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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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마음은 마음의 문을 여는 날!
오늘 살다가 죽는다 하더라도 허허 웃을 수 있어야

자기가 자기를 알기 위해 그렇게 수난을 겪지 않으면 길을 모르죠
그 수난을 겪은 게 양식이되고 재산이 되고 공덕이 되는 거죠!

무엇보다도 여러분한테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따뜻하게 앉아서 서로 법담을 나누게 해 드려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내가 부족한 탓으로 여러분을 춥게 해 드려서 진정 마음이 아픕니다. 올라오면서 봐도 그렇고, 어저께도 그렇고, 정말 마음이 얼마나 안됐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춥더라도 여러분이 이해하시고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내가 떠돌기 시작했던 아홉 살 때 이후, ‘그때는 셔츠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홑것만 입고 돌아다닐 수 있었던가. 그래도 왜 춥다는 생각이 없었던가. 미쳤을까. 미쳐서 그런 거를 몰랐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내가 추운 줄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도 춥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죄송합니까? 그렇더라도 이런 공부를 하는 데 그런 고난도 없이 어떻게 공부가 되겠는가 하고 생각을 하시면서 이해를 하고 넘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이 입춘이라고 하죠. 입춘이라고 한 그 뜻은 어디다가 갖다 붙여도 말이 됩니다. 뜻이 되고요. 형체적인 문을 여는 게 아니라 마음의 문을 열자는 거죠. 또 우수에는 입을 뗀다고 하죠. 우리가 이렇게 문을 열고 나오면 말을 하고, 말을 하면 움죽거리는 게 되는 것이 우수, 경칩이죠. 그러한 뜻이라고 생각을 해 보셨는지요. 그래서 봄이 오는 마음은 마음의 문을 여는 날이고, 입이 트이는 날은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거고, 경칩은 우리가 마음대로 자유롭게 뛸 수 있는 날이라고, 그렇게 한번 생각해 보셨어요? 우리가 이름은 있되 이름 없는 이름이기에 함이 없이 한다 이런 말입니다. 이름도 그냥 공연히 생긴 게 아닙니다. 알고 본다면 이름도 참 천차만별로 많지만, 그 이름대로 자기의 차원과 모습이 주어져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마음의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줄과 인간의 근본의 줄이 직결이 돼 있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마음을 쓰고 행동하는 그 도리가 항상 직결이 돼 있기 때문에 우주 법계에서 다 알게끔 돼 있고 거기서 차원이 정해지죠. 근본에서 차원이 정해지고, 근본에서 알고, 근본에서 아는 것을 우주 법계에서 알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대로 입력이 돼서 차원대로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에 다시 나온단 얘기죠. 우리 인생의 과거를 돌아서 미래를 돌아서 현재를 돌아서 오면…, 우리는 이 현재 땅덩어리에 있지만 근본 마음의 영혼이 그렇게 돌아간다 이겁니다. 돌아오고 돌아가고 돌아오고 돌아가고…. 짐승같이 살면 짐승의 모습이 될 것이고, 사람같이 산다면 사람의 모습을 해 가지고 나올 것이고, 짐승의 모습과 사람의 모습을 다 놓고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할 때에는, 그냥 우주간 법계에서 인도를 해 가지고 모든 게 그저 자동적으로 인도가 돼서, 차원이 높게 모습을 해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와서 많은 사람을 이끌어 가고 먹여 살리는 사람으로 또 형성되죠.
그러니까 팔자 운명이라는 것은 누가 준 게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 가지고 팔자 운명을 겪고, 또 내가 만들어 가지고 팔자 운명이 없이 자유스럽게 그냥, 자동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게끔 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이 얼마나 중요하고 광대무변한지, 여러분이 진짜 마음의 공부를 하셔야 이 도리를 완전히 터득을 합니다. 우리가 본 적도 없고, 먹어 본 적도 없고, 먹고 싶어 해 보지도 못한 것은 무슨 일이 왕창 생겨도, 몰라서 해결을 못하고 맙니다. 그걸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그래서 사람의 생각이 융통성이 있고 지혜가 있으면, 누가 책에서 가르쳐 주고 말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아, 요런 건 요렇게 해서 해결을 하고, 요건 요렇게 해서 해결을 하고, 이게 다 나옵니다. 마음의 물리가 터지면 그렇게 다 용무를 할 수 있는 거죠. 보이지 않는 데서 보이는 데로 이렇게…. 용무라는 건 보이지 않는 데서 작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음을 여는 날이니까 여러분이 되는 거든지 안 되는 거든지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허허허. 질문하는 날이 따로 있고 질문 안 하는 날이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있는 날이니…. 우리가 좋은 것만 어떻게 질문하리까. 조그맣고 크고가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요 앞을 내다보는 거나, 여기에서 우주를 보는 거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초월해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도리를 알아야, 색(色)이 공(空)이고 공이 색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의 뜻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대로 여여하게 돌아가건만, 공해서 찰나찰나 화(化)해서 돌아간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여여한 걸 모르는 거죠.
