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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證果 第十 ①
若行者如是修止觀時 能了知一切諸法皆由心生 因緣虛假不實故空 以知空故 卽不得一切諸法名字相 則體眞止也
지금까지 서술했던 아홉 장 가운데 제1장부터 5장까지는 방편인 보조수행이었고 제6장부터 9장까지는 정수행이었다.
이미 정수행과 보조수행이 진실한 수행인지(因地)가 되었다면 반드시 증득하는 깨달음의 과보[實覺]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마지막 제10장 증과장(證果章)에서는 깨달음의 과보를 증득한 것에 대해 밝히려고 한다.
중생들은 미혹한 이래로 홀연히 천당에 태어났다가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기도 하지만 마음은 털끝만큼도 감소하지 않고, 시방제불은 정각을 성취했다 해도 마음은 실오라기만큼도 증가하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은 중생의 미혹한 마음에서 증득한 것이며, 중생은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미혹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혹과 깨달음의 자체는 동일하고 인과 과가 두 모습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즉 중생의 마음가운데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이 있고,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이 중생의 마음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수행자가 이상에서 설명했던 정수행과 조수행을 할 때 일체제법이 마음을 따라서 일어난다는 것을 명료하게 안다면 모든 법은 세간의 육도범부와 출세간의 성문, 연각, 보살, 부처님 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제법을 자세히 분석하면 미혹한 법, 깨달은 법, 번뇌염법, 번뇌를 떠난 청정한 법, 생사유루법, 열반무루법, 방편교, 실교, 대승교, 소승교, 편교, 원교, 돈교, 점교 등 한량없이 많은데, 그 모든 것이 일심에서 환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 모든 법은 일심을 따라서 조작되기 때문이다.
화엄경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제법이 일어나는 것은 내 마음 분별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며 십법계와 세계미진이 마음을 자체로 해서 성립됐다”고 하였으며 “시방 허공이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 마치 뜬구름이 허공에 흐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는 내 마음이 세계 허공을 포괄하여 항하사 모래수와 같은 세계가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화엄경에서는 “내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와 같아서 갖가지 오음을 조작하듯 우리의 마음이 일체 세간법을 조작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의 현재 일념 분별심은 십법계의 오음을 조작한다. 이는 마치 화가가 붓으로 갖가지 색을 칠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세간과 출세간의 갖가지 오음이 내 마음을 따라서 조작되었다는 점이다.
가령 한 생각 있다는 집착심이 일어나면 육도범부 중생의 오음이 일어나고, 공이 있다는 집착을 일으키면 이승이 일어나고, 대비심을 일으켜 자리이타행을 병진하면 보살이 되고, 동체대비심을 일으켜 일체중생이 본래 평등하다는 마음을 일으키면 부처님 법계를 이룬다. 따라서 출세간 사성과 세간의 육도범부가 우리의 일심을 따라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이 일어나면 십법계 인과의 모든 법이 완연하게 건립되고, 일념 분별심이 소멸하면 십법계의 모든 법이 그 자리에서 공적해진다.
경전에서는 “삼계는 따로의 법이 없고 우리 일심 분별을 따라서 조작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일체제법이 일심을 따라서 일어난다는 것을 명료하게 통달해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법이 내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났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고 해도 마음은 또 무엇으로부터 일어났는가 하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대상경계는 일어나는 원인이 본래 없고 마음도 경계가 없다면 제법도 마음도 일어나는 일이 없다. 경계는 본래 일어남이 없는데 내 마음으로 인해서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면 경계는 본래 일어남이 없고 마음도 본래 일어남이 없다. 이것은 단지 경계로 인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마음이 일어남이 없다면 육진경계가 공적하고 육진을 상대로 해서 일어나는 육근도 공적하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허망한 거짓 인연법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있는 그 자체가 공적하다”고 말하였다.
경계와 마음이 본래 공적하다면 무엇 때문에 일체 모든 법이 있게 되었는가.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일체 모든 법은 인과 연이 화합하여 허망한 거짓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인과 경계의 연, 경계의 인과 마음의 연이 분리된다면 제법이라는 허망한 명칭이 소멸하여 일어난 것은 인과 연이 일어났을 뿐이며 소멸하는 것도 인과 연이 소멸하였을 뿐이다.
허깨비와 같은 인과 연은 일어났다 소멸할 뿐 모든 법의 본체는 본래 일어나는 일이 없으며 따라서 제법과 마음은 본래 얻을 것도 없다. 그렇다면 내 마음은 맑은 거울처럼 본래 청정하여 모든 육진경계의 오염을 떠나 내적으로 내 몸과 외적으로의 세계를 철저하게 관조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안으로 육근은 제팔아뢰아식에서 일어난 분별심이며 밖으로 산하대지는 제팔아뢰아식이 변화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제팔아뢰아식에서 일어난 분별의 마음과 산하대지의 모습은 본래 따로의 자체가 없고 단지 제팔식을 자체로 삼을 뿐이다.
이를 두고 육근은 마음이고, 마음에 비친 제법은 육진이어서 이 두 가지는 마치 거울에 묻은 때와 같다. 거울의 때가 지워질 때 광채가 스스로 나타나듯 마음과 제법에 대한 두 가지 집착을 잃는다면 마음의 자체는 즉시 진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일체 제법의 명칭과 모습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 문제를 유식에서 말하는 세 가지 자성으로 설명한다면 우리가 최초로 일으키는 일념불각은 인이 되고 그 인이 변화한 것은 연이 된다. 그러므로 옛날 큰스님은 “내적으로 우리의 몸과 밖으로 세계가 허깨비처럼 나타나 실제 있지 않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내 마음 망상의 인과 연이 화합해서 나타난 모습을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체제법은 이미 내 마음의 인연을 따라서 일어났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이다. 따라서 제법은 있다 해도 실재 있지 않는 것을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고 한다. 이러한 의타기성은 자성이 본래 없어 그 자체가 공적한 일심일 뿐 내 마음밖에 실재하는 법은 없는 그 자체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한다.
수행자가 이와 같이 관찰한다면 제법에 대해 분별망상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그것을 제법의 진실한 자체를 체득하고 망상을 그쳤다하여 체진지(體眞止)라고 한다.
체진지를 통해서 변계소집성은 본래 공적하고 의타기성은 있다 해도 허깨비와 같다는 것을 명료하게 통달한다면 사물 그 자체가 바로 원성실성이 된다.
가령 육도범부에서 모든 법의 명칭과 모습을 얻지 못하여 삼계내의 견사혹(見思惑)을 일으키지 않으면 체진지이고, 소승의 제법과 명칭을 얻지 못하여 진사혹(塵沙惑)을 일으키지 않으면 방편수연지(方便隨緣止)이고, 보살이 거처하는 실보장엄토의 명칭과 모습을 얻지 못하여 근본무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식이변분별지(息二邊分別止)이다. 이것을 삼지(三止)라고 한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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