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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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세상 전체를 한마음 속에서만이 구할 수 있어
말로 옮기려 하지 말고 그냥 집어먹으세요

지켜보고 관한다면
인과응보가 무너지고

습이 녹아지고
나를 발견하게됩니다

오늘 셋째 일요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또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 하게 됐습니다. 우리 한도반으로서 오늘은 실천궁행과,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인간 자체가 첫째 돼야 한다는 문제,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부처가 된다 보살이 된다 법신이 된다 이러기 이전에 인간 자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마음으로 들이고 내는 것을 정(定)으로써 한자리에다 두고 들이고 낸다면 정향(定香)입니다, 그게. 그래서 정향부터 돼야 계향(戒香)도 역시 잘 지킬 수가 있는 거죠. 스님네들만 계향을 지키는 게 아니라, 여러분한테 항상 그렇게 말씀드리죠? 평등한 마음으로써 웃으면서 대해 주고, 둘 아닌 그 마음씨로 항상 둘 아니게 나로 보고 내 아픔으로 보고, 모든 것을 내 자식 내 부모 내 형제로 보고 그렇게 풀 한 포기도 남으로 보지 말라고요. 그럼으로써 그 지견이 생기고 해탈이 생기고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 되죠. 사람이 본래 나쁜 사람은 없겠지만 모르는 게 죄가 아니겠습니까? 모든 게 몰라서 죄를 짓고 그 죄의 대가를 받고 인과응보라는 그 엄청난 문제를 천차만별로 받아들이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여러분한테 항상 얘기하고 넘어가는 말을 오늘은 수박에 비유해볼까요? 그전에도 내가 한번 얘기한 예가 있죠. 과거는 현실에 짊어지고 나왔으니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없다고. 여러분이 만약에 수박 한 덩어리라면 그 수박 속에 씨가 있지 딴 데 있겠습니까? 어저께 수박을 심었더니 오늘의 수박에 그 씨가 도로 들어 있는 걸 모르고 말입니다. 그 수박씨가 싹이 되고 또 그 싹이 수박을 열리게 했기 때문에 수박씨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씨와 넝쿨과 수박, 이게 둘이 아니라는 뜻이죠. 그러면 이렇게 비유해서 말씀드리는 것을 이해를 못하신다면 인간의 뿌리는 보이지도 않을 겁니다. 나무의 뿌리는 보이나 인간의 뿌리는 볼 수 없는 것이고, 나무가 자신의 뿌리를 못 보듯이 그렇게 못 볼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과거의 씨를, 내가 마음내기 이전이 과거 씨인데 그것을 불성이라고 하죠. 그 불성을 바깥에서 찾으려고 애를 쓰니 바깥에서 찾아집니까? 항상 안에 있는 수박씨와 같은 건데.
그러니 절대로 바깥에서 지식이나 학식에 끄달려서는 아니 되고, 한곳으로 들고난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24시간을 다 참선을 하고 좌선을 하고 앉았어도 그것이 참선이 아니고 좌선이 아닙니다. 지금 뺑뺑 둘러 돌아가면서 사방이 터지고 이렇게 돌아가는 이치가, 끝없는 진리가 쳇바퀴처럼 돌아가고 있습니다.
항상 말씀해드렸습니다만 주인공에 모든 것을 놓고 거기에서만이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고 오직 꺼내는 것도 거기요, 넣는 것도 거기, 들이는 것도 거기고 내는 것도 거기라는 것을 꼭 아셔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없으면 세상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내 몸에 중생들도 없을 것입니다. 혹성이라는 이 자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고 그것이 바로 화두라는 것도 얘기했습니다. 요거를 먼저 말씀드리는 것은, 항상 뒷받침이 돼 있어야만 되겠기에 말입니다. 처음 오시는 분들도 계실 테니까요.