사람이 마음을 배우려면 모든 거를 이 마음으로 들이고 내야 합니다. 잎새 하나까지도, 그 나뭇가지의 털 하나 난 것까지도 뿌리에 붙어 있는 것이지 딴 데 붙어 있는 게 아닙니다. 일거수일투족, 여러분이 마음을 내고 들이고, 가정에서 서로 토론하고 나가서 토론하고, 만나고 보고 듣고 하는 그 전체 도리가 뿌리에 달려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저것 아리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책을 보니까 이거는 안됐다 잘됐다, 남의 얘기를 들어 보니까 이건 틀리다 옳다, 또는 말을 하는 게 아주 옳은 일이다, 아니다 하고 그렇게 일일이 따져서 생각 마세요. 처음에 배우실 때는 잘된 거든 잘 안된 거든, 밉든 곱든, 길든 짧든, 못났든 잘났든, 여자든 남자든, 애든 어른이든 모든 것은 무조건 거기에다 놓고 그저 무조건 입력을 하세요. ‘너만이 헌 물이 새 물이 되게 할 수 있어!’ 하고요. 이거는 형체가 아니기 때문에, 정신계이기 때문에 무한량 바꿀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어느 집에 사람이 살러 들어가기만 하면 죽는다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우리 마음공부 하는 사람이 그 집을 싸게, 반값에 사 가지고 들어가게 됐어요. 그래서 “이런 집을 스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걸 우리가 산다면 한 반절밖에 주지 않을 텐데요.” 하기에 “들어가라!” 그랬어요. “그저 있는 것들은 모조리, 천 개도 좋고 만 개도 좋고, 허허허…, 십만 개도 좋으니까 한도량에 있는 거, 몽땅 그냥 거기다가 한바다에 집어넣듯 집어넣어 봐라. 헤아릴 수 없는 물방울이라도 바다에 들어가면 그냥 바다지 물방울이 따로따로 있다고 하지 않는다. 다 집어넣어 봐라.” 그랬어요.
그랬더니 이사를 가서 사는데 너무나 좋아하더랍니다. 금방 한 사람의 사람이 돼서, 또 사람은 도로 사람이 돼서, 수레바퀴에 돌려져 가지고 재생이 돼서 나갔으니까요.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착한 사람의 마음속을 돌아서 한번 그렇게 본받아 가지고, 그 악한 마음이 다 녹아지고 얼마나 좋게, 두려움이 없고 인간의 나쁜 마음의 기운이 없이, 그저 자비하고 인정 많고 권위 있게 세상을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또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돼서 나가게 됐으니, 꿈에서 고맙다고 그냥 백배사례를 하더랍니다. 자기는 이제 참, 의인을 만나서 좋은 길을 걷게 됐다고 하면서 그렇게 고마워하고 잘 사시라고 그러고선 이만한 구슬 하나를 주고 가더랍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사람이 죽기는커녕 잘되니까, 판 사람이 배가 아플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값을 더 준대도 안 팔고 오히려 그 집이 낡았으니까 헐고선 다시 집을 짓고 잘 살게 됐습니다.
그런 거와 같이 물방울이 수백 개, 수만 개라도 한 그릇에 넣으면 한 그릇의 물이지 딴 물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깨달아서, 여기 앉아 있는 분들이 다 깨달아서 부처가 됐다 하더라도 일 불(一佛)입니다. 일 불! 그래서 배우는 사람들은, 법당에 부처님을 천 불을 해 놓거나 만 불을 해 놓거나, 이 부처 저 부처 많이 해 놓으면 머리가 산란해서 공부를 못 하죠. 공부를 다 하고 난 뒤에는 신중이니 독성이니 칠성이니 지장이니 관세음이니 할 것 없이, 만 불이니 천 불이니 할 것도 없고 마구니들도 아주 둘 아니게 다 그냥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때 가서는 걱정도 없죠.
