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問曰 若不立文字 以何爲心 答曰汝問吾 卽是汝心 吾答汝 卽是吾心.
여쭙기를, “본 바탕자리는 표현할 수도 없고 어떤 개념으로도 규정 지을 수 없어 따로 언어나 문자를 빌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마음을 삼습니까?” 달마 스님이 대답하셨다. “그대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요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는 것이 곧 나의 마음이라!”
[해설]
삼처전심(三處傳心 부처님께서 세 곳에서 가섭 존자에게 마음(법)을 전했다는 일화)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다자탑 앞에서 가섭 존자에게 자리를 반으로 나눠서 앉게 한 일은 가섭 존자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법화경>을 설하시면서 대중에게 꽃을 들어보일 때 가섭 존자가 그 참뜻을 알고 빙그레 웃어 답을 하자 다시 제자를 인정하셨습니다.
<법화경>을 설하실 때 천상에서 꽃비가 내렸는데, 부처님께서 그 많은 꽃 가운데 한 꽃을 잡아서 대중을 상대로 들어보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처님은 단순히 ‘꽃을 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꽃의 참뜻을 일러라’한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제가 죽비를 들어보이면서 ‘일러라!’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선사들이 그렇게 하죠. ‘일러라!’ 그럼 여러분들은 ‘일러라!’할 때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지난 호에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라는 뜻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 말을 알아들으면 제가 이 죽비를 든 답이 나오는 거예요. 어떤 스님이 한소식을 했다고 소문이 나자, 한 스님이 찾아가서 대나무로 엮은 토시를 보이면서 “일러라!” 했을 때, “토시라고 해도 맞지 않고 토시가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이렇게 답을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인가를 해주지 않았어요. 그러면 제가 죽비를 보이며 “일러라!” 한다면 여러분들이 뭐라고 답을 해야 될까요? 이때 용(用) 차원에서 묻는 거냐, 체() 차원에서 묻는 거냐 하는 이걸 아셔야 돼요.
‘체’라는 것은 우주의 실상(實相)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용’이라는 것은 그 체에서 작용을 통해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일러라!” 했을 때는 이 죽비의 체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죽비의 본래자리를 일러라!” 하고 묻는 겁니다.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는 본래자리를 묻고 있는 겁니다. 아까 한 스님처럼 ‘토시의 본래자리를 일러라’ 한 건데 입을 열어 설명했기 때문에 ‘그르친 자리’이고 본래자리에 대한 답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인가를 못받은 거예요.
이 죽비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표현도 할 수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일러라!” 했을 때, 입을 떼면 답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모양 없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나옵니다. 거기에 마음을 둔다면 우리 욕심은 다 끊어져 버리는 거예요. 하나의 마음에서 작용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은 사실이 아닌, 텅 빈 것입니다. 마음에서 보면 텅 비어서 모양이 없는 거예요. 이미 과학에서도 증명했듯이 일체 현상이 물질이 아니라는 것, 물질을 분석해 들어가니 에너지와 파동으로 이뤄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본래의 실상자리, 마음의 자리는 모양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있다’고 하면 모양이 있어야 하고, ‘없다’고 하면 아주 없어야 되는데 있기는 있거든요. 누구에게나 마음은 다 있지만, 그 마음을 볼 수는 없습니다. 모양이 없는 것이기에 우리가 편리한대로 이름을 붙여 놓은 겁니다. 보아도 본 것이 아니고 들어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실상자리, 본래 그 자리는 표현할 수도, 규정지을 수도, 들을 수도 없기 때문에 따로 언어나 문자를 빌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마음을 삼습니까?’ 이렇게 달마 스님에게 제자가 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달마 스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대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요,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는 것이 곧 나의 마음이라.” 이와 같이 마음과 마음이 서로가 통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것은 마음 아닌 게 없습니다. 내가 마음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고, 대답하는 것도 마음이 대답하는 것입니다.
한 스님이 조주 스님을 찾아가서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이옵니까?” 하고 물으니, “뜰 앞에 잣나무니라” 이렇게 대답을 해주었어요. 달마 스님의 마음이나 조주 스님이 거처했던 뜰앞의 잣나무라고 한 답이 마찬가지입니다. 또 어떤 스님이 “불교의 대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마른 똥 막대기다” 했단 말이에요. ‘똥 막대기’나 ‘부처님의 마음자리’나 다 하나이기 때문에 질문 한 그대로 답을 했던 거예요.
그런데 ‘체’의 입장에서는 바른 답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큰스님이 주장자를 보이면서 대중에게 “일러라!” 하거나, 주장자를 땅! 땅! 땅! 세 번 치고 일러라 할 때, “일러라!” 하는 것은 ‘체’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는 입을 떼면 답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삼배를 하던지 같이 할(喝)을 “악!”하던지 하면 답이 통하는 거예요. 그런데 “죽비에 대해서 일러보거라!” 하면 ‘체’가 아니라 ‘용’에서 묻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마음자리를 깨달은 분들은 걸림이 없는 거예요. 이 안경이나 죽비나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하면 어떤 질문이라도 답이 나가는 것입니다.
■ 청주 혜은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