지난번에 그랬죠? 그 무슨 인연으로 병이 생겼으며 병은 어떻게 해야 낫느냐고 문수가 유마힐 거사한테 물었듯이 말입니다. 그 뜻에서 벌써 그랬죠? 내 몸속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나아야 내 몸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직감적으로 내 몸으로부터 체험을 하고 실험을 하고 또 지혜가 스스로 우러나와야 되는 겁니다. 거기에 그런 뜻이 숨어져 있다는 얘기죠. 말로만 듣고 이론으로만 듣지 마시고 그 뒷면의 뜻을 아셔야 됩니다. 이번에는 문수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방이 왜 비었으며 왜 시자가 없습니까?” 그러니까 유마힐은, 여러분이 다 아시리라고 믿어요. 뭐 저는 무지렁이니까, 보지 않았으니까 모르겠지만 예전에 이것도 들은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물으니깐 “모든 부처님 국토도 비어 있으며 외도나 마구니가 다 내 시자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그러면 빈 것도 아니고 비지 않은 것도 아닌 그것은 어떠한 연고입니까? 여러분한테 질문 한번 하겠습니다. 전부 빈 것도 아니고, 비지 않은 것도 아닌 그것은 무엇입니까? 만약에 그렇게 누가 물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관문이기도 하고, 물론 말 잘하는 분들은 또 말도 잘하시겠지만 또 말을함이 없이 하시면 됩니다. 말이라는 건 귀신 방귀와 같으니깐요. 말은 하지 않되 하시면서, 종은 쳤는데 종소리만 났지 종 친 사이가 없고, 그 종소리는 우르르 퍼졌는데 퍼진 사이도 없이 퍼졌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 뜻을 이렇게 본다면, 그것은 찰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것이 돌아갈 때에 나라고 할 수 없으니 비었다고 했어요.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렸었죠?
예를 들어서 “물과 산이 둘이 아닌 까닭에 물은 물대로 있고 산은 산대로 있느니라.” 하는 얘기가 있죠? 그 속에는 뜻이 들어 있어요. 뭐냐? 아까 “모든 부처님의 국토는 비었느니라. 비었으며 또는 마구니나 외도가 다 내 시자인 것입니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하고 그 말하고 어디가 똑같으냐 그러겠죠? 빈 것은 찰나로 돌아가니까 비었고, 외도나 마구니가 전부 내 시자라고 한 것은 안팎이 다, 보이는 데나 보이지 않는 거나 다 내 시자인 것입니다, 또 도반이고. 부처도 따로 없고 중생도 따로 없고, 마구니도 따로 없고 외도도 따로 없어요. 언어가 붙지 않지요.
그렇기 때문에 ‘강은 강이요,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니라.’ 한 뜻은, 예를 들어서 컵이면 컵대로 물을 담거나 또 커피를 담거나 뭐 음료수를 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컵이 필요하겠죠. 그릇대로니까 컵에 담을 물건은 컵에 담고 접시에 담을 물건은 접시에 담고, 대접에 담을 물건은 대접에 담고 이렇게 해야만이 천차만별로 돼 있는 그릇대로 물건을 요리를 해서 한데 떨어뜨리지 않고 차원에 따라서 담아준다는 뜻입니다. 밥을 한 솥 해서 담아보십시오. 그렇게 안 되죠? 그렇기 때문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뜻을 모르면 이게 자꾸 엇갈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 뜻을 알아야 되겠다. 이게 하나가 터지면 즉, 물리가 터지면 전체가 거기 붙어 돌아가요. 따로따로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아까 수박이 따로 없듯이. 그러니까 물리가 터지면 모두가 한데 붙어 돌아가죠. 싹과 수박과 씨가 따로 없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산과 물은 둘이 아니나 산은 산대로 있고 물은 물대로 있느니라. 천차만별로 각각 있지만 한데 돌아가고, 한데 돌아가지만 각각 분리가 돼서 네 모습 다르고 내 모습 다르고 네 차원 다르고 내 차원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마음을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붙여놓고 자기가 그냥 천백억화신 노릇을 합니다, 그 마음이. 그렇기 때문에 동방에는 아촉불이라고 떠억 상표를 붙여놨습니다. 자기 이름입니다, 그게. 석가가 석가대로 그냥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럼 부처가 아니게요? 만약에 부처가 있다면 부처가 아니죠. 그래서 떠억 아촉불로 붙여놓고 서방정토에는 아미타불로 붙여놓았죠.