산 사람은 모습이 있고 죽은 사람은 모습이 없거든요. 죽은 사람은 모습이 없는 바람에 모습이 있는 사람한테 와서 몽둥이로 쳐도 보이질 않으니 누가 쳤는지 모르기 때문에, 매를 치는 사이 없이 치고 맞는 사이 없이 맞았다, 이런 문제가 나와요. 그렇기 때문에 깨치게 해서 인정을 받고, 해인(海印)을 받고, 열쇠를 받는 것도 그런 거를 다 알아서 능통하고 모두 마구니도 둘 아니게 볼 줄 알고, 자기 아님이 없이 할 줄 아는 사람에게 열쇠를 맡기게 돼 있죠.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자기 성미에 맞지 않으면 톡 때려서 못 쓰게 만들고, 또 자기한테 맞지 않고 미우면 그냥 콕 때려서 파산을 시키고 이런다면 어떻게 그 열쇠를 맡기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거를 막론하고 예쁘든지 밉든지, 죄가 많든지 적든지 없든지 둘로 보지 않고, 무조건 자기와 둘 아니게 보고 자기 아픔과 둘 아니게 보고, 자기 부모 아님이 없고, 자기 자식 아님이 없고, 자기 형제 아님이 없이 이렇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야만이 한바다 가운데서 인정을 받는다는 얘기죠. 그러니 여러분께서 항상 문을 열고, 우리가 인생 한 철 사는 거를 오늘 하루라고 생각하십시오.
내가 옛날에 다니다가 그냥 허기가 져서 땅을 엉금엉금 기어가서 흐르는 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그 한 모금을 마신 뒤에 두 모금째는 딱 마시지 못하게 됐어요.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한 모금은 마셨는데 왜 두 모금째는 마시지 못할까?’ 하는 생각을 했죠. 그랬는데 그냥 비호같이 부처님의 채찍이 날아오는 겁니다. 그건 뭐냐 하면 ‘한 모금도 아홉 모금이 되고, 한 모금이 천 년의 천 모금이 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도 천 년이 일 초가 될 수 있고, 천 년이 하루가 될 수도 있고, 천 년이 사흘이 될 수도 있고, 삼 개월이 될 수도 있다. 이러니 그대로, 없다 있다가 모두 없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그대로 여여한 것이므로 없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그 물 먹으면서, 물 한 모금 마시고는 엎드려서 생각을 한 거죠.
그걸 다 생각을 하고 나니까 그때서야 물 먹기가 아주 수월해졌어요. 그러나 스스로 의정이 나야지 억지로 의정을 내려고 해도 아니 되고, 억지로 아니 내려고 해도 안 되고, 그냥 이 생활 자체가 그대로 공법을 배우는, 평등공법(平等空法)을 배우는 바로 우리 도량처다 이거죠. 그러니까 ‘나는 바빠서 이 공부를 못 해요.’ 하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일체제불의 마음은 내 한마음이다.’ 이런 노래를 여러분 잘 부르시죠? 그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하나 좀 생각해 보세요. ‘왜 스님이 그런 가사를 써서 노래를 하게 했나?’ 하고요. 우리들의 법이 부처님의 법이지 우리들의 법을 빼놓고 부처님의 법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그거는 무효예요, 그냥.
