리에 놓아든 필묵(筆墨)을 꺼내 정갈하게 앉아 먹을 갈기 시작한다.
산승이 서예를 해온 지도 불가의 세월과 거의 비슷하지만 아직도 온전한 글씨 한 점 만들어 내는 게 여간 힘들지 않다. 글 한 점 쓰는 데도 온전히 마음을 다 잡아 쓰지 않으면 제대로 된 글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글은 곧 마음의 산물이다. 글이 제대로 나오지 않자 나는 슬며시 다시 필묵을 물리고 생각에 잠긴다. 이럴 때면 속절없이 은사이셨던 금오 스님이 떠오른다. 팔십 생이 다 됐는데도 그리움이란 아직도 이렇게 짙은가 보다.
며칠 전부터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善終)소식에 마음이 우울해졌던 것 같다. 종교의 벽을 넘어 보여준 그분의 위대한 힘이 느껴졌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분의 죽음을 생각하다가 자꾸만 금오 스님의 얼굴과 겹쳐졌다.
얼마 전, 나의 은사이신 금오 스님이 남기신 한자로 된 친필 편지 다섯 통을 번안했다. 스님께서 열반하신 지 40년이 됐지만 정작 은사스님께서 남기신 친필 편지는 제대로 번안이 되지 않은 터였다.
초서(草書)로 휘갈겨 쓰신 금오 스님의 친필 편지는 도무지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제대로 번안조차하기 어려워 오래전 발간된 <금오집>에서도 그대로 원문을 떠서 실은 터였다. 하지만 금오 스님의 힘 있는 문장과 글귀가 매우 돋보인 서한이었다. 실로 형태만 있고 그 뜻을 모르고 있었으니 제자들로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밤늦게까지 글귀를 잡고 헤맸지만 도무지 번안해내지 못해 결국 지인의 도움을 얻어 모두 번안했다. 자칫 잊어버리기 쉬웠던 금오 스님의 법문이 다시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여기에 짧게 소개한다.
‘유은념념보(有恩念念報) 보즉합천도(報則合天道) 유원념념해(有念念解) 해즉무번뇌(解則無煩惱)/ 일신류부운(一身類浮雲) 백년동과조(百年同過鳥) 약이원보원(若以報) 만겁무유료(萬劫無由了) 은혜를 입었다면 찰나마다 갚아라. 그렇게 갚으면 천도(天道)에 부합되리라. 원한을 지었다면 찰나마다 풀어버려라. 그렇게 푼다면 번뇌가 사라지리라./ 이 한 몸은 뜬 구름과 같나니 한 평생토록 날아가는 새와 한 가지더라. 만일 원한으로 원한을 갚는다면 만겁(萬劫)토록 악연이 끝나지 않으리라.’
참으로 금오 스님다운 경책(警策)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이 한 몸도 뜬 구름과 같고 하늘을 나는 새와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인생이란 덧없는데 어찌 원한을 반복하고 있는가. 실로 금오 스님의 법력(法力)에 대해 놀랄 다름이다
표충사 죽림정사 편액의 주련 역시,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표충사는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 봄에 원효 대사가 지금의 극락암 자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수도하던 중, 어느 날 아침 재약산 기슭을 바라보니 대밭 속에서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떠올랐다.
원효는 곧바로 하산해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이 절의 이름을 죽림사라고 했다. 지금도 그 흔적이 절 뒤 대밭 속에 남아있다고 한다. 이후 흥덕왕 4년(829)에는 왕의 셋째 왕자가 풍병으로 고생할 때 이곳의 신비스런 우물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으므로 절 이름을 영정사로 고쳤다고 한다.
조선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선조33년(1600)에 혜징 화상이 중건했다. 지금의 표충사란 명칭은 헌종5년(1839)에 사명 대사의 8세 법손인 천유 선사가 임진왜란 때 구국을 위해 헌신한 사명·청허·기허 대사 등을 기리기 위해 밀양군 무안면 표충사 사당에 있던 삼대 선사의 진영과 위패를 옮겨와 모시면서 고쳐 부르게 됐다. 이 절의 독특한 유래와 연혁만큼이나 이곳에는 국보와 보물 및 다양한 지방문화재들이 소장돼 있는데 죽림정사는 그 중의 하나이다.
‘맑은 샘물에 바루 씻으니 국화꽃 흘러가고 돌 위에 시를 쓰니 구름 덮여 오네.’
한 밤중에 붓을 들고 글을 쓸 때면 한없이 마음이 정갈해지고 고요해진다. 글은 곧 사람의 마음이며 형태이다. 바루에 한 방울 맑은 샘물을 묻히고 먹을 가는 것 또한 선적(禪的) 명상이다. 잘 쓴 글씨에는 마치 국화 꽃향기 같은 아름다움이 배여 흘러나온다. 이처럼 글은 반드시 종이 위에만 쓰는 게 아니라 돌과 나무, 형체가 없는 마음에도 써진다. ‘먹을 갈고 돌 위에 글을 쓰면/ 하늘에 구름이 덮여 오듯’ 그렇게 마음은 절대 고요 속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명상과 다름 없다.
‘반 이랑의 백운 갈아도 끝이 없고/ 연못속의 달그림자 흔적이 없네.’
불가에서 흰 구름은 덧없음의 상징이다. 그런 덧없는 인생의 밭인 흰 구름을 아무리 갈아도 이 세상은 끝이 없이 그저 흘러갈 뿐이며 구름 속에 덮인 달그림자는 연못에 비추일 리가 없다. 이렇듯 삶이란 무애(无涯)이며 무정(無情)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주련 속에 담긴 그 무상의 이치를 아니 느낄 수 없다.
본디 맑고 고요한 게 사람의 ‘마음’이다. 이 속에는 그 어떤 욕망도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세상 속에서 살면서 이 마음이 다른 무엇과 무수하게 타협을 하게 돼 어떤 집착의 경계를 낳게 된다. 이로 인해 사람은 무언가에 집착을 하게 되고 안주하게 돼 웅덩이의 물처럼 갇혀 결국 썩고 마는 것이다. 이런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소유물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신이 가진 온전한 사유조차 갇히게 돼 곧 자신의 인생은 쓸모없게 되고 만다. 즉 덧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를 경계하는 마음을 가르친 것이 바로 표충사 죽림정사의 주련이다.
■ 조계종 원로의원
200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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