여러분, 이해가 가십니까? 그 마음 말입니다. 자기에게 자기가 이름을 붙여놓은 겁니다. 해가 뜰 때, 돌아서 동방에서 해가 뜨고 또 서방으로 가고, 서방은 동방이 되고 동방은 서방이 되고, 항상 이렇게 돌아가죠? 그런데 돌아올 때에, 서방에서 올 때는 남방을 통해서 동방으로 통하고, 동방에서 서방으로 갈 때는 북방을 통해서 서방으로 간단 말입니다. 이렇게 돌아가죠. 그러니까 한쪽은 봄소식이 오고 다른 쪽은 가을로 가죠. 겨울로 간단 말입니다, 겨울잠 자러. 표현을 이렇게 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야만 이해가 빠르리라 믿고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바세계엔 뭘로 이름을 붙여놨느냐 하면 관세음으로 붙여놨죠. 또 지천국에는 무엇으로 붙여놨느냐 지장으로 붙여놨고요. 그러니 자기가 이름을 자기 마음으로 붙여놓고 자기가 움죽거리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움죽거리는 것은 어떻게 했느냐? 또 한편에는 문수를 놔놓고 한편에는 보현을 놨습니다. 그럼 이건 누구겠습니까? 아까 수박 얘기 했죠? 싹이나 수박이나 씨나 이것이 셋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라는 거요. 부처는 생각 내기 이전이 부처라고 보고요, 생각을 냈다 하면 그게 바로 문수입니다, 법신! 그럼 생각을 낸 것이 뭐냐? 바깥으로 나온 게 보현이에요. 그래서 들이고 내는 것도 보현이요, 모든 걸 보호해나가면서 화하는 것도 보현이다 이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만히 있으면 생각 내기 이전이요. 생각을 냈다 하면 법신이요 움죽거렸다 하면 화신이고 보신이에요. 여러분이 넘어졌으면, 어디 다리가 다쳤으면 “아이쿠!” 하고 여러분 손이 가서 털고 얼른 일어나지, 딴 사람이 털어주고, 딴 사람의 손이 와서 털어주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깐 바로 보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보신이며, 그리고 자꾸 찰나찰나 화하니까 화신이죠. 그래서 돌아가면서 이름이 여간 많지 않습니다. 야! 이걸 털어주고 남이 엎드러졌어도 일으켜서 털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보현이 되고, 또 보이지 않는 데도 보호해나가면 보현이 되지마는, 만약에 그렇지 않고 보호해주기 위해서 이리로 저리로 화해서 바꿔질 때에는 화신이죠. 그러니 이름이 수차적으로 바꿔져요. 여러분이 부모를 만날 때는 자식이 되고 자식을 만날 때는 부모가 되고 아내를 만날 때는 남편이 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누구를 만날 때, 내 아내를 만날 때 나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거죠.
그러니깐 경을 보면 밑바닥의 백지를 볼 수 있어야만이 경을 올바로 볼 수 있다라는 얘기죠. 그래서 우리가 한마디 한마디 경 구절에 있는 것도 그 뜻을 헤아려서 실천궁행을 해야지 부처님의 참 불제자라고 할 수 있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으로 될 수가 있다 이런 말입니다. 항상 여러분에게 말하죠. 자식한테도 부드럽게 해주라고, 부드러운 말을 해주라고, 평등한 마음으로서 그렇게 하라고 그러죠. 그것이 바로 보살행이니깐요.
그런데 또 한 가지, 문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빈 것은 어떠한 것으로 비었다고 합니까?” 하고 물었어요. 여러분에게 그렇게 물었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어떠한 것으로 비었다고 합니까? 내가 항상 말씀해드렸죠. 말을 배우라는 게 아니라 그 뜻을 배우시라는 얘기죠. 뜻을 아시라는 거죠. 여러분은 이런 말을 해도 그냥 집어먹어야 돼요. 말로 옮기려 하지 말고 그냥 집어먹어야 되죠. 목마르면 물 먹듯이 말이에요.
“본래 공했기 때문에 비었다고 합니다.”라고 대답을 했대요. 그래서 “본래 공한 것을 어떻게 공이라고 체험을 합니까?” 하고 또 물었대요, 글쎄. 그래 꼬리에 꼬리가 붙어서 돌아간 거죠. “공했다고, 그 분별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공한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라는 얘기죠. “그러면 공은 어디서 구합니까?” 부처님 해탈 속에서 구하죠? 그렇죠? 그런데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는데, 공한 것을 어디서 구하느냐니까, “육십이 소견, 외도 소견 속에서 구합니다.” “그래, 육십이견은 어디서 구합니까?” 그러니까 “부처님 해탈 속에서 구한다.” 그랬어요. 돌아가서 참 묘하게 대답했어요. 왜냐하면 육십이견 속에 소견, 외도 소견 모두를 종합한 겁니다. 지금 이 세상 전체를 한마음속에서 구했다는 뜻이죠. 거기서밖엔 구할 수 없는 거죠.