악이 있으니까 선이 있는 거지, 생각을 해 보세요. 악이 있으니까 선이라는 이름이 나온 거지 악이 없다면 선이라는 이름이 안 나왔죠. 그러니까 악이 선이라는 이름을 빛나게 해 주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선이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악도 같이 둘이 아니로구나 하는 거를 알아야죠. 모두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사는 거지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오늘, 되는 것도 질문하시고 안되는 것도 질문하십시오. 예를 들어서 이걸 전깃줄이라고 합시다. 오신 여러분이 줄이라면, 여기 본래 있는 줄하고 맞붙어서 불이 들어왔을 뿐이지 내가 해 준 것도 없고 여러분이 한 것도 없이 불이 들어왔을 뿐입니다. 그래서 ‘말로 이름을 짓되 내가 한 것도 없고 네가 한 것도 없느니라. 그 반면에 네 마음 내 마음이 둘이 아닌 까닭에 불이 들어왔을 뿐이다.’ 이런 거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한생각을 잘해서 그 나쁜 이미지를 한번 굴려서 바꾼다면 헌 물이 새 물 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여러분이 몸을 가지고 사시니까 ‘내가 뭐 이러고 저러고’ 하는 데 ‘내가’라는 건 없습니다. 그래서 공생(共生)입니다. 공생! 여러분이 공생 아닙니까? 공(空)한 공생의 개체! 그리고 공심(共心)의 개체! 개체는 하나인데 공생(共生)ㆍ공심(共心)ㆍ공체(共體)ㆍ공용(共用)ㆍ공식(共食) 하고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양(供養)이라고 하고 공덕이라고 하죠. 공양은 한마음이신 부처님께서 공양을 받으신다 이런 겁니다. 한마음으로 둘이 아니게 반야줄을 쥔다면 그게 바로 공덕이 되느니라. 안에도 더불어 같이 한마음이요, 밖에도 더불어 같이 한마음이니 자리마저도 한자리다 이겁니다.
부처님이 말로만 그렇게 해 놓으신 게 아니라, 가만히 생각을 해 보세요. 한 지구 안에서 하나가 빠져도 아니 되리만큼 전부 서로 도와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거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저거 하는 사람이 있고, 지게꾼이 있으면 또 짐을 지워 가지고 갈 사람이 있고, 이사할 사람이 있으니까 이사차가 생긴 거죠. 이사차가 있으니까 이사할 사람이 생기고. 이 모두가 아주 미생물에서부터 만물이 다 서로 도울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긴 거거든요.
난 예전에 산에서 말입니다, 너무 춥기 때문에 가랑잎을 웅덩이에다 넣고는 그 속에 앉아서 생각을 하기를, ‘야! 참 희한하구나! 그 왜, 우리같이 못나고 부족한 사람은 다 없애고, 잘생기고 잘살고 복 많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나 태어나서 잘 살게 하지 왜 우리같이 못난 사람, 또 보기 흉측한 벌레들이나 보기 흉측한 뱀 같은 그런 짐승들을 나오게 해서 세상천지에 이렇게 돌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거를 생각하다 보니까 추운 줄도 모르겠고 그냥 밤을 꼴딱 새고서 나오니까 아침에 웃음이 나요. ‘내가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사람일까? 미쳤다고 할까?’ 하는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그랬는데 그것이 아니었어요. 미친 사람도 아니고, 성한 사람도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알기 위해 그렇게 수난을 겪지 않으면 길을 모르죠. 그 수난을 겪은 게 양식이 되고, 재산이 되고, 공덕이 되고 그런 거죠.
이런 얘기 그전에 내가 한번 했죠. 지금 광명사(光明寺)의 마당이 그전에 밭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땅 사기 전에 밭을 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밭에다가 깨를 담뿍 심어 놨었어요. 가난한 사람이었는데 그냥 진딧물이 함빡 앉아서 깨를 못 먹게 생겼어요. 그러니까 그때 가서 농사지은 게 다 이 모양 이 꼴이 됐고 벼도 시원치 않아서 일곱 식구가 굶어 죽겠다고 노인네가 그래요. 그래서 관(觀)하는 걸 가르쳐 줬어요. ‘이 깻조자리의 진딧물도 전부, 주인공 너만이 없애게 할 수 있어!’ 하라고 가르쳐 줬더니 그걸 믿고요, 만날 그렇게 한 거예요. 그 웬만한 사람 같으면 믿지 않습니다, 그거. 그까짓 소리 해 줬다고 그렇게 엄청난 문제들을 앉아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거? 아마 나부터라도 아리송해서 믿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참 순박하기가 한량없지 아, 그걸 믿고선 그렇게 했더란 말입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에 나가 보니까 요렇게 빨간 점이 있고 풍뎅이같이 생긴 요만큼씩한 거 있죠? 고런 게 그냥 함빡 앉아서 진딧물을 다 빨아 먹더랍니다. 다 빨아 먹고는 그냥 훌렁 날아가더랍니다. 그래서 깻조자리가 되살아나게 되니까 ‘야! 이거 참 희한하구나!’ 그래 가지고서 다른 것도 그렇게 했대요. 그랬더니 그 해에 농사가 잘돼서 오막살이지만 우리가 보태 준 돈 조금하고 합쳐서 집을 사 가지고 나갔죠. 그러한 일이 있었고요.
