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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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별 없는 깨끗함 바로 보라”
절문은 속세와 법계의 경계 출가자 반드시 통과해야
주련 의미 모르면 자식이 부모 이름 모르는 것과 같아

[원문]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
-가야산 해인사 법보전

[번역]
깨달음이 있는 곳은 그 어디 인가?
지금 생과 사가 있는 이 자리다.

[선해(禪解)]
내가 불가(佛家)에 들어 온지도 벌써 오십 삼년이 지났다. 나에게 출가(出家)의 의미는 매우 깊다. 절에 있는 문(門)의 의미는 세속의 문과는 상대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속가(俗家)에 있던 사람이 출가의 길을 걸을 때 가장 먼저 통과해야 하는 게 바로 절에 있는 문이다. 말하자면 절의 문은 속세와 법계(法界)의 경계인 것이다.
그럼, 절의 문은 수행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걸까? 절 문밖의 세상은 오욕락(五慾樂)으로 인해 번뇌가 끊임없이 끓는 곳이요, 절 안의 세상은 바로 깨달음이 있는 곳이다. 때문에 출가자는 반드시 이 문을 통과해야만 사문(沙門)이 될 수 있다.
해인사 법보전에 걸린 주련(柱聯)을 읽어보면 감히 그 깨달음의 극치를 온전하게 맛볼 수가 있다. 그 어떤 깨달음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이 있다. 깨달음을 달리 표현하면 열반·해탈·피안 등 수많은 언어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 하나로 귀결되는데 그것이 바로 ‘부처’이다.
나는 절의 문을 통과하면서 오직 부처가 되기 위해 출가를 감행했다. 그리고 출가를 한지 무려 오십 여 성상(星霜)이 흘러갔다. 그동안 나의 가사(袈裟)에는 수없이 많은 무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려 얼어붙었으며 춥고 배고프고 견디기 힘든 세월의 때가 온전히 묻어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깨달음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그만큼 부처의 길은 단 한순간에 올 수도 있으며 아니면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오직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동안 과연 나는 부처님의 제자가 돼 그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숱한 회한과 불굴의 정진을 하면서도 결국 내가 서 있는 이 곳, 이 자리가 깨달음의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처럼 절에 걸려 있는 주련의 의미는 그 어떤 것보다 의미가 매우 깊다. 모든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죽이고, 자신을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주련에 적힌 그 한 줄의 함축적인 의미를 깨달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절 기둥에 적혀 있는 단 한 줄의 선구(禪句)는 그 절의 얼굴이며 그 법당(法堂)의 직언(直言)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출가자는 주련에 적혀 있는 조사스님들의 법문을 함부로 여겨서도 안 되며 마음 깊이 각인(刻印)해야 한다. 불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행자나 불자들은 주련에 적힌 부처나 조사의 깊은 뜻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마치 이것은 자식이 부모의 이름을 모르는 것과 같고 수행자가 자신이 걸어가야 할 올바른 법도를 찾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해인사 법보전에 적혀 있는 주련의 의미는 심히 마음 안에 큰 경종을 울리게 한다. 불가에는 피안(彼岸)이란 말이 있다. 즉 깨달음이다. 그런데 그 피안은 단순하게 말하면 ‘저쪽 세상’이라는 뜻이다. 그럼 ‘이쪽 세상’은 무엇일까? 바로 생사(生死)가 있는 자리이다.
그런데 주련에는 깨달음이란 저쪽이 아닌 바로 오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 있다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다. 다분히 이속에는 선(禪)의 참맛이 물씬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의 원류는 달마선이 그 모태이다.
나는 오늘 날 많은 불자들에게 선사상(禪思想)을 이야기하면서 대체적으로 달마 대사와 혜가 스님에 대한 것을 많이 인용한다. 이 보다 더 쉽게 불자들에게 선을 가르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혜가 스님은 혼자 수행을 하다가 도를 깨치지 못해 어느 날 달마 대사를 찾아갔다. 마침 소림굴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달마 대사는 혜가 스님의 인기척에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오직 면벽수행만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달마 대사의 수행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지만 눈이 쌓여 어느새 자기의 허리춤까지 차올랐으며 강추위는 그의 몸을 얼어붙게 했는데 다음 날 아침, 마침내 달마 대사가 혜가 스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누구이며, 어떻게 왔는가.”
“도를 구하러 왔습니다.”
“도를 구하러 왔다고?”
“네. 달마 스님에게 제가 원하는 바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 내 마음이 대단히 불안합니다. 저도 수행을 한다고 하지만 수행의 바른 길을 알지 못하며 또한 가는 길을 모릅니다.”
“언제부터 있었느냐.”
“하루가 지났습니다. 그래서 눈이 제 온몸을 덮었습니다.”
달마 대사는 깊은 생각에 잠시 잠기다가 이내 이렇게 말을 했다.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불안한 마음, 초조한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것은 형상이 없어 지금 드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부터 너에게 있었던 그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들은 이 순간 사라졌다. 내가 지금 그것들을 없앴노라.”
이 때부터 혜가 스님은 자기 자신을 옭아매던 초조한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사라졌음을 스스로 느꼈다. 결국 혜가 스님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은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때부터 달마 대사의 제1 제자가 됐다. 그가 이렇게 큰 고승의 제자가 됐던 것은 폭설이 내리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달마 대사를 만나겠다는 신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또한 하루아침에 큰 깨침을 이루게 됐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느껴 알아야 할 것은 바로 “네가 가지고 있는 초조한 마음과 불안한 마음을 가져 오너라”에 있다. 이것이 바로 선이 추구하는 마음이다. 결국 마음이란 불안한 것도 아니요. 초조한 것도 아니며, 또한 죄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럼,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분별하지 않는 깨끗함이다.
오늘 절을 찾아 가는 모든 불자들도 혜가 스님이 가진 그 마음을 들고 가라! 그러면 그 순간 모든 괴로움이 사라질 것이다.
해인사 법보전에 있는 주련의 깊은 뜻은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큰 깨달음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 조계종 원로의원
2009-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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