그러니 그러한 뜻을 우리가 삼키면서, 또 삼키고 행하면서 우리는 지혜를 넓혀가야 되는 거죠. 옛날에는 ‘대나무 귀신 방귀를 먹고 넓혀간다.’ 이런 말을 했죠. ‘자기 싹을 구하려면 대나무 방귀씨를 구해야 하고 그 방귀씨를 싹을 틔어서 기르려면 대나무 귀신 방귀를 더 먹이지도 말고 덜 먹이지도 말고 아구창 나지 않게 먹여서 키워야 된다.’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 낚싯밥인지도 모르죠. 이 도리를 아는 분들은 어디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지난번도 얘기했듯이 말이에요. 그래서 “육십이견은 어디서 구합니까?” 하니깐 부처님 해탈 속에서 구하고 “부처님 해탈은 어디서 구합니까?” “중생들 마음속에서 구한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거와 같이 “내 여러분이 아니었더라면 또, 풀 한 포기, 벌레 하나가 아니었더라면 내 어찌 그것을 보고 느끼고 체험했겠습니까? 그러니 모두 벗이요, 모두 도반이요, 모두 스승이요.” 하고 말을 했죠. 그쯤 해놓고요, 요거 한마디를 하고 딴 말로 넘어가겠습니다.
여러분이 생활을 하시면서 제일 어려운 게 가난과 병고와 우환 등 여러 가지죠. 자식들을 이끌어가는 데도 그렇고 또 부모가 자식들을 이끌어가려면 움죽거리는 그 생활도 그렇고 자기 몸 끌고 가는 것도 그렇고 참 여러 가지로 괴로움이 한두 건이 아니죠. 거기에 조금이라도 이 도리를 알고 공부한다면, 아주 편안하고 자유스러운 도리, 또 생산적인 도리, 개발적인 도리를 공부하신다면 이것은 불가사의한 법으로서 그대로 편안하게, 언어조차도 붙지 않는 편안하고 자유스러운 생활을 해갈 수 있는 거죠.
가만히 보면요, 사람들이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바깥에서 유전성으로 오든, 안에서 인과로 인해서 벌어지든, 영계가 들고 뭐, 안팎으로 그런 게 일어나거든요. 생활을 하다가도 뭐 회사가 망했다든가 또 공부를 하다가도 그냥 지친다든가 하는 문제들은 도무지 내 능력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죠.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들은요. 그리고 생활 속에서 가정환경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 이런 거를 가만히 보면 여간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만 그것을 다 물리치고 녹이고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용도에 따라서 오는 대로 거기에 맡겨놓고 거기서밖에는 해결을 못 한다 하고선 거기다 딱! 맡겨놓고 지켜보는 그것이 관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가 아니라 관하는 거다 이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켜보고 관한다’ 하면 그럼 어떻게 되느냐? 인과응보가 무너지고 습이 녹아지고, 나를 발견하게 되고 진짜 공부를 하게 된다 이겁니다. 또 한 가지는 바로 입력입니다. 입력! 컴퓨터에 입력하듯이 용도에 따라서 오는 대로 컴퓨터에 입력을 한다. 오는 대로 입력을 해놓으면 그게 돌아간다. 자동적으로 돌아가게 돼 있는 자동기입니다. 물질적인 것을 떠나서 말입니다.