그러한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분 생활 속에서 전체가 그렇게 돌아가는 겁니다. 내가 항상 얘기해 드리죠? ‘이 몸속의 의식들을 지금 말로 따진다면 입자라고 볼 수 있다. 어떠한 고통을 받더라도 주인공을 믿고 관한다면 입자가 나가서 그 속에 자기로 들어가서 다 조절하고, 자기를 이끌어 줄 수 있다.’ 마음을 그렇게 내면 그렇게 따라 주고, 마음을 저렇게 내면 저렇게 따라 주고, 마음을 엉뚱하게 내면 엉뚱하게 따라 주고 이럽니다. 그러니 얼마나 묘한 법이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내 몸 가지고 내 몸을 마음대로 하고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해서 내 몸을 이끌어 가고, 내 식구를 이끌어 가고, 내 조상을 이끌어 가고, 내 자식을 이끌어 가고, 세세생생에 돌에다 세워 놔도 살 수 있게끔 이끌어 가는 길은 바로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앞서도 얘기해 드렸지만 모든 게 자동적으로 입력이 됐으니까, 앞서 수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나오는 것을 현재 또 잘 생각을 해서 주인공에 다 맡기니까 그게 재입력이 되는 겁니다. 재입력이 된다면 바로 팔자 운명이니 뭐니 하는 거, 그런 것들이 다 그냥 삭쳐 없어지는 거죠. 새로 입력 들어간 것만이 현실에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세가 좀 펴지고, 싸움이 없어지고, 마음이 너그러워지면서 처음에는 그걸로다 자꾸자꾸 체험을 하게 되고 또, 자기 스스로서 알게 되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 그런 게 모두 거짓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이 도리를 알고 있어야 급하면 쓸 때도 있겠죠. 들어 보지도 못하고 먹어 보지도 못했다면 급할 때 어떻게 처리를 하겠습니까? 그거를 평소에는 못 하고 안 하고 그러다가도 급하면 하게 됩니다. 생각나게 되거든요. 정 급하면 모습 없는 나의 마음, 즉 체 없는 나가 그 속으로 투입이 됩니다. 내가 그랬죠? 어떤 혹성이 문제를 일으킬 때에는 하시라도 내가 그것이 될 수 있다고 그랬죠?
그렇기 때문에 머리가 잘못된 사람은 잘못된 대로 주인공에 집어넣어야만이 됩니다. 본인이 정신이 없어서 못할 때에는 주변에서라도 자꾸 집어넣어 줘야 된다 이겁니다. 그래야 앞서 그 혼란스러웠던 입력 자체가 없어지고 새 입력이 들어감으로써 바뀌게 되니까 마음으로 고장난 거는 마음이 고쳐야 된다는 것이죠. 아무리 북을 두들기고 목탁을 치고 굿을 하고, 어떤 짓을 해도 그쪽에선 콧방귀 뀌고 점점 더할 겁니다, 아마. 그러나 얼마나 좋아요. 아무리 악한 귀신이다 할지라도 그 착한 바다와 같은 마음이 얼쓱 껴안고 ‘야! 너는 본래부터 나쁜 게 아니야. 몰라서 그런 거 아니야?’ 하고서 아주 아름다운 마음으로써 싸안아 준다면, 그 마음이 일순간에 녹아지고 그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 마음을 읽어 보니까 너무나 자기가 잘못된 사실을 알게 돼서, 그렇게 하나가 되죠. 그래서 진짜 자비는 그런 데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이 말로만 사랑 사랑 하지 진짜 사랑을 한다면, 부부지간에도 그렇고 자식지간에도 그렇고 보기 싫어하지 않을 겁니다. 끼리끼리 만난 인연들이거든요. 우연이라는 거는 없어요. 여러분도 살아 보시지마는 노동하는 사람은 노동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일하고, 정치하는 사람은 정치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정치를 하고, 상인들은 상인들대로 모여서 논의하고 이러죠. 그런데 어떻게 우연이 있겠습니까? 한 가족이 모이는 데도 사과는 사과대로 모이고, 금은 금대로 모이고, 은은 은대로 모여서 살고, 구리는 구리대로 모이게끔 돼 있거든요, 넝마는 넝마대로 모이고요. 그래서 세계가 지역이 다 다르다 할지라도 그런 지역에 가서 태어나는 것도 끼리끼리이기 때문에 그런 지역에 가서 태어나게 돼 있습니다. 기계에다 넣고 큰 것 작은 것 고르고, 썩은 것 성한 것 고르고, 이것 따로 저것 따로, 전부 따로따로 끼리끼리 놓고 팔고 사고 그러죠?