그러니깐 예를 들어서 이제는 둘이 아니게 내 주인공에, 아들이 아파도 내 주인공에다가 모든 걸 맡겨놓습니다. 그래서 웬만큼 해나가서 완벽하게 이게 선다면 아! 그러면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아까 뭐랬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그랬죠? 둘이 아닌 까닭에 물은 물대로 있고 산은 산대로 있죠. 둘이 아닌 까닭에 자식은 자식이고 나는 나다 이겁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병을 고쳐주려면, 예를 들자면 특히 정신질환은 더합니다. ‘네 주인공만이 너를 이끌어 갈 수 있다.’ 네 주인공만이 너를 이끌어 갈 수 있다 하는데, 거기에 무엇이 붙습니까? 그런데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묘한 생각이 있어요. ‘에이구! 이거는 무슨 어머니 조상이 붙었고 무슨 누구 영계가 죽었는데 여기 붙어서 이럭하고.’ 아, 요런 생각들을 한단 말입니다. 만약에 그렇다 할지라도 그 생각을 떠나야 할 텐데, 놔야 할 텐데 고런 생각들을 하니 이게 떨어집니까? 네? 뭐가 붙었습니까? 물 한 그릇에다 물방울 하나 넣은 거와 같은데, 항상 그렇게 일러드려도 그것을 놓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여북하면 이렇게라도 하는 겁니다. 그래! 딴 영계가 들어왔다 합시다. 그러면 이렇게 부었습니다. (컵의 물을 뚜껑에 조금 부었다가 다시 컵에 부으신 후) 그럼 물 한 그릇이 따로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은 체가 없어요. 그래서 의식이 들어와서 딴 영계가 내 집 주인 노릇을 하더라도 내가 부족한 것도 부족한 거지만 모두 한 그릇에 있어요. 같이 먹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먹어치운다면 상당히 좋을 것을 그렇게 하질 못해요.
그런데 거기 한데 들어갔으니까 천 명이 들어가도, 두 명이 들어가도, 한 명이 들어가도 ‘아이고, 죽은 사람이 이렇게 들어와서 우리 아들이 이렇고 우리 딸이 이렇고 무슨 내가 이렇고 무슨 누구가 이렇고….’ 이런 생각일랑은 아예 하지 말라 이겁니다. 그건 왜냐? 여기 물컵에 들어갔으면 벌써 한 그릇이야. 한 물이야. 영에다가 영을 넣으니까 몇이 됩니까? 예? 그냥 영이죠? 허허. 스무 개를 넣으면 또 더 두드러집니까? 그냥 영이죠? 그런데 거기 뭐가 붙었다고 합니까? 참 이상스럽단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들을 하니 십 년이고 몇 년이고 그냥 고통을 받고 애를 쓰는 거예요.
왜 각각 보십니까! 둘이 아닌 도리를 가르치는데 왜 각각 보시느냐 이겁니다. 요거는 내가 꼭 말을 하고 넘어가겠다고 다짐을 한 거거든요, 하도 애를 쓰니까. 그래서 영과 영이 열 개가 한데 합쳤어도 둘이 아닌 까닭에 야! 아무나 들어왔더라도 주인은 주인 아니겠는가! 그러니 주인공이야, 그냥. 당신이 그 마음속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바로 주인공 아닌가! 그러니 이 몸을 이끌어가는 것은, 정상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당신밖에 없어. 뜻으로다가 속의 주인공을 이렇게 탁 잡아주는 겁니다. 아셨습니까?
시식을, 제사를, 천도를 수백 번 드리는 것보다 그 한생각이 필요한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땀 흘리고 돈 벌어다가 허탈히 쓰는 법을 버리고 돈 쓰는 법도 배워야 됩니다. 돈 버는 것만 배우지 마시고 쓰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올바르게 써야지 올바르지 않게 쓰는 것은 귀신 놀음이나 한가지고 도깨비장난이나 한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못사는 것도 여러분의 차원 때문입니다, 모르는 차원. 죄가 있어서 그렇게 고생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차원 때문에. 난, 여러분이 과거에 무슨 죄가 있으니까 뭣이 없다 이런 소리는 안 합니다. 못 들어보셨죠? 이거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열 명이 들어갔어도 당신이 바로 주인공 아니겠는가!’ 하고 주인공만이 속의 뜻을, 말로 하지 말란 말이에요. 뜻으로서 주인공만이, 당신만이 이 애를 정상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신념과 믿음, 그것을 가지고 그저 만날 적마다 그렇게 해준다면, 또 만나지 않을 때도 그렇고 만나서도 그렇고 먼데 있으나 가깝게 있으나 똑같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주를 달린대도, 탐험을 한대도 둘이 아닌 까닭에 마음은 그저 어디도 갈 수 있다는 얘깁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죠? 산이 높아서 못 넘는 게 아니고 물이 깊어서 못 건너가는 게 아니고, 은산철벽이 두꺼워서 못 뚫는 게 아니라고요. “사방은 툭 터졌느니라.”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얘기해드렸으니 인제는 모든 마음을 같이 이렇게 들면서 중용을 하세요. 활용이 아니고 중용입니다. 안팎이 다 들리는 그런 활용 말입니다. 그것이 중용이에요.