그렇듯이 사람도 차원에 따라서 모습을 가지고 나오게 하면서, 그 차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골라져서 지금 굶어서 죽는다고 하는 나라나, 이런 나라 저런 나라에 제각기 아주 철두철미하게 태어나죠. 미국에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한국에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말입니다. 그렇게 아주 질서정연하게 돼 있는 거죠. 우리가 지금 엉망으로 사는 것 같지만, 왜 잘사는 사람은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이렇게 못살게 되나 하고, 어처구니가 없다고 한탄을 하고 그러지마는, 그게 자기가 다 만들어 놓은 일입니다. 누구한테 한가를 할 게 하나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거를 안다면 남을 미워할 수가 없고, 죄를 더 지을 필요도 없고, 뭐 마음을 그렇게 초조하게 가져서 내 몸을 병들게 할 것도 없고, 망했다고 그냥 돈 버리고 사람 몸뚱이 버리고 이렇게 할 필요도 없고요. 버렸으면 ‘어, 버려졌나 보다. 네가 버려지게 했으니까 네가 또 일으켜 세우겠지.’ 이렇게 태연하게 마음을 먹고 늠름하게 나간다면, 아마 주변 어디서든지 자기 주인공이 귀한 사람을 끌어들여 만나게 해서 서로가 살게끔 될 겁니다.
그런데 뭐, 죽네 사네 하면서 집안의 식구들도 못살게 하고, 화가 나서 오며 가며 화풀이를 여기저기다 하니까 식구들 마음이 편안할 수가 있나요. 그러니 복도 들어오려야 들어올 수가 없죠. 그 틈에 들어올 수가 있나요? 오늘 살다가 이따 죽는 한이 있더라도 ‘허허!’ 웃을 수 있어야 돼요. 그게 뭐가 그렇게 겁나는 일입니까? 그러한 도량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는, 내일 죽는대도 겁 안 나는 사람한테는 그렇게 죽게 하지도 않아요. 청개구리거든요. 이렇게 한다 하면 저렇게 하고, 저렇게 한다 하면 이렇게 하는 이치가 바로 우리들의 욕심을 버리게 하기 위한 방편이라고도 볼 수 있죠. ‘야, 하늘이 무너진다는데 이거 다 먹어치우고 그냥 다 써 버리자.’ 이러는 사람 앞엔 정말 다 써지고 하늘이 무너지지만, 허허허…, 그저 그런 거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자기 그대로 꿋꿋이 가면서, ‘아휴! 이따가 죽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사람이 소꿉장난을 하다가 날이 저물면 다 버리고 가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남의 재산을 함부로 쓰면 어떡하나, 주인공의 재산인데.’ 그렇게 하고선 아끼고 좋은 일 잘하고 살면 그 값어치가 더 들어오면서 사람 살기가 유하고 하늘이 무너지지도 않고 그러죠.
기독교에서도 불바다가 된다, 다 죽는다 이러는데, 제가 스물 몇 살부터 그러던 건데 여직껏 그래요. (대중 웃음) 하하하…. 그런데 그것이 왜 그러냐? 그것이 모습이 변해서 그렇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불바다가 되고 그래서 죽는 게 아니라 자기네 마음들이 그렇다는 얘깁니다. 마음들이 그렇게 불바다가 된다는 거죠. 이 마음의 근본은 불이거든요. 그래서 마음이 헐렁해지면 정말 불바다가 되는 거죠.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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