또 한 가지 말씀해드릴 것은, 내가 항상 오신통, 오신통 했는데 오신통이라는 것은 이름일 뿐이지, 그게 무슨 대단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도 다 가지고 계시니깐요. 무슨 없는 것을 발견을 해야 그게 대단한 거지, 본래 있는 것인데 여러분이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다시 그냥 얘기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어떡하면 알아듣기 쉬울까 해서 현실의 물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현대 용어로써 얘기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만약에 머리 위에 신통이 다섯 개라면, 줄창 말을 하죠? 숙명통이니 타심통이니 천이통이니 신족통이니 또는 천안통이니, 이 다섯 가지 문제가 여러분한테 재료로 주어져 있다고요. 만약에 그걸 벗어나서 대뇌로 돌아간다면 모두 통신이 된다 하는 걸 레이더망으로다 한번 비교해봤습니다. 신족통이라는 것은 아까 팩스로 한번 비교해봤죠?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니까요. 또 탐지기 보셨죠? 그것은 타심통에다가 비유할 수 있다고 항상 얘기했죠.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말을 되풀이하느냐 하면 얘기할 게 있어서 그래요.
그런데 그 컴퓨터와 탐지기, 즉 컴퓨터는 과거를 짊어지고 나온 겁니다. 과거에 살던 것이 모두 입력이 돼가지고 나온 자동컴퓨터입니다, 지금 여러분 속에. 그게 아니라면 자동적으로 이렇게 발생이 되나요? 악도 선도 속상하는 것도, 또 머리가 틔는 것도 전부 거기서 나오는 거니깐요. 사는 대로 입력이 돼 있죠. 자기가 아는 것이 그대로 입력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 묘한 법이죠! 그러니 묘한 법이라고 할 수밖에요.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되면서 이렇게 억겁을 거쳐서 인간으로 등장을 했으니까 만물의 영장이기도 하죠. 참 그렇습니다. 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거룩하고 그렇게 즐겁고 소중할 수가 없어요. 왜? 그 육신이 아니었더라면 이 도리를 또 모르거든요. 그리고 여러분도 부부지간이나 자식지간으로 살다가 자식이 하나 죽으면 그렇게 슬프죠. 또 식구가 다 죽고 자기 혼자만 남으면 그렇게 외롭고 그러니까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는 걸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을 하다가 그건 덤으로다가 얘기한 겁니다.
그래서 그 다섯 가지가 여러분한테 다 주어져 있어요. 컴퓨터도 붙어있고, 보이지 않는 그 자체 내에 갖고 있는 숙명통을 컴퓨터로 비유했으니까, 그것도 붙어있고 남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는 타심통도 붙어있고, 또 팩스도 붙어있고요. 또 요거는 무전통신기도 붙어있고, 천체망원경도 붙어있습니다. 요렇게 조르라니 붙어있어서 (왼손을 펴서 그 주위를 오른손으로 돌려 보이시며) 요것이 돌아갑니다. 네? 들이고 내는 요것. 통신망은 바로 레이더망이 하고 있죠. 그래서 레이더망은 통신이 오면 대뇌에서 모든 것이 통신이 되듯이 그렇게 하고 있죠. 그래서 요것이 거기에 통신이 되면 다 자기 활동을 할 수 있게끔 컴퓨터에 입력이 들어갑니다. 이건 자동입니다.
여러분은 그거 쉽게 물질적인 컴퓨터로만 생각하시지 말고, 물질적인 컴퓨터도 사람이 입력을 해야 쓸 수 있지 입력을 안 해놓은 거는 못 씁니다. 그런 반면에 인간은 그대로 자동적으로 용도에 따라서 오는 대로 거기다가 입력을 해놓으면 그대로 그대로 돌아갑니다, 이게. 그런데도 여러분은 그걸 이해를 못하십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게 어떻게 말을 해드려야 이것이 증명이 되나 하고 이렇게 저렇게 비유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이 자동기계를 굴리려면 따로 이 오신통이 돌아가는 바깥에서야만이 이걸 굴릴 수가 있는 거죠. 그래 우린 그대로 바깥에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나오는 대로 안에서 일어나는 거 바깥에서 오는 거, 이것이 바깥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안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닌, 자기가 그대로 한생각을 이렇게 하느냐 저렇게 하느냐에 따라서 컴퓨터에 입력이 되는 겁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0년 3월 18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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